|
시조시인 제정례 스토리텔링,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찾아서 |
동곡서당(東谷書堂)의발자취를 따라서
동곡서당이 자리한 마을을 둘러 이은 산봉우리들이 안개에
잠겨 보이지 않더니 햇살이 퍼지면서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능선을 그리는 산은 넓고 넓은 하늘을 호수로 빚어 동곡서당과 그 주변을 가슴에 품었다. 봄을 맞아 새 옷으로 갈아입고 꽃으로 단장한 산은 오늘도 그 향기와 빛을 바람에 실어 세상 곳곳으로 날아간다.
할아버님 함재(函齋)제영근(諸英根)처사 (1899 ~1960)
동곡서당 운영과 후학양성 및 민족지도와 농촌계몽을 하셨으며 제자는 유계인 락신계 명단에 기록된 분들만 삼백분 정도 계신다. 그 중에는 고성신문을 통하여 잘 알려진 제재형씨(필자에게는 아저씨 되신다.)와 정일수씨도 계신다. |
고성문화원 이사와 당항포 숭숭사 초대제전위원을 역임하셨으며 경남 대학교 도서관 고서적 번역 위원회 연구위원이셨다
|
동곡서당 4대 접장(接長) 정동(井同) 제태호(諸台鎬)
오라버님이시며 청년회의소 회장역임을 하는 등 사회 활동을 하시다가 현재는 동곡서당을 유지·운영하고 계신다. |
회고해 보면, 얼굴도 뵙지 못한 증조부님과 사진 으로 얼굴만 뵌 할아버님 두 분의 삶은 어머님의 설명을 통하여 생생하게 그릴 수 가 있었다. |
그러나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증조부님과 할아버님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이렇게 재조명하게 되리라고는 예견하지 못했다.그저 그 분들처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그 길을 따라 가리라고 생각했을 뿐.신춘문예 당선을 하고
내 시집 “깜부기의 첫사랑”이 기획 출판되면서 몇 대째 서고에 뭍인 채
소중히 보관되어 오던 집안의 내력 일부가 그 시집 속에 담겼다. 그 내
력들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이후 군인가족으로 살던 내가
고향으로 돌아와 소가야 시조 회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그러던 중 지인으로 부
터 동곡서당에 대한 이야기를 고성신문에 연재할 것을 제안 받았고 시집에 이어
이렇게 글을 연재하게 되었다.
# 어머님의 이야기
어머님께서는 증조부님보다는 할아버님에 관한 얘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증조부님
에 관해서는 어머님께서도 아버님과 결혼하신 후에 할아버님을 통해 들으신 내용이많았지만, 할아버님과는 함께 생활하셨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버님께서 스무살,어머님께서 열여덟 살 되시던 해에 두 분은 결혼을 하셨다. 어머님께서는 아버님과 결혼 하실 무렵의 사성을 장롱 깊이 잘 보관하고 계셨는데, 어머님께서 간직하신 할아버님의 친필은 그 사성내용이 처음이었다. 사성이란 결혼 전 신랑 편에서 신부 측에 보내는 사주단자를 이르는 남부지방의 방언이다. 사성단자에 들어가는 물건으로는 신랑의 생년월일을 적은 사주와 음양을 의미하는 청실·홍실로 맺은 듭실, 초례 때 신부가 입을 옷감 한감이 들어가는 것이 원칙으로 청실홍실은 부부의 금슬과 화합을 의미하고 사주는 신랑의 앞날에 대한 희망의 바람이며 옷감은 영원한 부부의 연을 강조하는의미로 초례청에 입을 옷을 해서 입고 오라는 의미라 한다. 어머님의 사성 속에는 할아버님께서 외할아버님께 드리는 인사말씀도 들어 있었다.
어머님께서 간직하고 계셨던 사성의 봉투는 넉 장으로 할아버님께서 한지를 손수 마름질해 만드신 것인데, 자녀들의 결혼이 조부님께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지를 그 정성스러운 모양을 보기만 해도 느낄 수 있다. 사진으로 뵌 할아버님의 얼굴과 어머님께서 설명해 주신 할아버님의 모습이 정갈한 할아버님의 필체와 어우러져서 마치 돌아가신 할아버님을 뵙는 듯 마음이 다정하였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할아버님께서는 오십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할아버님의 필체는 남아, 할아버님 대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문체로 써 내려가신 사성의 내용을 보면서 알 수 있는 1950년대의 결혼-양가의 부모님께서 자녀간의 결혼을 약속하시고, 양가의 자녀는 그 뜻을 받들어 결혼하던-풍습을 현대의 결혼 풍습과 견주어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결혼 하신 어머님은 증조부님과 할아버님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나에게 두 분을 설명해 주시면서 키가 크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키로 두 분 다 6척에 가까운 키셨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님의 사진 곁에 까치발을 하고 서보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까치발을 하고 듣던 어머님의 말씀은 할아버님이 얼마나 며느리를 아끼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아버님께서 큰 오라버님을 낳으시고 군에 입대하셔서 행정병으로 근무를 하실 적의 이야기다. 어머님께서는 할아버님께서 출타하셔서 돌아오실 시간이 되면 저녁밥을 따뜻하게 지어 두신
후, 바쁘신 중에도 큰 오라버님을 등에 업으시고서는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아래까지 마중을 나가셨다. 그러면 할아버님께서는 늘 무척 반겨 주셨는데 어쩌다 어머님께서 조금 늦게 나오시는 날은 할아버님께서 뒷짐을 지시고 ‘오늘은 며늘 아가가 좀 늦는구나.’하시며 부러 서성이셨다고 하신다. 그러면 어머님께서는 종종걸음으로 할아버님께 다가가시고 할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을 반기시면서 “오늘도 잘 놀았느냐?”하시며 어머님의 등에서 큰 오라버님을 받아 안으셨다. 그렇게 두 분은 다정하게 걸어서 댁으로 들어가셨다. 어느새 지는 해를 등 뒤에 두시고서.
#동곡서당(東谷書堂)의 정경을 그리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국도를 타고 달리다 보면 맑은 물결 잔잔한 대가
저수지가 보이고, 멀리보이는 정자나무를 돌아서 들어가면 조용한 바람이 찾는 손
님을 반긴다. 경남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에 있는 동곡서당(東谷書堂). 고즈넉한
이 한옥이 할아버님의 동곡서당이다.
오늘은 동곡서당이 자리한 마을을 둘러 이은 산봉우리들이 안개에 잠겨 보이지 않더니 햇살이 퍼지면서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능선을 그리는 산은 넓고 넓은 하늘을 호수로 빚어 동곡서당과 그 주변을 가슴에 품었다. 봄을 맞아
새 옷으로 갈아입고 꽃으로 단장한 산은 오늘도 그 향기와 빛을 바람에 실어 세상 곳곳으로 날아간다.
기록된 바로 4대째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선비 정신을 소중히 이어가던
많은 유생들께서 꿈을 키우시던 곳이자 우리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한
이 곳 동곡서당.
눈을 뜨면 새소리가 제일 먼저 음률을 읊고 문을 열고 대청마루로 나서면 앞산이 정
원처럼 펼쳐지는 소박하고 조용한 곳. 그 앞에선 언제나 돌아가신 할아버님과 아버님을 만나 뵌 듯 감회가 새롭다. 서당 본체 가운데는 할아버님의 서고가 있고 대청가운데 아버님께서 친필 서각하신 현판 세 개가 걸려 있는데 동곡서당(東谷書堂)의
건립 내력이 담긴 동곡서당기 (東谷書堂記)와 임당 하성재 선생님께서 할아버님의
호인 함재를 지으시게 된 내력이 담긴 함재명(涵齋名), 그리고 함재기(涵齋記)이
다. 아버님의 친필 서각 글씨체들은 하얀 학이 창공을 나는 듯 아름답다. 서당의
내벽은 황토위에 겉만 하얀 석회로 되어 있다. 천연 석회 화장품으로 곱게 화장을
한 듯한 황토에서 세월의 연륜이 묻어난다.
할아버님께서는 1899년(대한광무3년)에 태어나셔서 1960년에 돌아가셨다.
조조
돌아가신 후에 할아버님과 동문수학하신 하산 성순영님을 아버님께서 찾아 뵈었
을 때, 성순영님께서 아버님을 맞아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리신 모습이 동곡
서당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태호 오라버님의 설명을 통해 들었을 때, 나도 그 상황
이 그려져서 마음이 울컥하였다
정면에서 왼쪽 방이 함재 할아버님의 서실이고 방문위에는 할아버님의 호인 함(函
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눌재 김병린 선생님의 큰 아들이신 유당 선생
님께서 쓰셨다
오른쪽 방은 아버님의 서실이고 오른쪽 방문 위에 정검실(靜俭室)이란 현판이 걸
려 있는데 이 현판도 아버님께서 친필 서각 하셨다. 정검실(靜俭室)은 “검소하고
고요하며 깨끗한 방”이라는 뜻으로 이곳을 들른 사람들이 그런 정서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모태가 되길 염원하신 아버님의 뜻이 담겨 있다. 본가 아버님의 방문
위에는 인간문화재 7호이신 고성의 조용배님께서 쓰신 금계서실(琴溪書室)이란 현
판이 걸려 있는데 글씨체는 어떤 어려움도 능히 이겨낼 듯 힘이 있다. 다음에 이
현판도 서당으로 옮길 예정이다.
동곡서당 정검실(靜俭室)에 들어서면, 오른쪽 안벽엔 전(前) 고성향교의 전교이
신 허복만님께서 아버님께 보내신 서체가 걸려 있다. 두 분께서는 이렇게 서로 자
주 글귀로 내왕하시면서 삶의 지표를 나누시곤 하셨는데, 아버님을 어진 형이라고
하시면서 쓰신 이 글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은의를광시(恩義廣施) 하라. 인생하처불상봉(人生何處不相逢)가
수원을막결(讐怨莫結) 하라. 노봉협처난회피(路逢狹處難回避)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은혜와 의를 널리 베푸십시오.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만나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맺지 마십시오. 좁은 길에서 만나면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내용이다. 직접 만나 뵙진 못했지만 이 글귀의 서체와 내용을 보면
그 분의 성품과 인품이 느껴진다. 두 분 사이에 흐르던 따스한 정도 느껴지며 나도
내 지인들과 이렇게 서로의 진심을 나누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아낸다.
아버님께서는 1931년에 태어나셔서 2012년에 돌아가셨고 ,아버님의 비문작성은
현재 고성 향교 전교이신 정창석 전교께서 하셨다. 아버님의 삶의 흔적들은 이렇
게 곳곳에 남아 늘 아버님을 생각케 한다.
이 글귀를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할아버님께서 변영만님이나 이건승님과 왕래하신
편지도 생각난다. 서로의 직인을 찍으시고 내왕을 하셨던 그 서신들. 그 속엔 뭔
가 중요한 것이 들었을 것 같아 무슨 내용이 들었을까 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소중히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잠시 할아버님(諸瑛根)과 변영만(卞榮脕)님께서 내왕하신 서신 내용의 일부를 소
개한다.
이 편지를 보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른쪽에 변영만(卞榮脕)님의 도장이,
왼쪽에는 할아버님(諸瑛根)의 도장이 찍혀 있다. 변영만님은 법무부 장관을 역임
하신 법률가로서 한학자시고 독립운동가시다. 사법권이 일본에 이양되자 법관직을
사직하셨고, 국권 강탈된 후 중국에 망명하셨다가 광복 후엔 성균관 대학의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 쓰셨다.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로 발송
한 민족시인 수주 변영로의 형님이시기도 하다.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동생 변영태
와 함께 변씨 삼절로 불리며, 할아버님께서는 이 세 분 모두와 교분이 깊으셨다.
이 서신은 서고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곡서당이 건립되기 전 이 서당의 모체인 본가 아래채에서, 함
재할아버님께서 일제강점기에 지으신 한시 추흥(秋興)을 소개한
다. 이 시는 대한민국독립문화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秋興추흥
靑燈山夜靜看書颵颯秋聲入戶憫抱病馬卿吟不絶登樓王粲賦
何如天邊歸鴈終無涵草際鳴蟲恨有餘
一片白雲千里去是時胸韵最淸虛
산모양의 파아란 등잔 불빛
고요한 밤에 책을 보니
다다다닥 나뭇잎을 때리는
차고 쓸쓸한 가을 바람(颵颯秋聲)에
후두둑 떨어져 구르는 낙엽소리가
집안까지 들어선다.
스산한 마음과 병든 몸으로
어찌 한을 읊지 않을 수 있으랴.
여유를 찾아 누대에 올라
왕찬을 생각하며 글을 짓는다.
어찌하여 하늘변방의 기러기는
돌아옴이 끝이 나고
한스러운 풀벌레 울음 울 때
풀잎 젖음은 끝이 없는가!
남아있는 한 조각의 흰 구름이
천리를 가는 이때
언제쯤 좋은 시절이 오려나.
추흥은 일제치하의 시대적 배경을 한탄하며 시국에 대한 근심과 앞
날에 관한 소망을 그린 시로서 시 속의 ‘기러기’는 지조 또는 충
절을 상징하는 것이고,‘풀벌레’는 고생하는 민초를 상징한
다. 풀벌레들의 한스러운 울음에 풀잎 젖음이 끝이 없다는 것에서
그 당시 우리 민중들이 얼마나 고통 받고 있었는지를 짐작 할 수 있
게 한다. 강제로 행해진 단발령,한국식 착복에 대한 억압 등 핍박
받던 일제강점기의 상황 아래 우리 국민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침략
자들에게 시로서 호소하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민족이 대동단결
하여 깨우칠 것을 염원하고 계셨던 할아버지의 심정이 담겨있다.
이 한시를 쓰실 때의 할아버님의 당시 심중을 헤아려 보건데, 초
롱불 켜놓고 잠 못 이루던 깊은 밤, 가을바람에 낙엽이 부딪히는
소리에 쓸쓸함을 느끼면서 ‘언제쯤 밝은 시절이 오려나.’하고
생각하시며 지은 글이라 여겨진다.
스크랩중 사진이 삭제되었음 동곡서당 내부의 정경 일부분. 황토벽위에 외부는 하얀 석회로 되어 았어 마치 천연 화장품으로 곱게 화장을 한듯하다. |
아버님께서 친필 서각하신 동곡서당의 건립내력이 담긴 동곡서당기
|
스크랩중 사진이 삭제되었음 |
인간문화재 7호이신 고성의 조용배님께서 쓰신 금계(아버님)서실 현판 |
스크랩중 사진이 삭제되었음 |
전(前) 고성향교의 전교이신 허복만님께서 아버님께 쓰신 글귀 |
스크랩중 사진이 삭제되었음
변영만(卞榮脕)님과 할아버님(諸瑛根)께서 왕래하신 당시 서신 내용의 일부 |
#동곡서당(東谷書堂)의 역사 - 할아버님의 이야기
본관은 칠헌(漆原)이시며 휘는 영(瑛)자 근(根)자시요, 자는 경
집(敬執)이시며 호는 함재(涵齋)이시다. 할아버님께서는 1899
년(대한 광무3년)경남 고성 대가면 양화리에서 태어나셨다. 할아
버님께서 쓰신 매수헌(증조부님)의 행장에는 증조부님과 증조모
님께서 할아버님을 키우실 때의 심경과 상황이 잘 그려져 있
다. 검소하게 생활 하시면서 좋은 책이 있으면 늘 구입하려 애쓰
셨다는 내용과 증조모님께서 지어 주신 새 옷을 물에 빠진 다른 분
에게 벗어 주어 있어서 증조부모님의 성품과 모습을 짐작케 한
다. 할아버님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증조부님의 명으로 달성부(현
재 대구시)에 유학하시기 위하여 당시 300리 길을 걷고 낙동강을
건너실 정도로 학구열이 대단하셨다. 국내 한학의 거두이신 심재
(深齋)조긍섭 선생님을 모시고 변지증을 부여받기도 하셨다. 때
가 때인지라 남의 이목을 피해서 홀로 산길을 택하셨으며 일행은
없으셨다. 대구 정산서당(鼎山書堂)에 도착하시면, 전국각지에
서 찾아오신 수많은 심재선생님의 제자들과 수학하시면서 시대상
황을 걱정하시고 나라의 앞날을 운운하시기도 하셨다. 할아버님
의 스승이신 심재 선생님께서는 전국각지의 문사들과 교류하셨는
데 그 중에서 곽종섭 선생님, 매천 황현 선생님, 김택영선생
님, 경재 이건승님 등은 차후 애국지사로 추증되신바 있으시
다.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파리프랑스)장서에 서명하신
임당 하성재선생님, 홍당 이병호선생님, 일여 성순영님, 박장현
님 등은 할아버님과 각별한 벗들로서 함께 동문수학하셨다. 앞서
동곡서당의 모습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여 성순영 선생님께서는
동곡서당기를, 임당 하성재 선생님께서는 함재명(函齎名)을 기
술하셨고 그 내용이 현재 동곡서당에 부착되어 있다.할아버님께
서는 민족 지도자이신 산강재 변영만님, 눌재 김
병린님, 회봉 하겸진님, 현산 이현규님, 우인 조규철님, 겸산
김정기님과도 깊은 교분이 있으셨다. 할아버님의 저서로는 함재
집이 있고 성재 허전 문초, 매천 황현 문초 등 많은 필사본이 전해
지고 있다.
할아버님께서는 뜻을 세우시고 서울 명문 대학의 강의 초빙도 사양
하신 후 고향으로 귀향하신 다음 양화리에서 인근의 대가 동짓골로
거주지를 옮긴 후 동곡서당을 열었다.
이어 손수 책을 지으시고, 쓰시고, 만드셔서 무료로 가르치셨는
데 그 열의가 대단하셨다고 한다. 할아버님의 제자들은 계절마다
동곡서당에 모여서 백일장도 개최하고 시문을 지어 실력을 뽐내시
기도 하시며 각박한 세상에서 문화를 창달, 울분을 삼키기도 하셨
다. “백일장이 개최 될 때는 흰옷 입으신 제자들로 동곡서당 주
변과 앞산이 하얗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밖으로는 교육을 목표로 하고, 안으로는 국내 애국지사와의 교
류, 소통 등 다양한 활동을 하셨는데 난곡 이건방님, 변영님, 이
현규님, 이건승님, 등 애국지사들과 서신을 왕래하셨고 자금을
모아 나라를 위한 큰일에 쓰시기 위해서 유계를 조직, 일명 락신
계로 전국각지에서 수백명이 동참하셨다. 그러다 해방이되
자 1946년 3월17일 자금을 음성적으로 추진하려던 것을 접으시고
전 제자들이 모여서 할아버님의 학문을 기리고자 서당신축과 유집
발간에 사용하였다. 그 증거자료로는 락신계의 정명안과 각출을
보면 알 수 있으며 그 당시 상황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부의
록, 애감록, 할아버님의 유집, 인근주민들의 증언(타지에 계신
분들도많음) 등도 증거자료들이다.
할아버지의 제자로는 락신계 명단에 기록 된 분들만 300여명 된
다고 한다. 할아버님의 제자 중에 내가 만나 뵌 경남 고성 출신
의 제자들도 계신데 경남 고성 대가면 척곡 출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지신 故 제정구 국회의원(나에게는 아저씨 되신다.)의 친
자형이신 정일수님과 현재 고성 신문을 통하여 잘 알려지신 제
재형(나에게는 아저씨 되신다.)님이시다. 정일수님은 서울대학
교를 졸업하시고 한국일보 전 편집국장을 역임하시기도 하셨는데
얼마 전 어머니를 뵈러 시골집에 다녀가시면서 강학 당시를 회
고 하셨다. 또 고성 신문을 통하여 잘 알려지신 제재형님께서는
동곡서당으로 한학 공부를 하러 다니시던 시절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셨다. “동곡서당은 골이 깊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서당을 출입을 위해 산길을 오가다 보면 가끔 산에서 짐승들이 기
척을 내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만일 그 상황이 되면 발로
땅을 꽝꽝 순차적으로 한 두 세 번 울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담
대하게 지나가면 된다.”고 하셨다. 당시 상황을 말씀하시는 재
형아저씨의 얼굴에, 동곡서당에 학문하시기 위해 산길을 오가시
던 모습이 겹쳐졌다. 당시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젊
은 시절 할아버님과 재형아저씨의 강학 장면도 떠올랐다. 그리
고 그 시절의 할아버님과 조우하는 것 같아 마음이 한켠이 묵직해
지며 할아버님 생각에 젖었었다.
할아버님께서는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 등을 거치며 어려웠던
시절에 사재를 털어 개인 서당을 만들고 민족지도와 농촌계
몽, 후학양성의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셨던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셨다.
나는 이 순간이 시대마다 변하는 가치관에 우리나라의 선비 정신
을 다시 한 번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 이 만남이
시발점이 되어 동곡서당의 내력들이 문화재로 선정되어 보존되
기를 희망한다.
|
첫댓글 안녕하세요 온 국민을 긴장시켰던 메르스도 이젠 물러가고 있나봅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세요
지난한 시대를 살아오시면서 학자로서 선비정신으로 후학양성과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려 애쓰시던 조부님과 증조부님의 깊은 정신에 머리가 숙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