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를 읽다
오명현
‘아직도 꽃이나 나무…에 관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라고 일갈하는 모 시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황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시대별로 시의 주제가 주어진 것도 아닐진대 어떻게 그런 사고가 가능한 것인지 필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목록이 적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혹시나 내가 읽고자 하는 ‘여자’라는 단어가 거기에 포함되었는지도 혹 모를 일이다. 포함되었다손 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시인의 의견에 동의할 수가 없음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도 있는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필자처럼 다들 여자를 좋아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남자에게 여자는 상식이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바이러스가 퍼렇게 꿈틀댄다
청둥오리 쇠물닭 낳아 기르는
그녀, 오늘도 분만중이다
억세어진 물갈퀴가 가르어도
찢어지지 않는 가슴팍
생살을 찢고 나온 물푸레가
어깨를 그러모아 그림자를 품어 안는다
백신도 막지 못하는 출산 바이러스
사철 마르지 않는 물푸레 빛 양수
물주름 겹겹이지만 결코 늙지 않는
그녀의 자궁
골짜기를 드러내지 않는 저수의 숲에서
풍덩, 홀로 깊어간다
-황경순,「아중湖 」전문,《우리詩》(2015. 09.)
호수, 특히 물의 이야기다. 여성에게만 존재하거나 나타나는 신체기관이나 생물학적 현상을 ‘아중호’에 투영한 시다. 물의 집합체 속에 여자가 있고, 여자 속에 물이 있다. 물은 여자이고, 여자는 물이다. 인류는 여체를 통하여 생육·번식한다. 다양한 동식물이 생육·번식하는데 물이 없어서는 아니 되듯이 여자 없이는 인류가 오늘에 이를 수 없었다. 그것은 여자에게 속한 큰 권력일 듯도 한데 여자는 오랫동안 그 권력을 향유하지 못했다. 아마 남자들의 강력한 물리적 힘 때문에 권력 행사가 늘 좌절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권력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괄목할 정도의 ‘양성평등’을 이룬 듯하다.(권력을 흔히 권리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관공서에 재직하는 여성 공무원 수가 남성의 수를 추월한 곳이 많다. 양성평등의 지표가 될 만하다. 그렇지만 자주 양성평등의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그것은 양성이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어쨌든,
물은 생명이다. 인류는 지구 아닌 행성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는가에 큰 호기심을 갖고 우주를 탐색 중이다. 생명체의 존재를 찾으면서는 먼저 물의 존재를 찾는다. 물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데 1차적 관문인 탓이다. 먼 우주에서는 혹시 물이 없이도 생명체의 존재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그럴 염려는 없을 듯하다. 우리의 과학이 작동하는 원리대로 뉴호라이즌스호가 명왕성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음에서다. 따라서 우리의 과학이 검증한 물이 생명의 1차적 관문이라는 사실 또한 명왕성 근처에서 배척되리란 상상은 기우일 수밖에 없다.
아중호는 왕성한 출산 활동으로 여념이 없다. 그것은 바로 역동적인 생명의 춤사위다. 바이러스는 부정적인 단어다. 살아 있는 세포에서만 기생하고 번식하는 각종 전염병의 병원체다. 시인은 왜 이렇게 부정적인 단어를 시어로 삼았을까. 아마 강인한 생명력이 돋보여서가 아닐까. 지난해 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던 사실을 기억해 보면 수긍할 만도 하다. 그 강력한 전염성에 의료 선진국임에도 바이러스로 인해 안절부절못했지 않은가. 또 일상의 도구가 된 우리의 컴퓨터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를 퇴치하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가. 시인은 퍼렇게 꿈틀대는 아중호의 물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비친 것이다. 그것도 처녀로서. 물주름은 노화현상으로 인한 주름이 아니다. 바로 쉼 없이 물결쳐서 생명을 재생산하는 ‘끊임없음’의 다른 표현이다. 더구나 자궁을 확장하여 호수로 넓혔으니 그 생명력을 말해 무얼 하겠는가.
지리에 밝지도 못하고 여행의 이력 또한 변변치 못하여 ‘아중호’라는 호수가 중국에나 있는 호수의 이름인가 했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바로는 뜻밖에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에 있는 저수지의 이름이었다. 전주에 가게 되는 날 들러볼 곳이 하나 생겼다.
물 같은 여자를 기다린다.
《우리詩》에 최근 게재된 몇 편의 시를 읽는다. 남자가 쓰는 여자, 여자가 쓰는 여자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밝히는가를 읽고자 한다. 읽기만 한다는 것은 문자로 남지 않는다는 것인데, 괜히 문자로 남겨서 옥으로 된 시에 티를 남기는 건 아닌지 염려된다. 읽어서 좋으면 그만인 시에 괜한 토를 달아서 결례를 범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서기는 한다.
볼이 빨간 중학교 동창 경애가
진열대 위에 앉아 있다
고등학교 대신
구로공단 한 평 방으로 들어간 친구
편지만 주고받다 찾아간 곳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온
공존하는 시간이 부재된 가난의 벗은 모습에
담아간 말이 고개만 내밀다 나온 버스정류장
자기는 돈을 번다며
교복 입은 내게
도리질하는 내게
건네줄 때 떨어지던 10원짜리 동전들
구르는 동그라미를 따라가는 발자국을 닫으며
오라잇을 외치던 소리,
소리
가릴 게 없어 뼛속까지 보이던 시절은 가고 없지만
볼에서 빨간 향기를 뿜던
사과는 있다
-성숙옥, 「사과」전문, 《우리詩》(2015. 10.)
시의 등장인물은 시인의 중학교 동창 ‘경애’다. 시의 맥락을 따라가자면, 경애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 대신 취업을 선택한다. 경애는 볼이 유난히도 빨갰던 모양이다. 시인은 빨간 사과만 보면 경애를 떠올린다. 그만큼 둘 사이의 관계가 절친했었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기에는 많은 우리의 누이 언니들은 학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가정 형편에 먹는 입 하나라도 줄여야 했다. 그것뿐인가. 저임금 등 열악한 근로조건 속에서도 배를 곯으면서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소득을 가난한 집안의 영농비로, 오빠 동생의 학비로 고향에 송금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에게 불리한 차별이 보편화되어 있던 시대에 자의반 타의반 산업화의 역군이 된 셈이다.
경애는 구로공단의 공장에 취업해 소위 ‘공순이’가 됐나 보다. 후에 전직을 하여 버스 승무원(당시는 ‘차장’ 혹은 ‘안내양’이라 했다)이 됐을 수도 있겠으나 그 과정은 중요치 않다. 공단 근처 쪽방촌의 한 평 방에서 기거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진학을 포기한 경애가 진학한 시인에게 차비에 보태라며 돈을 건넨다. 수없는 ‘오라잇!’의 외침으로 번 돈이다. 짐짝 같은 만원인 버스에서 아침저녁으로 뭇 승객들을 있는 깡다구 없는 깡다구를 죄다 끌어다가 밀어 넣으면서 번 돈이다. 혹 ‘삥땅’이라 부르는 요금 횡령이 의심된다면 사측의 몸수색이라는 수모를 당하면서 번 돈일 수도 있다. 그런데 친구는 용돈이 궁할 학생인데 반해 자신은 돈을 번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차용한다. 경애의 빨간 향기가 오래도록 시인의 가슴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맞다. “가릴 게 없어 뼛속까지 보이던 시절”이다. 치장할 게 별로 없었던 시절이다. 요새야 허세가 넘치고 물질이 넘쳐서 위장할 장치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경애와 시인의 관계는 요새라고 해서 달라질 듯하지는 않아 보인다. 최근에 쓴 시에서도 경애의 빨간 향기를 짙게 느끼고 있지 않은가.
병조 아내는 짜잔하게 생겼다
그녀가 시집올 때 모두 탐탁지 않게 여겼다
날파리 같은 그녀의 모습 어디에 돈복이 들었는지
집은 불같이 일어난다
장마와 함께 느닷없이 강변으로 밀려온 모래를
웬 떡이냐 트럭으로 실어 날아 돈 세기 바쁘고
마을 논밭을 부지런히 사들이더니
이양기 콤바인 각종 장비를 구입
마을 일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느라
눈코 뜰 새 없다
아들딸 쑥쑥 낳아 시부모 사랑 먹고
살강살강 봄바람에 뽕작을 틀어놓고
도라지밭 매면서 심심하지 않다 대꾸도 잘한다
돈이란 절대로 인물보고 오는 것이 아니지
-박동남,「짜잔한 그녀 」전문,《우리詩》(2015. 10.)
네이버 사전에서 ‘짜잔하다’의 뜻풀이를 찾아본다. ‘[형용사] [방언] ‘못나다’의 방언(전남).’이라고 되어 있다. 연이어 ‘못나다’의 뜻풀이를 찾아본다. ‘[형용사]1.얼굴이 잘나거나 예쁘지 않다. 2.능력이 모자라거나 어리석다.’고 되어 있다.
시의 등장인물은 병조의 아내이다. 병조는 시인의 친구일 수도 있고, 고향 마을의 동생뻘이나 형뻘 혹은 아저씨뻘 누구도 될 수 있겠다. 무엇이 짜잔한가. 뜻풀이 중 첫 번째의 뜻이 정답이다. 시의 중후반부에서 그녀는 출중한 능력을 선보이고 있으므로 ‘능력이 모자라’다는 두 번째 뜻이 그녀를 형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인 역시 마지막 행에서 ‘돈이란 절대로 인물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면서 그녀가 예쁘지 않음을 노골화하고 있다.
시인은 왜 예쁘지 않은 그녀를 내세워 시를 전개한 것일까. 예쁘지 않음을 수단으로 하여 어떤 결론에 이를 것인데, 그 결론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예쁘지 않음은 현실적인 성과를 얻는데 있어 하등 중요한 항목이 아니다, 라는 결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많은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으려 하고, 많은 여자들은 호남형의 남자를 남편으로 맞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쁘지 않은 여자, 호남형이 아닌 남자는 시집장가를 못 갈 법도 하다. 그러나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는 그게 아니어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다. 제 눈에 안경이라거나 끼리끼리 논다는 법칙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한 축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어서다. 병조네라는 가정을 이뤘고, 짜잔한 그녀가 시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세상의 법칙들이 유효한 탓이리라.
「짜잔한 그녀 」는 유쾌하다. 4연 14행으로 이루어진 길지 않은 시인 탓이기도 하겠지만, 한달음에 읽혀지는 시다. 짜잔한 그녀이긴 하지만 그녀가 이루어낸 성과가 사뿐한 때문이다. 시의 호흡만큼이나 그녀는 유쾌한 것이다. 유쾌한 그녀가 시인의 어깨를 끌었을 것이고, 발길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돈이 첫째인 시대에 동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녀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을 것이다. 소문은 발 없이도 천리만리를 간다. 소문이 돌기 전이라도 시인의 눈에는 그녀가 예사롭지 않게 비쳤을 수도 있다. 웬걸 시인이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도 몇 배 혹은 몇 십 배의 성과와 속도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2연은 온통 그녀의 활동상을 기록한 것이지만, 그것은 사내대장부의 기록이다. 예쁘지 않음에 대한 반전의 기록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발아하거나 개입할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은 기록이다. 병조라는 남성이 시의 첫 행에서 한 번 등장했을 뿐 시가 끝나는 순간까지 소외되어 있다. 병조가 스스로 숨고 침묵하는 것이 짜잔한 그녀를 더욱 살리는 길이다.
3연은 짜잔한 그녀가 출가한 지어미로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하는 모습이다. 일을 하면서도 뽕짝을 틀어 놓고 분위기를 띄운다. 누구에게나 말을 잘 걸고 대꾸마저 잘 한다. 한 가정만 일으켜 세운 게 아니다. 쇠락해 가는 농촌 공동체를 일으켜 세웠을 수도 있겠다. 혹시 이장이라는 직함은 안 맡으셨는지. 그만하면 소통의 달인일 듯싶기도 하다. 돌고 도는 돈도 소통의 달인 반열에 들 텐데, 돈이 그녀를 외면할 리 없다. 그렇다고 부의 편중이라는 난제가 그녀의 마을에까지 현실화될 리는 만무하겠다. 모래가 쌓였으면 얼마나 쌓였겠는가. 논밭을 사재기하듯 마구 사들인 것도 아닌 듯하다. 그녀의 몸은 아작나지 않은 채 시로 거듭나고 있으니 말이다.
아내는 나의 옷이었다
스물 멏 해 걸쳐 지은
무봉천의無縫天衣
나는 평생 아내를 입고 살았다
이제는,
솔기 터지고 지퍼도 고장난 옷
낡고 해지고 헐렁해진 옷
내가 업고
가야 할 단벌 업고業苦
-홍해리, 「옷-치행致梅行·97」전문, 《우리詩》(2015. 03.)
《성경》의 저자는 “그들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창세기」제4장 중에서)고 기술한다. 저자의 신화적 관점에서 옷의 기원을 밝힌 셈이다. 날씨가 더운 지방이나 시위, 모델 및 행위예술 등 특정한 목적을 갖고서 옷을 입지 않거나 벗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은 누구나 옷을 입는 게 마땅하다. 우리 인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옷이다. 인간의 기본생활에 필수적인 3요소를 일컫는 단어가 ‘의식주’인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시인의 아내는 지금 치매를 앓고 있다. 당사자뿐 아니라 그녀를 병구완하는 남편이나 자녀들 모두는 병마와 싸울 수도 없다. 그저 앓는 자신을 견디거나 환자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시인은 치매癡呆를 致梅로 치환함으로써 슬픔을 덜거나 혹은 위안을 삼고자 했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천생 시인으로서 기교의 한 단면이 가미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시인 스스로가 욕교반졸欲巧反拙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으므로 필자는 그리 믿을 수밖에 없겠다.
아무튼 시인은 아내를 일러 한 벌 옷으로 시화하고 있다. 옷이란 무엇인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아닌가. 사람으로서 체면을 지키고, 추위로부터 체온을 지켜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체온을 잃으면 말할 것도 없지만 체면을 잃으면 의학적으로야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사회에서는 곧잘 사망선고를 내리곤 하지 않던가. 한마디로 옷은 생명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가 있음으로써 남편 즉 내가 있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단벌이어서 더욱 소중한 옷이므로 어떤 고난에도 나를 있게 해준 그 옷을 업수이여기지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옷이란 입다 보면 솔기가 터지고, 지퍼가 고장 나고, 낡아서 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그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서 즐겨 입는다. 시인은 옷을 버릴 수 없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단벌일뿐더러 그것은 무봉천의인 탓이다. ‘바느질 자국이 없는 하늘나라의 옷’인 만큼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옷일 터이고, 업고로 여기고 있는 탓이기도 하다.
여자의 이야기는 곧 남자의 이야기라고 했다. 치매 이전의 시인의 아내 역시 시인을 옷이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한쪽은 옷을 걸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알몸인 채로 있다면 그것은 부조화의 극단일 수밖에 없다. 시인께서는 그런 극단을 사실 분이 아님을 필자는 안다. 해진 옷이라서 더욱 소중할 수 있다. 시인은 해진 옷에게 바치는 헌시랄 수도 있는 시 150편을 탑재한 시집『치매행』(황금마루)을 세상에 내놓았다.
시인이여 세상 끝 날까지 해진 옷을 잘 간수하시라.
지옥을 건너 밤을 건너
늙은 바닷가에 다시 왔다
무진장 멍든 꽃이
뼈를 깎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계절을 멈출 줄 모르고
가는 숨결에도 멍들이 밤마다 통증을 되새겼다
폭염보다 더 날카로운 입술로 생의 진액을 흡수한
뼛속까지 탈진시킨 입들은 오늘도 거짓으로
하얗게 칠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칠해도 겉만 칠할 뿐인 것을
속으로는 다 알면서!
-권순자, 「김달선」부분, 《우리詩》(2015. 08.)
전쟁은 광기다. 시초는 불안한 이성에서 출발한 것이겠지만, 단기간에 냉철한 이성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광기는 필연이다. 피를 부르고 죽음이 다반사가 된 이상은 광기 아닌 상황이 더 이상할 터다. 광기란 눈이 뒤집혀서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일 것이니 도덕 윤리가 제대로 작동될 리 없다. 오직 충동적 욕구만 난무할 것이다. 평온한 사회에서 살인을 하면 살인죄로 법의 심판을 받는다. 전쟁의 목적은 적을 죽임으로써 국토의 확장 등 목적을 달성하게 되므로 살인이 일반화된다. 군인과 군인 사이에만 있어야 할 살상이 민간에로까지 확장되어 합법의 탈을 쓰게 된다. 우연이든 과실이든 의도된 것이든 모든 범죄는 전승이라는 한 가지 목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벌을 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권순자의「김달선」은 태평양전쟁 중에 발생한 소위 ‘위안부’ 피해자의 실명을 제목으로 한 시다. 사실 범죄는 인류사회가 존재하는 한은 함께할 수밖에 없다. 전쟁은 발생부터가 집단적이지만 전쟁 중에 일어나는 각종 범죄 또한 집단적이다. 그만큼 힘은 한쪽으로 쏠려있고, 그 힘을 견제하려는 세력은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다. 드러난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우리의 언니 누이들은 일본군의 성적 노예로 강제 동원되었다. 꽃다운 나이에 한반도밖에 몰랐을 누이들은 머나먼 이국의 전장에 수치스럽게 끌려간 것이다. 시인 권순자는 여자인 때문으로 성노예를 시로 올리기에 거북했을 수도 있었겠는데, 실명의 「김달선」을 놓고 스스로 붉은 꽃잎이 되어 떨어지고 있다. 김달선을 인간꽃이라 했다. 꽃이 아닌 인간이 어디 있으랴. 쉽게 상처 받는 여리디여린 꽃. 그 꽃이 맞는 먼 이국 전장의 열풍은 얼마나 뜨거웠겠으며 꽃잎을 뜯는 짐승 같은 입술들은 지옥의 사자 같지 않았겠는가.
당시의 입술들의 후예들은 그들의 죄상을 하얗게 지우려 발광하고 있다. 패전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그들은 당당하다. 돈벌이 때문에 스스로 택한 일이라고 폄훼하면서 강제로 동원한 사실 즉, 가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발뺌을 하고 있다. 위안부에 대한 국가 배상은 끝났다고도 하는 것을 보면 자가당착의 극치를 보는 듯도 하다. 역사를 날조·조작함으로써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논리와 궤를 같이하는 그들의 주장은 우리를 분노케 한다. 위안부 김달선이 저승에서마저 안식을 취할 수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어지는 다른 편의 시에서 “교활한 입들이 상처를 외면하고/역사를 지우개로 지우고 있다”(「환생」)고 표현함으로써 사죄를 할 줄 모르는 일본 위정자들을 강한 어조로 꾸짖고 있다. 위안부를 주제 및 제재로 한 연작시를 씀으로써 태평양전쟁 시기에 인권이 유린된 우리 여성들의 혼을 위로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는 일본의 현 위정자들의 그릇된 사고를 교정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고 합당한 사후 처리까지를 희망한다. 어쩌면 그것은 힘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피해자인 우리나라의 힘의 부재를 체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김달선 님! 그래도 영면하시고, 그러니 영면하시라.
서하가 오는 날은
나는 무지개빛 옷을 입고
기다리는 날
귀도 맑게 열리고
눈도 밝아져
모든 것이 밝고 곱게 보인다
서하가 와 노는 날은
우리 집 시계는 모두 멈춰서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출발소리에 맞추어 나는 직각 보행으로 소풍을 가거나
의사도 되고 환자도 되다가
소꿉친구가 되어 플라스틱 계란도 먹는다
서하가 와 자는 날은
쌔근쌔근 자는 모습이 자꾸 보고 싶어
자다가 깨다가
혼자서 까궁
볼 한 번 만져 보고 까꿍
깰까 봐 속으로 까꿍
서하가 오지 않는 날은
나는 외로운 별
어두운 하늘에 혼자 앉아
끔뻑끔뻑 신호를 보낸다
빨리 태양이 떠오르도록
빨리 날짜가 바뀌도록
-2001. 4.30.
-이무원, 「소꿉친구-서하일기54」전문, 《우리詩》(2015. 07.)
이무원 시인은 2015년 4월 17일에 이 세상을 뜨셨다.
인용한 시는 그의 추모특집을 다룬 《우리詩》에서 발췌한 것이다. 특집 중에 실린 다른 글에서 서하의 성이 이씨인 것으로 보아 서하는 시인의 친손녀인 것으로 추정된다. “앉아서 쪼로록 하(「감사-서하일기43」)”는 서하는 물론 여자다. 영유아기 때부터 남녀로 구분된 성적 특질이 발현된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늘 신비롭다. 과학적 영역에서 원인이 규명된 것이라도 그렇다. 진화론에 근거하든 창조론에 근거하든 그것들 모두는 그것들 나름대로 신비롭다. 아무튼 서하는 여자인데 여아가 남아에 비해 시상을 더 많이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통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필자의 직감이다. 직감임에도 통계에 의해 검증된 것인 양 머리에 각인이 되어 있다.
서하가 시인에게 오고가고 하는 것은 아들네하고는 분가하여 따로 살림을 꾸리고 있다는 정보다. 오고가는 서하는 시인의 세계를 평정한다. 서하로 인하여 시인의 오감은 모두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리되고 정돈된다.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일을 시작하고 마치는 상식이 파괴된다. 직각 보행으로 소풍을 가다가 느닷없이 병원에도 가야 한다. 수시로 눈을 감아야 하고, 맛있게 먹고 마시는 연기를 서하의 눈높이에 맞춰 잘 치러야 한다. 서하는 잠자는 놀이를 하다가 할아버지의 가슴팍에서 잠이 들기도 한다. 잠들어 있는 서하와 함께 까꿍 놀이를 하고 싶을 정도로 할아버지 시인은 서하에게 푹 빠져 있는 것이다. 사실 서하를 보듬고 어르고 함께 소꿉놀이를 하는 것 등은 다 힘든 노동일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힘이 들어도 늘 서하와 함께하고 싶다. 그래서 서하가 오지 않는 날은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편안한 날이 아니라 오히려 외로운 별이 되는 할아버지 시인이다. 시인은 서하에 대한 그러한 열정을 시로 풀어 『서하일기』(다층)를 간행했다고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필자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필자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과실은 달랑 딸 하나인 탓에 외할아버지라는 자격을 ‘연호’라는 아이에게서부터 획득하였다. 남들이 손주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스마트폰에 담아서 이 자랑 저 자랑 늘어놓을 때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저렇게까지 자랑하고 싶을까 의아했다. 내 눈에 들 정도로 예쁜 것도 아닌데 예쁘다는 데에 동의하라는 듯 화면을 눈앞으로 들이미는 것이다. 그때 필자는 다짐을 했다, 나는 절대 손주 자랑을 하지 말자고. 그런데 웬걸 연호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이무원 시인께서 서하에게 빠지듯이 연호에게 푹 빠졌다. 내게 연호가 없었던들 이무원 시인의 「서하일기」 연작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필자는 다짐한 바가 있어서 내놓고 자랑을 할 수는 없으되 연호를 향한 열정 때문에 생업이며 詩業이 많은 지장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 집에서 아예 ‘연호’를 맡아 키우고 있으니 이무원 시인과 견주어서는 호사라면 큰 호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무원 시인처럼 시집으로 묶을 만큼의 시편을 쓰지는 못했으나 내가 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손가락 하나면 만사형통이다/어디 손가락뿐이랴/고개를 젓고 끄덕이는 것만으로도/가공할 힘이 뿜어져 나온다/휘하에는 표정변화만으로도/그의 뜻을 헤아리는 충신들이 가득한 탓이다/가끔 열이라도 받아 체온이 가파르게 오르면/충신들 모두는 안절부절못한 채/뜬눈으로 밤샘을 하기도 한다”(「권력론」부분)
시에 나오는 충신이란 권력을 가진 자의 언사, 표정, 행동 및 율동으로 인하여 스스로 그것이 된 자들이다. 충신을 자처하고 있는 만큼 지극정성을 다하여 보필해야 함은 물론이다.‘연호’ 역시 여자다. 여자인 때문에 더 많은 시상을 제공하고, 스스로 충신이 되는 깊이가 더욱 깊은 것인지는 앞으로 손자를 보게 되면 밝혀질 일이다. 앞서 말한 직감의 진위가 판명될 것이다.
서하의 나이를 알 수 없다. 아마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 아닐까. 서하에게 충직한 충신임을 자처했을 시인 할아버지를 그리면서 늘 아름다운 여정 속에 살기를.
(우리시 2016년 1월호)
|
첫댓글 와! 시를 받혀주는 시평에 감탄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수유 시인님은 시작에 시평도 더불어 활동하셔야겠습니다.
와! 설날 아침에 호월 시인님께로부터 세뱃돈을 듬뿍 받아 기분이 좋습니다. 미국에서는 내일이 설인가요? 설 잘 쇠시고요, 감사합니다.
머잖아 모계중심사회로 옮아갈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때는 남성들이 여남평등을 주창하게 될지 모릅니다.
모계중심사회가 제 집에서부터 음트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시상을 유추적이나 연상적으로 이미지를 구상한다고 배웠습니다,
유추적은 동질성,유사성, 연상적은 근접성,친근성으로 시 정신을 갖고 시적 장치를 활용해서 지어야
흥미 있고 감동적인 시가 탄생한다고 교수님 강의에서 배웠는데,
타인은 알아볼 수도 없는 내용에 낮선 낱말을 사용해서 시작을 하면
혼자서 쓰고 혼자서 읽어야 하는, 아니면 이렇게 긴 해설을 달아야만
이해가 가는 시가 되고 말 것입니다.
누구든 두 번은 읽지 않을 시가 정상적인 시라고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 명절 활기차고 행복한 시간 이어 가시길 바랍니다.
위의 글은 시를 해설한 것이라기보다는 제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글로 표현한 감상문입니다. 제가 쓴 글이 아니라도 위의 시들이 난해하다거나 그로 인해 오독 혹은 해독 불가의 문제가 발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유님의 여자 읽기는 새해 희소식입니다.
연호에 대한 시를 읽으며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깊이가 있고 아름다운 감상문
을 낳게 한 사모님과 딸 그리고 손녀는 참~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집 근처로 이사 오셨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호수공원에서 3층 집은 찾으셨는지요. 호숫가 바람을 맞아 본 지도 꽤~ 오래 됐습니다.^^
@水遊/오명현 바로 찾아보았지요. 요즘 산책하는 재미에 푹 빠졌습니다 .
일산에 사는 시우들 만나 호수공원에는 화요일 덕성시원 끝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고요.
수유님는 생태(현재 재직자)라 바쁘실 것 같아 연락도 못 한답니다.
@이정희 제가 생태로군요ㅎ
저는 명탭니다. 유유자적하고 싶은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틈틈이 이 시인님도 뵙고~~~.^^
제가 아는 수유님 맞나요?
언제 이렇게 고지에 오르셨나요?
여자에 대한 시평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읽었습니다!!!
정말요? 나 시인님도 '여자'잖아요. 그 '여자'분들이 이번 설에도 많은 즐거운 가사노동에 시달렸겠지요. 감사합니다.
수유님 답네요~ 읽는 폭이 깊고 넓고 다양해서 부럽습니다.
왠지 잘 어울리고, 함께 공부하는 분이라는 생각에 자랑스럽습니다.
틈틈이 시와 감상 더 느끼려 옮겨 갑니다.
답다고요?
그런 척이라도 하면서 살아야지요.
그렇잖으면 넘 밋밋해서유.ㅠㅠ
감사합니다.
오시인님 산문은 처음 보는데.... 여러말 필요없이 엄지 척! 입니다....!!
수림 님 감사해요. 늘 주시는 칭찬이 제겐 긍정적인 처방이라는 걸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