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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한 삶을 위하여 / 민 5:1-31
군대를 갔다오신 분들은 훈련이나 어떤 작전을 나가기 전에 반드시 했던 '군장검열'이라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군인이 훈련을 나갈 때는 '몇 월 몇 시에 훈련 떠난다'는 말 한마디만 해놓고 정해진 날이 되면 곧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나기 전의 준비가 매우 엄격합니다. 훈련을 위한 지침이 위로부터 하달됩니다.
즉 그 부대의 총책임자로부터 훈련을 위한 모든 준비단계가 하나하나 지시되고 그 지시사항에 따라서 제대로 준비되어있는지를 살피는 것을 '군장검열'이라고 합니다. 군장검열의 목적은 효과 있는 훈련을 위해서입니다.
훈련에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없애야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부대의 총책임자인 대장이 지시한대로 따라야 하며 훈련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가지고 가서는 안 되고, 훈련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군장검열을 할 때는 암기해야 할 것을 묻기도 하고, 훈련에 방해되는 것 예를 들어서 술을 몰래 가지고 가는지, 또는 소형라디오를 가지고 가는지, 만약 대간첩 작전이라면 담배 라이터, 이런 것들을 검열하게 됩니다.
훈련이나 작전에 방해가 되고 해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훈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군인다운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군인다운 군인이 되어야 실제 전쟁에서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에 연단과 군인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군대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수기를 시작하면서 전쟁, 즉 싸운다는 것에 대해서 맨 처음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싸움꾼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위한 준비가 10:10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진을 칠 때는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게 하시고 3,4장에서는 이스라엘 지파가운데서 레위지파를 부르셔서 그들이 성막에서 해야 하는 일을 분담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부터 보면 우리의 대장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싸움을 위한 출발에 앞서서 군대로 출발하는 이스라엘이 어떤 자세로서 싸움에 임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서 말한 대로 '군장검열'이라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군대는 그 부대의 최고 지휘관이 요구하는 정신이 있고 자세가 있습니다.
밑의 지휘관은 오직 최고 지휘관의 요구에 따라서 부하들을 가르치고 다스려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요구사항이 모세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최고 지휘관의 요구사항을 무시해 버리고 밑의 지휘관이 자기 멋대로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고 가르쳐 버린다거나 모든 군인들이 각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분명히 온전한 군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군대의 최고의 지휘관은 하나님입니다. 최고의 지휘관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뭔가를 지시하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군대의 모습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완공하고 인구조사까지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광야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성결한 삶을 유지화기 위하여 죄악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시 강조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광야 여행과 가나안 정복 과정에서 있게 될 타락한 이방세력과의 만남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속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정에 방지하려는 것입니다.
비록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광야 생활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시대의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다니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할 때에 훌륭한 성품, 행동을 먼저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근거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거룩해야 만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자녀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영적으로 성숙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하려는 관계 때문입니다.
모든 면에서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절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룩해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죄와 격리입니다.
나병 환자, 유출증 환자, 주검 등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진 밖으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진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리를 통해서 위생적, 도덕적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분리를 통해서 부정한 자로 하여금 격리 기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 분리를 통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병든 자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우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죄와 악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들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때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또한 부정한 자들의 격리 조치는 이스라엘 전체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순결을 오염시키는 부정한 요인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이 죄악이 전체 백성들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나병, 유출병, 주검을 만진 자, 다 죄를 상징하는 병입니다.
죄악은 우리 속에 들어와 자라고,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에 발견되는 즉시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성결한 사람이라도 부정한 것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을 보장이 없습니다.
경건한 욥은 자녀들의 생일잔치를 끝내고 나면 혹 마음에라도 범죄하였을까 생각하고 자녀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려 성결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입니다. 또한 죄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고, 완악함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더러운 찌끼를 온전히 제하여 청결하게 하시며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죄와 함께 거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정한 것, 다 제하여 버릴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이 의식법은 사라졌지만 그 교훈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인들에게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고 말씀하십니다.
고전 5:1절 이하에 보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음행하는 교인이 있는데 왜 저들을 징계하지 않느냐고 책망합니다.
왜 징계를 못합니까? 범죄한 사람을 징계할 만큼 성결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순결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하고, 때로는 징계도 있어야 합니다.
징계가 육신은 멸해도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받게 하는 것이기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징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난 죄와 숨은 죄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징계는 하나님께 맡겨야 되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회개해야 합니다. 죄악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 지은 것에 대하여 통분해야 합니다. 마치 내가 징계를 받은 것처럼 근신해야 합니다.
2. 죄에 대한 보상
6-7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1) 모든 죄는 하나님께 범하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10절의 내용은 분명히 사람들이 지은 죄입니다. 이웃 간에 재산상의 피해를 준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여호와께 거역한 죄라고 말씀합니다.
거역이란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를 짓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웃에 대한 죄가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인간에게 행한 어떤 죄악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레위 6:4절 이하에 보면 이웃에게 잘못한 모든 것은 1/5을 더하여 돌려보내야 하고,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려서 그 죄를 속해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고 회개할 때에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합니다.
요셉은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에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감정에 의해서 서로 잘못할 수도 있고, 죄 지을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2)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7절에 보니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말만이 아니고,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요일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자신의 허물을 상대방에게 자복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힘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사람을 찾아가서 나의 잘못을 고백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가서 자복해야 합니다. ‘형제여, 내가 잘못하였습니다. 용서하세요.’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이것을 못하게 방해할 때가 많으나 하나님과 영적 교재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면 됐지 사람에게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고 미루고 하지 못하면, 마음이 완악해지고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마침내 죄를 합리화시키게 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은 없다.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없다.’
여러분, 자존심을 버리고, 부끄러움도 불이익도 상관하지 말고, ‘모든 것이 내 잘못입니다’하고 한번 말해보세요. 납덩이처럼 무겁던 마음이 그때야 비로소 훨훨 날듯이 가쁜 해질 것입니다.
성도는 화해하지 않고 살면 마음이 무겁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납덩이를 달고 사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습니다. 모든 책임을 나 자신에게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철저히 배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값을 갚되 온전히 갚으라고 하십니다. 20%를 더하여 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는 입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 상의 세리장 삭개오는 ‘내 소유의 절반은 가난한 자에게 돌려주며, 만일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네 배가 갚겠습니다’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호주머니가 회개화지 않은 사람은 진짜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약에 죄 값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 값을 여호와께 돌려 제사장에게로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경우라도 배상은 면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핍박하고 투옥하고 죽이기도 하였으니 이제 그 죄 값을 온전히 배상해야 하는데 직접 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도를 자신이 대신 해야 하기 때문에 바울은 미친듯이 복음을 증언하다가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세상의 법은 감옥에 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보상하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혹시 나의 잘못으로 지금 우리 이웃이 괴로워하고 있으면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자복과 철저한 배상을 통해서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이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3. 죄악의 근절
본문 11절에서 31절의 말씀은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 안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규례로써 의심의 법과 질투의 법에 관한 것입니다. 간음은 배가 지나간 자취와 같다는 말씀처럼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의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의심이 생기면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 갑니다. 제사장은 의심받는 여인에게 쓴물로 인한 저주의 적용을 주지시키고 맹세시킵니다. 그 후에 쓴물을 마시게 하여 순결여부가 드러나게 합니다.
유대학자들에 의하면 이 경우 만일 그 여인에게 죄가 있으면 그 쓴 물의 효과는 당장 독으로 나타나 심한 경련과 함께 죽게 된다고 합니다. 남자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여인이 죄가 없으면 그 쓴물은 오히려 약이 되어 그녀의 생식기능을 더욱 강화시켜 주어서 자녀를 잉태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 법은 의심으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즘 시대가 부부도 믿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미국에 이민간 부부가 남편이 부인이 한국에 가 있는 동안에 사람을 사서 한국으로 보내어 부인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참 무서운 시대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가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가정질서를 파괴하는 두 가지의 폐단이 하나는 간음이요, 다른 하나는 불신의 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임마누엘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가정의 순결을 위해서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죄악의 근절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남편이나 아내에게 의심할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은밀한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 밝히 노출됩니다.
여러분, 남을 의심하지 맙시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사탄이 역사하여 죄짓게 합니다.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맡깁시다.
동시에 내가 남에게 의심의 소지를 주지 맙시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립시다. 죄를 철저히 근절하여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합시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내죄, 내죄, 내죄 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수도원에 있으면서 무슨 죄를 그러게 짓겠습니까? 남자만 있는 격리된 장소에서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았겠습니까?
전부 마음속으로 지은 것입니다. 의심하는 죄, 절망하는 죄, 시기, 질투하는 죄, 세상을 향하는 죄,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가 견딜 수가 없어서 그때마다 신부에게 달려가 고해성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아침에 가고, 점심에 가고, 저녁에 가고, 어떤 날은 20번씩 찾아가니 신부가 ‘루터야 죄를 좀 모았다가 오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 진실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한 고민, 이 고민의 몸부림이 세계를 변화시킨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민이 없기 때문에 내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가책, 죄에 대한 고민이 점점 둔화되어 죄에 대한 감각이 둔화되고, 마침내 죄의식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민수기를 살펴보면서 정말로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닙니다. 사회의 죄가 아닙니다. 세상의 죄가 아닙니다. 오직 나의 죄, 내가 주께 범죄하였습니다.
언제나 남을 정죄하지 말고 나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내가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