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曺挺立(號:梧溪, 字:以正)
1583년(선조16)生~1660년(현종1)卒
*ꡐ오계 조정립ꡑ은 조성좌의 고조부임.
◦1583년(선조16) 8월: 現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에서 출생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과 ‘전의이씨(全義李氏: 설학 이대기(雪壑 李大期)의 여동생)’ 사이에 장자로 출생
-조정립이 청년기 때에는 5촌 당숙인 상주 함창의 조우인(曺友仁)에게 수업함.
-조정립의 장인(丈人)은 임란 때 의병활동을 하고 현감에 제수된 現 합천 대병의ꡐ화음 권양(花陰 權瀁, 1555~1618)ꡑ과 現 충북 보은읍의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덕민(金德民: 1570~1651,ꡐ남명 조식ꡑ의 벗인ꡐ대곡 성운ꡑ의 門人, 우찬성 윤휴의 외조부, 소현세자 장인인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손위 동서, 척화 3학사인 오달제(吳達濟)의 고모부) 등등임.
-조정립의 첫째 사위는 효령대군(태종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호조․형조판서를 지낸 ‘구촌 이명(龜村 李溟)’의 아들인 이민발(李敏發: 정3품 水使 역임)임.
◦1609년(광해1) 10월: 증광시 병과에 33인 중 19등으로 급제 (만26세)
-조정립의 12촌 兄인ꡐ명욱ꡑ은 1605년(선조38) 별시 병과에 1등으로, 친동생인 ‘정생’은 1613년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42인 중 29등으로, 6촌 동생인 ‘정융’은 1631년(인조9) 별시 병과에 15인 중 5등으로 급제함.
◦1611년(광해3) 3월: 설서 (28세)
-세자시강원의 정7품 벼슬
-이 때 합천 묘산의 강익문은 지평으로 제수됨.
◦1613년(광해5) 1월: 정언(正言) (30세)
-사간원 정6품으로, 간쟁․탄핵․봉박(封駁)의 임무를 맡는 관직
◦1613년 12월: 지평(持平)
-사헌부 정5품으로, 백관을 규찰하고 검찰권을 행사하며, 인사 및 법률개폐의 동의․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국정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책무가 막중하므로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강직한 성품의 엘리트들이 임명됨.
*1614년 9월에는 문학(文學: 세자시강원 정5품 벼슬)이라는 관직을 겸임함.
◦1615년(광해7) 2월: 헌납(獻納: 사간원 정5품) (32세)
-이 때 동생인 조정생은 검열(檢閱)에 제수됨.
◦1617년(광해9) 3월: 정5품 홍문관 교리 (34세)
-이 때 거창의ꡐ모계 문위ꡑ를 적극 변호하여 극형을 면하게 함.
-경연관인 지제교(知制敎: 왕에게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하는 관직)를 겸임함.
◦1618년 1월: 예조좌랑(정6품)
-이 때 합천 가야의 ‘내암 정인홍’은 영의정에 제수됨.
◦1618년(광해10년) 2월: 북청판관 (35세)
-좌의정 정창연․現 진주 대곡의 하성 등과 함께 인목대비 폐출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5품 외관직인 함경도 북청판관으로 좌천됨.
*북청에 귀양와 있던 ‘백사 이항복’에게 1613년 계축옥사 때 이항복을 탄핵할 것을 주장한데 대해 사과하고, 1618년 5월에 이항복이 사망하자 제문과 만사를 짓고 장례를 지내줌. 그 후 1728년 무신의거 때 ‘오계’ 후손들이 도움을 받는 계기가 됨.
◦1618년 가을~1623년(인조1) 여름: 영덕현령(종5품) (35세~40세)
-1618년 가을 現 김해 대동면 소재 신산서원에서ꡐ남명 조식(南冥 曺植)ꡑ봉안(奉安) 때, 영덕현령인 조정립은 동생인 예조좌랑 조정생(曺挺生) 및 합천군의 성현찰방 하혼․배형원(裵亨遠, 現야로 출생)․성현찰방문경호․유진정(柳震禎)․배성립(裵誠立,배형원 조카)․주부 김두남․충원현감 강익문․신순몽(申順蒙)․하경중(河景中), 삼가현의 장수현감 권양․한성좌윤 윤선․오수찰방 허홍재(許洪材, 허돈 父)․허홍기(許洪器)․진사정건(鄭謇)․생원임진부(林眞怤),초계현의 이운해(李雲海) 등과 함께 참여함.
◦1623년(인조1) 8월: 1623년 3월 13일 소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제자로서 1613년 계축옥사 때 관련되었다는 서인(西人)들의 주장에 의해 現 충북 보은에 중도부처(귀양) 당함. (41세)
-1624년 봄 경 배소지인 충북 보은의 경주金氏(1604~1647, 첨지중추부사 김덕민 딸)와 두 번째 결혼을 함.
◦1633년(인조11): 사면․복권됨. (50세)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1637년 봄에 서울에 도착함.
◦1637년(인조15) 봄~1641년(인조19) 봄: 평양서윤(종4품) (54세~58세)
◦1641년 겨울~1642년 가을: 성주목사(정3품) (58세~59세)
*성주는 ‘오계’가 평소 스승으로 존경한 ‘한강 정구’의 고향이기도 함.
◦1644년 12월: 봉서정(상기 사진) 및 도촌 별묘(別廟: 사당) 건립 (61세)
*현재 ‘도촌’과 ‘오계’를 모시는 종묘로 사용되고 있으며(음력 9월 中丁일 하루 전날 밤 11시경에 제사를 지내고 있음), 당초에는 봉산면 김봉리 석가산 건너편에 있었으나, 합천댐 수몰로 1988년 4월에 現 봉산면 압곡리 1구로 이전함. (1983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235로 지정됨) 봉서정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고서(古書)들은 1728년 무신사태 후 약탈 및 훼손됨.
-1643년 11월 11일 관찰사 이상의 사람(수신자 미상)에게 보낸 조정립의 편지가 있음. 이 편지에 의하면, 1642년 가을에 성주목사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회갑이 되는 1644년 12월에 준공한 現 합천군 봉산면 압곡리에 있는 봉서정(金鳳書舍)은 당시 개인적인 건축물이 아닌 교육기관 등 공익적인 건축물로 건립됐음을 알 수 있음. 또한 조정립의 학문수준과 필체를 알 수 있는 자료임.
(追悚金鳳書舍 寄資事旣聞命矣 工匠已賦役 供饋方急 如鹽醬麯生 最乏絶 若蒙卽今帖下 爲惠尤大矣 樂年事亦卽取伕伏望 上問狀 癸未十一月十一日 民曹挺立頓首
금봉서사를 생각하건대 자금을 맡기는 일에 대하여 분부가 내려진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공인과 장인들이 이미 부역을 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주는 일이 한창 급합니다. 소금과 간장, 술이 가장 모자라니 만약 지금 첩자(帖子)를 내려주신다면 은혜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해를 즐기는 일은 또한 인부를 취해서 하기를 삼가 바랍니다. 문안하는 글을 올림. 계미(1643년, 인조21) 11월 11일에 백성 조정립이 머리를 숙임)
-1644년(인조22) 2월에는 동생인 조정생이 창원부사(종3품)에 임명되었으나, 오래 재직하지 못하고 1645년 1월에 별세함.
◦1646년(인조24) 7월: 1649년까지 약4년 동안 정주목사 (63세~66세)
◦1648년(인조26) 7월: 만65세 때 종2품인 평안도 의주부윤(府尹)에 심택(沈澤)․노협(盧脇)과 함께 천망(추천)되었으나, 심택(그 후 평안도감사 역임)이 임명됨.
◦1649년(효종 즉위년) 10월: 밀양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서인들의 반대로 파직됨. (66세)
-1623년 인조반정 후 형벌을 당하지 않고 귀양만 가고, 그 후 성주․정주목사 등을 역임한 것만으로 큰 은혜를 입었는데, 또 다시 밀양부사로 임명함은 부당하다는 서인들의 주장으로 파직됨. 이 때 고산 윤선도는 유배됨.
◦1656년(효종7): 거창군 가조면 도산서원의 설립 서원장 (73세)
-1661년 건립․1662년 사액서원이 되고, 김굉필․정여창․정온․이언적을 배향했으나 1869년(고종6) 대원군에 의해 훼철됨.
◦1657년(효종8) 3월~1659년 3월: (산청) 덕천서원장 (74세~76세)
◦1660년(현종1) 9월 : 만77세에「봉서정」에서 별세. 1628년 만45세로 별세한 ‘安東權氏(자녀는 시량(時亮)․시윤(時胤) 등 2남 3녀임)’와 상하분으로 現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좌측 능선에 묘소 있음.
-별세 후, 동래鄭氏인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영의정, 중도파, 좌의정 정창연의 손자), 정치화(鄭致和: 1609~1677, 좌의정, 配는 宜寧南氏, 중도파이며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모셨음. 10년 동안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고초를 당함), 정지화(鄭知和: 1613~1688, 좌의정, 西人이면서 중도파) 3형제가 ‘오계’를 추모하는 만사(輓詞: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글)를 지었음. 특히 정치화(鄭致和)는 ‘오계’ 생전에「봉서정」으로 찾아 오기도 했으며, 친구인 거창의 조경(趙絅, 호: 龍洲, 1586~1669, 이조판서, 南人,ꡐ고산 윤선도ꡑ를 상소로 변호하다 파직됨) 및 오준(吳竣, 호: 竹南, 1587~1666, 예조판서, 해서를 잘썼고, 삼전도비와 아산 충무공 이순신 비문 등을 썼음), 거창 가북의 군수 김천일(金千鎰, 1622~1692), 합천 대병의 참봉 송치원(宋致遠), 성주 벽진의 여효사(呂孝思), 대구의ꡐ다포 이지화(茶圃 李之華: 1588~1666, 부사․참의 역임)ꡑ, 그 외 하홍도(河弘度, 호: 謙齋, 1593~1666, 現 하동 옥종 안계리 출생, 덕천사우연원록 편찬함), 민유중(閔維重: 인현왕후의 父, 호조․병조판서, 西人)과 ‘동계 정온’의 두 손자인 정기수(鄭岐壽: 정희량의 祖父) 및 정기윤(鄭岐胤: 南人의 거두며 우의정인 ‘미수 허목’의 사위이자, 曺聖佐의 친매제였던 정관유의 祖父로 현감 역임) 등 53명의 유명 인사들이 지은 만사 및 제문이 남아 있음.
♠ 현재 조정립이 지은 글은 詩 220편, 만사 25편, 제문 8편, 축문 5편, 편지 및 墓誌 각 3편 등등 총 274편이 남아 있음.
♠ 조정립의 품계는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임.
◉1618년(광해10) 5월 ‘백사 이항복’ 사망 후 지은「만사(輓詞)」
*그 때 ‘오계 조정립’은 북청판관에 재직 중이었음.
선조 광해조에 많은 분이 재상에 앉았지만, 兩朝多少坐司台
명공만이 최고로 걸출하다 손꼽았소. 獨數明公最傑魁
국가 동량 존재하니 큰 절개를 알았고, 國棟樑存知大節
동서를 막론하고 뛰어난 인재였소. 山東西出見全才
영원한 의리 취해 잎처럼 몸 가벼웠고, 千年取重身經葉
걱정으로 병이 생겨 사괴꿈을 꾸었소. 一病綠憂夢食瑰
동남쪽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찍 알진 못했으나, 生長東南曾不識
가시는 길 애도하니 슬픔이 가득 하구려. 湘流一弔有餘哀
◉1623년 인조반정 후 귀양지인 現 충북 보은에서 고향 합천을 그리워하며 지은 「적리음 7수(謫裏吟 七首)」 중, 「1수(一首)」
쓸쓸한 나그네 시름 이 해도 다 가는구나, 牢落羈愁逼歲窮
취하면 타향도 모두가 옛 친구인 것을. 他鄕一醉故人同
형제의 모임에 아침이면 가려해도, 朝來欲赴連枝會
담비 모피로 만든 갖옷이 헤져 바람 끝이 겁나는구나.弊盡貂裘怯以風
◉1649년(효종 즉위년) 10월 낙향하여 봉산면 김봉리 소재「봉서정」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지은 「봉서정 십영(鳳棲亭 十詠)」 중, 석가산(石加山)의 절경을 노래한 「옥순고봉(玉笋孤峯)」
쪽나무 밭에 심었다던 그 옥을, 藍田種後骨
정교하게 깎아 저렇게 만들었을까. 巧斲因成形
표면에 이끼 한 점도 없이, 蒼苔不上面
천 년 세월을 굳건히 서 있구나. 千古立亭亭
◉진주 촉석루를 노래한 「제촉석루(題矗石樓)」
산야를 분할할 때 미리 정한 별 곳이기에, 畫野當年占別區
진양의 명승지로 이 높은 누각이구나. 晉陽形勝此高樓
긴 대나무 서 있는 것 소상강 언덕인가, 脩篁怳立三湘岸
저렇게 많이 흐르는 물 칠택에서 오는 것일까. 巨浸疑從七澤流
석양에서 부르는 어부의 노래 구름 밖에서 끊어지고, 薄暮漁歌煙外斷
밤 되면 장사배는 달 속에 떠 있다네. 淸宵商船月中浮
그 당시 죽지 못한 영웅에게 맺힌 한이, 可燐未死英雄恨
저 차가운 물결 되어 섬에서 목매어 우는구나. 化作寒波咽古洲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총96건이 기록됨), 국조방목, 연려실기술, 비변사등록, 영덕현지, 송계실기, 성주군지, 덕천서원지, 오계문집(1913년에 6권 3책 목활자판 발간) 등
출처: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294660&qb=5pu65oeJ5LuB&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TqBUfwpVuEhssZ%2BIhBGssssst8N-331356&sid=L7rW5ogbQQGNSeCb00Ey4w%3D%3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