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잣 대
⑴국어사전적 뜻 잣대(생활문서)
⑵문학적 의미의 신변잡기 잣대(창작⋅창작적인 것에 비하여 아닌 것을 문학작품이라고 발표하는 행위)
⑶상식선의 잣대(그렇게 볼 수 있지만 문학작품으로 살릴 수 있는 긍정적인 점은 무엇이며, 그 방법은 무엇인가?)
물 먹이기(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물먹기가 싫다. 물 한 잔 마시려면 장희빈이 사약 받았을 때처럼 오만 인상이 찌푸려진다. 마치,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는 병아리 같기도 하다. 방광염증상이 와서 병원에 가니 물을 많이 마시라고 했다. 물 먹기가 싫으면 과일을 먹던지 음료수라도 충분히 마시라 하며 주사 한방 맞으면 괜찮을 것이라 했다. 다음 날 또 병원에 갔다. 물 안 마셨냐고 묻기에 물 먹기 싫어 맥주를 마셨다고 했더니 계속 병원에 와야겠다고 하셨다.
집안에 키우는 짐승도 주인을 닮는다더니 우리 강아지가 나를 닮았는지 물을 잘 안 먹었다. 발톱으로 몸을 긁다가 등이 가려운지 발라당 뒤집어 사지를 버둥거렸다. 동물병원에 가니 강아지가 물을 먹지 않아 피부병이 생기고 소변에 단백질이 빠져나온다 했다. 하루 물을 300미리는 먹이라고 했다. 입을 벌려 먹이려니 물려고 했다. 주사기에 물을 넣어 먹였더니 주르륵 쏟아내고 당체 먹지 않았다.
강아지가 좋아하는 닭 가슴살을 물에 말아주었다. 풉풉 거리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했다. 밥도 말아주니 그릇을 말끔히 비워 놓았다. 그럼 그렇지 네가 아무리 똑똑하다한 들, 개는 개일 뿐이고 내 괘에 넘어가지 않을쏘냐.
“적어도 너는 대학교수쯤은 되었어야 할 두뇌였어.” 하던 친구의 예리한 안목을 떠올리기도 하고 내게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도록 명석한 두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도 드렸다.
방바닥에 깔아 놓은 요가 축축했다. 대체 어디서 물이 흘렀을까. 강아지가 오줌을 잘 가려 요에 싸지는 않는데. 요를 뒤집어 놓았다. 그런데 또 축축한 것이 아닌가. 문득, 강아지가 밥 먹다가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던 생각이 났다. 물에 밥을 말아주고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입에 밥을 잔뜩 물고는 볼트처럼 바람을 가르며 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더니 요 위에다 이빨사이로 물을 쭉 짜놓고는 건대기만 집어 먹는게 아닌가.
1)물을 먹지 않아서 피부병이 생긴 강아지에게 물을 먹이려고 꾀를 부려보았으나 오히려 강아지 꾀에 속아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적은 글이다. 이 글이 개인의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면 누가 신변잡기다 아니다 시비 걸 일이 있겠는가.
2)그러나 똑 같은 글을 문학작품이라고 발표하였다면 보는 사람마다 ‘그것 참!’ 혀를 찰 것이다. 왜 그런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말에 대한 대답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만큼이나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수 없이 많다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의 대답이 모두 다 그것 나름의 의미가 있는 대답인 것처럼 문학에 대한 대답도 그렇다.
이 글을 놓고 독자들이 ‘그것 참!’이라고 한숨을 쉬게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에 대한 가능한 대답은 <문학이란 창조적 의미가 창출되어 나오는 관계의 이야기>라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화자 ‘나’가 방광염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물을 많이 마셔야 된다는 데도 물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강아지가 피부병이 날 정도로 물을 마시지 않는데도 물을 마시려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의 관계는 ‘내가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집 강아지도 물을 마시지 않는다’라는 이야기일뿐이다. 즉 두 이야기는 단순 비교 대화법 이상 다른 아무 의미도 없다. 일상생활에서 이웃집 여자와 ‘우리 집 강아지처럼 나도 물마시기를 싫어한다’라고 잡담하는 이야기 이상 두 이야기 사이에서 아무 문학적 의미도 창출되어 나오는 것이 없는 것이다. <물 먹이기>라는 제목 옆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부제목을 붙여 놓았지만 머리 풀어헤친 여자가 귀에 꽃까지 꽂은 격일뿐이다. 왜냐하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표현은 그나마 현실에서는 상식선의 대화라도 되던 것이 문학작품 속에 끌어들이는 순간 즉석에서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문학적 소양이 있는 독자라면 어찌 ‘그것 참!’ 이라고 혀를 차지 않겠는가. 그냥 소재만 나열한 정도도 아니고 ‘티를 있는 대로 냈군!’이 되기 때문이다.
3)<이것>과 [저것]을 나란히 배열해 놓는다고 해서 문학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과 [저것]의 관계 속에서 상식선 이상의 문학적 의미가 창출되어 나오는 관계이어야 문학작품이 된다. 최소한 <물을 먹어야 산다고 하는 데도 물 먹기 싫어하는 것이 어디 나와 우리 집 강아지 뿐이랴. 무엇도 있고, 또 무엇도 있고---.>라는 식으로라도 생각의 광맥을 파고 들어가야 상식선 이상의 창조적 의미를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평점 : 이 글은 이상과 같은 ‘문학공부 안 한 티를 있는 대로 내고 있는’ 수필가들의 <신변잡기 쓰기>를 아주 잘 표현 해 낸 잘 쓴 신변잡기이다. ok.ok.ok.
*<물 먹이기>를 쓴 학생의 신변잡기 써 본 느낌
있었던 일을 나열하는 것은 워낙 익숙했다. 그 것이 수필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창작을 배우고부터 예술작품과 신변잡기를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신변잡기라고 써놓은 것을 평론반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또 헷갈리기 시작했다. 일반 산문수필과 신변잡기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첫댓글 머리 풀어헤친 여자가 귀에 꽃까지 꽂은 격일뿐이다 ‘티를 있는 대로 냈군!
배꼽 빠집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