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2일
동해안 드라이브 중
(포항~영덕 방향)
이가리닻 전망대
베이커리카페 ≪러블랑ㆍLoveblanc≫
그리고 곧장 닿은 곳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문산호 호국전시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동해대로 3560
054-730-7315~7
영덕 앞바다에는 군함이 한 척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당시 장사상륙작전과 문산호의 존재와 활약은 최근에서야 많이 알려졌다.
TV 다큐멘터리와 관련 영화가 상영되면서부터..
그리고 그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붉은 데크길을 통해 문산호 승선
1950년, 그 현장 속으로~
인천상륙작전보다 하루 앞선 1950년 9월 14일
대구에서 결성되고 학도병들이 주축이 된 육본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는 2,700톤 급의 LST문산호에 올랐다.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1950.9.10) 의거
그리고, 서해안 인천의 반대편인 장사에서는 북한군의 이목을 동해안 영덕 지구도 유도하기 위하여 상륙지역 판단에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양동작전이 실행되었다.
목적은 장사 해안 상륙작전 전개로부터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작전 중 상륙함 LST문산호가 태풍으로 좌초
그러나 어린 대원들은 가까스로장사 해변 상륙 성공
북한군과 6일간 치열한 전투
이후 구조함인 LST조치원호로 철수
북한군의 침공을 막고자 학생들은 구국의 의지를 불태우며 전선으로 나아갔다.
독립 제1유격대대는 학도의용군, 즉 학도병으로서 그 규모는 컸다지만!
학도병들은 대부분 16~19세의 입대 적정 연령에 미치지 못한 어린 나이로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고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싸웠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교두보에서반격하였을 당시 독립 제1유격대대가 장사동 해안에서 수행한 작전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작전기간 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인명 손실을 겪었지만, 적 270명을 사살하고 학살 직전의 애국청년 10여 명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6.25전쟁 후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한 작전을 펼쳤고,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낙동강 방어의 주요 지점이 점령 돌파된 위기를 맞아 유엔군과 미군은 과감한 투입과 역습으로 북한군을 격퇴하고,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총반격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장사상륙작전이 있었기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재평가되는 것은 물론, 전투에 참여한 772명에 대한 희생을 잊지 않도록 기념관이 조성된 것이다.
영덕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자 문산호 호국전시관
1층에서는 당시 장사 전투 배경과 독립 제1유격대대 결성 및 LST문산호 참전 과정 등을 알 수 있다.
2층에서는 작전이 전개되고 숭고한 희생을 치르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3층~5층은 휴게 및 체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산호 갑판에 오른다.
드넓은 선상에 바다풍경이 쓸쓸하다.
고요함의 풍경은 당시의 전쟁 상흔이 스며져 있을 것 같아
장사상륙작전 전적지를 품고 있는 장사해변이다.
세월의 흐름은 그렇게 이어지고~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 뒤에는 학도병으로 이루어진 어린 영웅들의 커다란 희생이 뒤따랐다.
장사상륙작전은 LST조치원호에 미처 승선하지 못하고 적지에 잔류한 39명을 비롯하여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큰 희생을 치렀으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역사의 뒤편에 묻혀 갔다.
그러나 장사상륙작전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려는 참전용사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1997년 장사 갯벌에서 발견한 LST문산호의 실체를 통하여 장사상륙작전은 더 이상 잊혀진 작전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작전으로 재조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