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숙빈최씨)는 누구인가?
필자: 임민혁(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소 연구원)
깜찍하고 총명한 동이는 장차 영조의 어머니[숙빈최씨]가 되는 인물이다.
숙빈최씨의 아명 동이는 가명임이 분명하지만, 출신이 반궁촌 천민이라 한 것을 어찌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반궁은 성균관의 별칭으로, 성균관을 반수(泮水)가 아래로 반쯤 둘러싸고 흐른 데서 나온 명칭이다. 반궁 주변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요즈음의 대학 주변 하숙촌과 같은 풍경이다. 이곳에는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직을 구하려는 양반들이 장기간 머무는 하숙집을 비롯해서 푸줏간, 음식점, 주점 등이 성업했다.
그런데 「영조실록?에 따르면 숙빈최씨가 태어난 곳은 여경방 서학동이다. 반궁촌이 아니다. 서학동은 말 그대로 서부의 학교 서학이 있는 동네로서 여경방에 속한 곳이었다. 영조는 이 곳 생가에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조부 홍계남의 자손이 대대로 살면서 팔지 못하게 했으니 꽤나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숙빈최씨를 위해 별도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을 세우고 시호(諡號)를 올리는 등 추숭 작업을 마무리 한 뒤에 뒤늦게 생가 복원을 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육상궁이 경복궁의 서북쪽인 북부 순화방에 있었으므로 가까운 거리에 생가를 두고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숙빈최씨가 후궁이 되기 이전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동이의 신분을 천민으로 설정한 것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숙빈최씨가 무수리 출신이었음이 기정 사실화되었기 때문이다. 금평위 박필성은 영조의 명으로 ?숙빈최씨신도비명?을 찬술하면서 ‘행록’을 참고하여 숙빈최씨의 가계를 알았음을 밝히고 있다.
“행록을 살펴보면 최씨의 세계(世系)는 수양(首陽 : 해주) 출신이다. 증조는 말정(末貞)으로 품계가 통정이고, 조는 태일(泰逸)로 학생이며, 고는 효원(孝元)으로 행충무위부사과이고, 모친 홍씨는 통정 계남(繼南)의 딸이다. 현종 경술년(1670) 11월 초6일 기미생으로 병진년(1676)에 뽑혀 궁에 들어왔으니 겨우 7세였다”
이 신도비는 숙빈최씨가 죽은 지 8년이 되는 해인 영조 1년(1725)에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숙빈최씨 사조(四祖)의 직역으로는 원래 신분을 판별할 수 없다. 드라마 동이에서는 최효원의 직역이 검시관인 오작(?作)으로 설정되어 있다. 오작은 시신을 검안하고 처리하는 일을 맡은 천민이었다. 그들의 출신이 천민이건 아니건 숙빈의 봉작에 따라 사조에 대한 추증도 동시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빈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최효원의 직역이 종6품 무반 체아직인 부사과에 그친 사실과 그의 가계기록이 해주최씨 족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출신의 미천함을 반증하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천한 출신의 동이는 어떻게 궁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궁녀는 대체로 중앙관청에 소속된 여자종에서 선발하였으므로, 민간의 천민이 궁녀로 뽑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천민 출신 여부가 불분명한 숙빈최씨가 입궁한 시기는 숙종 2년(1676)이었다. 그 동기는 양친이 모두 일찍 죽는 바람에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일 수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입궁 후의 행적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저
무수리로 지냈다는 구전이 거의 사실처럼 굳어진 분위기다. 무수리는 상궁과 나인의 하인으로서 물 긷는 일을 담당했다.
숙빈최씨는 인현왕후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수문록(隨聞錄)을 보면, 폐출된 인현왕후의 탄신일에 성찬을 차려놓고 정성을 드리는 나인에게 감동한 숙종이 그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나인이 곧 숙빈최씨이다. 이 자리에서 숙빈최씨는 자신이 중전마마의 시녀로서 지나치게 총애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전남 담양에 있는 용흥사나 대각교에 얽힌 설화에서도 인현왕후와의 특별한 인연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중궁전의 시녀로서 나인이라고 하여 숙빈최씨의 출신성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수리를 나인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일정한 기간이 지나 무수리에서 나인으로 승격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이 무수리 최씨의 정성에 감동하는 계기를 만든 것은 최씨의 신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조선정부의 공문서에 나타나는 각종의 기록이 출신의 근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질 못하고 그 외에 전하는 기록도 없으니, 숙빈최씨가 천민 출신인지 무수리 출신인지의 여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겨두어야 할 듯하다.

숙종
숙종은 1661년(현종 2) 8월 15일(신유)에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열 네 살의 나이로 1674년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숙종에게는 왕후가 셋이 있었는데, 첫 왕후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는 숙종과 동갑으로 1680년(숙종 6) 10월에 숙종이 태어난 경희궁 회상전에서 스무 살의 나이로 승하한다. 두 분 사이에는 딸 둘이 있는데, 일찍 돌아간다. 인경왕후의 아버지는 김만기[金萬基, 1633(인조 11)∼1687(숙종 13)]로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의 형이다.
이어 계비가 된 왕후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다. 숙종과는 6살 아래다. 1701년(숙종 27) 8월에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서른 다섯의 나이로 승하한다. 두 분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그래서 숙종은 다시금 계비를 들였는데,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로, 숙종과는 무려 스물네 살 터울이 지며, 두 분 사이에 자녀는 없다.
희빈 장씨(禧嬪張氏)
그리고 숙종과 인연을 맺은 후궁으로는 가장 많이 알려진 희빈 장씨(禧嬪張氏, 1689년(숙종 15) 1월 15일에 희빈_빈(嬪)은 내명부 정1품_이 되고 5월 2일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당한 뒤, 5월 6일 숙종이 왕후로 삼겠다는 명령을 내리고 이듬해 10월 22일 정식으로 왕후로 책봉된다. 1694년(숙종 20) 4월 12일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9월 25일 자진의 명령이 있고, 10월 8일 다시 자진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며 10일 장례 관련 명령이 내려진다.)가 있다. 장씨의 정식 칭호는 조선 왕실의 족보라 할 수 있는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에 ‘옥산 부대빈(玉山府大嬪)’로 되어있다. 숙종과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바로 경종(景宗) 임금[탄생일이 1688년(숙종 14) 10월 27일이다. 이 때 숙종의 춘추 스물아홉인데, 당시 문화를 염두에 둔다면 아들을 너무 늦게 본 셈이라 하겠다.]과 성수(盛壽)로, 성수는 일찍 돌아간다.
숙빈(淑嬪) 최씨
숙빈 최씨의 정식 칭호는 ≪선원계보기략≫에 ‘육상궁 화경 휘덕 안순 수복 숙빈(毓祥宮和敬徽德安純綏福淑嬪)’으로 되어있다. ‘육상궁’은 영조가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위한 사당 이름[廟號]에서 유래한다. ‘화경’은 1753년(영조 29) 6월 영조가 친어머니 최씨가 돌아간 지 60년을 기리며 올린 시호고, ‘휘덕’은 1755년(영조 31) 12월에 올린 시호다. 최씨와 숙종의 첫 만남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693년(숙종 19) 4월 26일에 최씨를 숙원(淑媛, 내명부 종4품)으로 삼았다는 기록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이 때 숙종의 춘추가 33세였다. 이듬해 6월 2일 특별히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삼고, 9월 13일에 영조 대왕을 낳는다. 그런데, 1693년 10월 6일에 소의(昭儀, 내명부 정2품) 최씨(崔氏)가 왕자를 낳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아마도 아래 ≪선원계보기략≫에 보이는 영수(永壽)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695년 6월 8일 숙의 최씨는 귀인(貴人, 내명부 종1품)이 되고, 1699년 10월 23일 단종 대왕(端宗大王)을 복위(復位)시킨 경사로 숙빈이 된다.
숙종에게는 모두 6남 2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앞서 이야기한대로 두 딸은 일찍 돌아간다. 그리고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는 ≪선원계보기략≫에 보이듯 세 아들이 있다. 바로 셋째 영수, 넷째 영조, 다섯째는 너무 일찍 돌아가 이름조차 없다. 그러고 보면 숙빈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셈이다. 이는 의빈 성씨와 정조 사이에 자녀가 가장 많았던 사실을 미루어볼 때, 숙빈 최씨가 숙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듯하다. 그럼에도 숙빈과 숙종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바로 영조다. 영조는 일곱 살이 되던 1699년(숙종 25) 12월 24일에 연잉군(延礽君)으로 책봉되고, 열한 살이 되던 1703년(숙종 29) 12월 15일 오늘날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를 거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21일 서종제(徐宗悌)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 혼인은 사치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萬金)으로 헤아릴 정도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4월 17일에는 숙종이 명령을 내려 연잉군을 위한 사가가 마련되어진다. 이에 대해 당시 관료들은, “연잉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이현(梨峴, 배오개, 오늘날 동대문경찰서에서 종로5가로 넘어가는 길에 있었다고 전함.)에 갑제(甲第)가 있는데, 임금은 또 왕자를 위하여 별도로 저택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조신(朝臣)들 사이에 말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우선 부득이하다는 전교를 내렸으니 중외(中外)가 남몰래 탄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서 숙빈의 사가가 배오개에 아주 큰 집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녀의 고향 또한 서울임이 밝혀졌다. 뒷날의 기록이지만, 1765년(영조 41) 8월 6일 실록 기사에 따르면, “추모동(追慕洞)은 곧 인현 왕후가 탄강(誕降)한 옛터이고, 여경방(餘慶坊)은 곧 숙빈 최씨가 강생(降生)한 옛집이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경방은 오늘날 신문로 일대로 전한다.
그리고 숙빈 최씨와 인현왕후 민씨의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려주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왕후가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한 뒤 한 달쯤 지난 9월 23일 숙종은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내린다.
“대행왕비(大行王妃, 곧 인현왕후 민씨)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 장씨는 비단 한 번도 기거(起居)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中宮殿)’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閔氏)’라고 일컬었으며, 또 말하기를, ‘민씨는 실로 요사스러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취선당(就善堂) 서쪽에다 몰래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매양 두세 사람의 비복(婢僕)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祈禱)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것을 참을 수가 있다면 무엇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제주(濟州)에 유배(流配)시킨 죄인 장희재(張希載)를 먼저 처형하여 빨리 나라의 형벌을 바로잡도록 하라.”(1701년(숙종 27) 9월 23일)
숙종이 인현 왕후 민씨의 승하에 희빈 장씨와 장희재가 관련이 있다면서 장희재를 먼저 처형하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사 끄트머리에 “외간(外間)에서는 숙빈 최씨가 평상시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追慕)하여 통곡(痛哭)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알렸다고 전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곧, 숙종이 이러한 비망기를 내리게 되는 사실이 숙빈 최씨의 알림에서 비롯한다는 소문을 전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기사에는 왕후의 유언이라 할 수 있는 내용도 전한다.
하지만, 숙빈은 자기 아들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보지 못하고, 아쉽게도 1718년(숙종 44) 3월 9일에 돌아간다. 그녀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소령원(昭寧園)이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육상궁에 1773년(영조 49)에 영조의 화상 두 폭을 봉안하고, 또 초본(草本) 한 폭을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유원(李裕元 : 1814~88)이 남긴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육상궁 제사를 춘분ㆍ하지ㆍ추분ㆍ동지 네 차례 지낸다고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