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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리 뒤의 지불등 지맥이 동남으로 뻗어 하서산, 진등산에 이르고, 그 아래쪽에 무안리가 있고, 청도천 건너편에는 우령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 아래쪽에 부로리가 위치하고 있다. 청도천을 중심으로 무안리와 부로리가 마주하고 있다. 무안리는 본래 밀양군 하서면 지역으로서 옛 지명은 수안역리였다. 이 곳은 교통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역이 형성되어 발달한 것 같다. 고려사(高麗史) 병지 역참조에 금주도(金州道-金海) 관내에 있는 역 중에서 밀성군(密城郡)에는 무월이, 영안, 용가, 병산 등 4개의 역이 있었다. 그 중 영안역이 조선 시대에 수안역이 되었는데, 이는 남쪽으로 양동역까지 30리, 서쪽으로 창녕군 부곡 온정역까지 30리, 동으로 용가역까지 30리, 북으로 유산역(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까지 50리로서 경상좌도의 요지였다.
그 후 수안, 물안, 무안 등으로 지명이 바뀌었으며, 지금도 밀양, 창녕, 청도면으로 가는 길이 서로 교차되는 교통 요로이다. 또한 지리적으로 청도천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옛부터 홍수 때마다 학포, 인교쪽의 물이 밀려와 범람하기 때문에 물안이라고 하며, 옛날부터 소금배가 현 무안면사무소 앞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부로리와 병합하여 무안리라 하였고, 1933년 무안면에 편입되었다. 행정리동명은 무안리라고 하였으며, 자연 부락으로는 동부동, 서부동, 방이(굴뱅이), 부로 등으로 나눈다.
재사로는 밀성대군(密城大君) 제단소(祭壇所)인 만운재(萬雲齋)와 밀성박씨 경덕단전사청(密城朴氏景德壇典祀廳)인 포경각(逋敬閣), 창번(滄樊) 박해철(朴海澈) 영정각치제소(影幀閣致祭所)인 경초재(景肖齋), 서은(西隱) 구석범(具錫範) 묘하재숙소인 보유재(報裕齋) 등이 있다.
(1) 동부동(東部洞)
무안 중앙교회의 옆 골목을 경계로 위쪽 일대를 일컫는데,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부동에는 무안면사무소와 밀양경찰서 무안파출소 및 무안우체국, 무안초등학교 등이 소재하고 있고, 무안시장이 주로 이 곳을 점하고 있다.
(2) 서부동(西部洞)
중앙교회 옆 골목을 경계로 하여 그 서편 동네를 말하는데, 이 곳에 우시장이 있다.
(3) 방이(굴뱅이)
무안중학교 건너편, 강 너머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서, 뒷산에 굴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그 전에는 집오리 사육을 하던 몇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인가가 없어졌다. 그 흔적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구장터(구 시장터)
주로 동부동에 위치했던 시장으로 수안장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무안의 옛 이름이 물안 또는 수안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또한 소안장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수안이 소안으로 변음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래의 장터는 현 면사무소 앞 도로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는 구도로 일대를 말한다.
1920년경 이 곳에 골목장이 생겼다가 그 범위가 넓어지면서 1938년경 동부리의 현 시장으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은 무안버스정류소 앞 일대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전에는 무안면은 물론 청도면, 초동면, 창녕군 영산면 일대의 주민들이 다 모일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하며, 이 일대의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다. 지금도 상당히 번성한 시장이다.
■ 무안제방(武安堤防)
신법리에서부터 무안리를 감싸며 높이 3m, 약 10km에 걸쳐 있는 제방으로 1935년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홍수가 지면 청도천이 범람하고 낙동강물이 치받쳐 올라와 마을이 위태로울 때가 많았는데 이 제방 공사가 완공되므로 해서 무안리가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고 한다.
■ 창고터(倉庫址)
홍제암 뒤편 일대에 있었는데, 이곳이 옛날 밀양부의 외서창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이 곳에 하서면, 상서이동면 지역의 조세를 보관했던 곳으로 생각된다. 또 일제 시대 때부터 최근까지도 곡물, 가마니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 진등산(長嶝山)
무안리를 감싸고 있는 뒷산으로 산등성이가 길다는 뜻에서 생긴 지명이다. 진등산 정상에서 서부동 뒷편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를 진등(긴등)이라고 한다.
■ 생잇골
서부동 뒷편에 있는 골짜기로, 상여집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생이는 상여의 변음이다.
■ 디청들
동부리의 북쪽 일대의 들을 지칭하는 말로, 마을 뒷편에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가장골(假葬谷)
서부리에서 중산리쪽으로 돌아가는 쪽의 골짜기로, 옛날 이 곳에 가매장을 했던 곳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
무안파출소 앞의 둑 쪽에 있었던 것으로 수문장돌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양산 통도사의 국장생석표로 그 상반부는 파손되어 없어지고, 하반부의 잔석이 남아 있었으나 무안제방 축조 때 매몰되었다고 한다. 이 돌에 새겨진 명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 여수방들
무안리 서부동의 남쪽에 있는 들이다. 여수방이란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 여수방 보
무안리 서부동의 남쪽에 있는 보로, 여수방들에 물을 대는 보이다.
■ 소지들(沼池野)
무안리 동남쪽에 있는 들로, 옛날 이 곳이 늪이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이 곳은 주로 하천부지였으며, 소짓들보에서 물을 댄다.
(4) 부로리(扶老里)
우령산의 지맥이 서남으로 향하다가 다시 청도천과 나란히 남으로 뻗었는데, 이를 뒷산으로 하여 무안리와 마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부로리는 원래 하서면의 지역으로서 옛 지명은 부로곡이라 하며, 또한 근곡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1914년에 무안리에 병합되었다. 법정 리동명은 무안리이고, 행정 리동명은 부로리라고 한다.
밀주승람(密州勝覽)에 의하면 부로에 사인(舍人) 오녕(吳寧), 현감(縣監) 오맹윤(吳孟胤)이 소거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광주 안씨, 함평 이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또한 부로라는 말은 옛부터 전해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노인을 공경하는 예의 바른 곳이란 뜻으로 추정되는데, 부북면 퇴로 마을에서 이 곳에 입촌한 함평 이씨들은 선조의 고향인 퇴로의 유풍을 받든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는 지석묘로 추정되는 큰 바위가 부로리 앞 들에 4기가 있었다고 하나, 1990년 경지 정리 때 매몰되었다고 한다. 또한 뜸북골 앞 일대를 작답할 때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유구와 유물의 소재는 파악할 수 없지만 이 곳은 고분군으로 추정된다. 그 외 부로리 남쪽 산과 중리와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말바우 밑의 밭에서도 석관이 출토되었으나, 그 유물의 소재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연상리의 지석묘군과 연결해 보면 선사 시대의 중요한 유적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뜸북골(학골)
부로리 입구에서 왼편에 있는 첫번째 골짜기이다. 이는 무안리 앞산으로, 산세가 뜸부기 형국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또 학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골짜기 입구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학이 사는 곳에 물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마을에 사는 광주 안씨 문중(부로리 거주, 안상환씨 12대조 때라 함)에서 축조하였다고 한다. 이 연못은 일제 때 못의 소유자가 만주로 이거하면서 신법리 거주 권부자에게 매도하였는데, 그 후 권부자가 연못을 메워 논으로 개작하여 경작하였다.
그런데 그 논의 경작자마다 초상을 당했을 뿐 아니라 삽질이나 괭이질만 해도 해를 당했다. 그래서 아무도 이 논을 경작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그 후 안씨 문중에서 다시 그 논을 매입하여 옛 모습대로 연못을 축조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 치마바위(상암-裳岩)
부로리 뜸북골 아래쪽의 연못 밑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는 부로리 거주 안상환씨의 13대 조모가 친정인 함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치마폭에 싸서 오던 중 뜸북골 입구에 내려 놓고 소피를 본 다음 다시 그 돌을 들려 하였으나, 돌이 갑자기 커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버린 것이 지금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오고 있다. 크기는 가로 115cm, 세로 99cm, 높이 31cm 정도인데, 앞면에 '夫(부)' 자가 새겨져 있다.
그 후 안씨 문중이 일시 쇠잔해졌는데, 그 때 마을의 박좌수라는 자가 이 바위를 자기 집에 옮겨 사용하려 했는데, 갑자기 그 아들이 병이 들고 집안에 큰 우환이 생겼다. 당황한 박좌수가 무당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무당이 말하기를 그 치마바위를 본래 자리에 갖다 놓지 않으면 집안이 망할거라고 했다. 박좌수는 하는 수 없이 바위를 다시 그 자리에 안치해 두었다.
또한 일제 때 헌병이었던 성감독이란 자가 인부 30여명을 동원하여 이 치마바위를 무안지서에 옮겨 놓으려 했으나 안씨 문중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바위를 옮긴 이는 진양 강씨이며. 그 친정 부친은 강백지라고 전한다.
■ 대밭골(竹田谷)
부로리 뜸북골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대밭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이 곳에 굴이 하나 있는데, 신법리 앞산까지 뚫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옛날의 속설에 의하면, 부로리 주민들이 이 굴 입구를 막으면 신법리에서 병신(불구자)이 나고, 또 신법리 주민들이 신법리쪽 굴 입구를 막으면 부로리쪽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하여 양편이 서로 자기쪽의 굴 입구를 막고, 상대편의 굴 입구를 헐곤 했었다고 한다.
■ 범골(虎谷)
부로리 대밭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범이 살았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범등골(虎嶝谷)
부로리 불당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범의 굴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싯귀더미(쇠던골)
부로리 불당골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진기밧등
부로리 개미등의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 개미등
부로리 불당골의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개미가 많이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장목등
부로리 솔밭골 위쪽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인데, 이 곳에 소를 방목하였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동곳등
부로리 장목등의 위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어리빗등
부로리 개미등의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 곳의 지형이 얼레빗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챈빗등(참빗등)
부로리 어리빗등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이 곳의 지형이 참빗을 닮았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납닥갓골
부로리 골안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 불당골(佛堂谷)
부로리 범등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 곳에 절터와 함께 돌부처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이후 불교의 탄압으로 부처가 파손되어 현재 그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또 이 곳에 샘이 있는데, 물이 풍부하여 주변의 논 농사에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 재왓골(와곡-瓦谷)
부로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곳에서 옛날에 기와를 굽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에는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이 곳에는 부로리에서 연상리 중리 마을로 넘어 가는 고개가 있다.
■ 점골(店谷)
부로리 납달갓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부로 소류지 위쪽의 동편 철탑 밑 일대를 이른다. 이 곳에는 질흙이 나와 옛날부터 옹기를 생산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주변에서 옹기 파편이 많이 나오고 있다.
■ 골안(谷內)
부로리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부로 소류지 밑의 일대를 말하는데, 점골과 연결되어 있으며 흑토가 출토된다고 한다.
■ 납달고개
초동면 봉황리에서 부로리로 넘어 오는 길목에 위치한 고개로, 나지막하고 평평한 고개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과거에는 소 도둑이 많아 도둑고개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 음짓배
부로리 뒷산으로 안골산이라고도 하는데,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음지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이 곳에 도치샘이 있다.
■ 도치샘
음짓배에 있는 샘으로 약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물이 조수처럼 불었다 줄었다 한다고 한다. 아침 때 쯤에는 물이 넘치고, 나무꾼이 도끼나 낫을 갈고 돌아와 보면 물이 조수처럼 줄어지고, 점심 때 쯤은 다시 물이 불어 넘친다고 한다. 바다 조수의 높낮이와 같이 조수 현상이 나타나는 이 샘의 깊이가 옛날에는 명주실 한 꾸리가 다 풀릴 정도로 깊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다 메워져 있다. 이 샘의 약수는 나환자에게 특효가 있었다고 하는데, 옛날 약수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동네에 큰 폐단이 되었다. 그래서 주민들이 돼지를 잡아 샘에 넣은 후로 약효가 없어졌다고 한다. 돝 즉 돼지를 잡아 넣은 샘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말바우(마암-馬岩)
음짓배의 도치샘 위쪽에 있는 바위로, 말발굽 자국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부로리 남쪽에 위치한 섬들 위쪽 산에도 말 발자국 모양의 흔적이 있는 바위가 있는데, 이것도 말바우라고 부른다.
■ 안산(案山)
부로리 안골과 재왓골 사이에 위치한 산이며, 마을 앞에 있는 산이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선바우(立岩)
부로리 불당골 동쪽에 있는 바위로, 우뚝 솟은 바위가 서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중리고개
부로리에서 재왓골(기왓골)을 지나 연상리 중리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 솔밭골(松田谷)
부로리 챈빗등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소나무숲이 있는 등성이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안골(內谷)
부로리 불당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안쪽에 있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청석걸
부로리 불당골에서 동네 앞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색깔의 청석이 개울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 갓등
부로리 뒷산인 음짓배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동네 가(邊) 쪽에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갯사리들
부로리 조산걸 남쪽에 있는 들인데, 갯사리대(논에 나는 풀 이름)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 구시뱅이들
부로리 불당골 아래쪽에 있는 들로, 소구유처럼 낮은 지대라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금청들
부로리 입구에 있는 들 이름이다.
■ 두구들
부로리 마을 앞 대밭 부근에 위치한 들로, 두구보의 물을 끌어 댄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이 곳은 자갈이 많아서 과거에는 목화를 많이 재배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논으로 바뀌었다.
■ 조산걸
부로리 뜸북골과 재왓골 중간에 있는 들이다. 이 마을에 사는 광주 안씨의 선대 묘가 뜸북골에 있다. 이 묘에서 보면 앞들에는 재왓골에서 내려오는 계천과 부로리 마을에서 내려 오는 계천의 끝이 보이는데, 계천의 끝이 보이면 불길하다는 설에 따라 계천의 끝이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산(造山)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산이 있다고 해서 조산걸이라 하는데, 이 곳에 물을 대는 보가 재왓골쪽에 있었다고 한다.
■ 선녘들
부로리 뜸북골 앞에 있는 들이다.
■ 허무골들(虛無谷野)
부로리 조산걸 아래쪽에 위치한 들이다. 이 곳의 토지가 너무 척박하여 작황이 허무할 정도로 좋지 않았는데, 수확이 허무할 정도라는 의미에서 허무골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이 들에 메추리 두 마리가 날아오면 그 중 한 마리는 굶고 갈 정도로 곡식이 잘 안 되는 곳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경지 정리로 옥답으로 바뀌었는데, 이 곳에 물을 대는 보를 허무골보라 한다.
■ 섬들(島野)
부로리 남쪽 산 밑에 있는 들 이름이다. 옛날 제방을 쌓기 전에는 청도천의 물이 여러 갈래로 흘러 이 곳이 마치 섬 모양으로 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이 곳에 물을 대는 보를 섬들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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