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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대왕 : 선조(1552-1608년. 재위:1567- 1608년. 집권 40년 7개월. 59세.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그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유명과 종실의 천거에 의해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인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수렴 청정했다. 이때 하성군의 나이는 16세였는데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선조가 정사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그는 즉위 초에는 학문에 증진하고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가 됐으며 훈구,척신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척신들이 완전히 조정에서 사라지자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분당되는 사태에 직면했고 이후 동인과 서인 으로 분리되어 당파 싸움을 하게 된다.
● 붕당정치
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은 허엽이 영수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박순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三色)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 ·이산해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이 입상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 ·탁남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 ·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 ·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 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켜 사학일소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 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 ·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 내지는 실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의 무리가 되어 과거를 위한 유학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 ·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단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 ‘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 동인: 조식,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주리학적 도학을 주장함.
● 서인: 이이,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주기철학을 주장.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 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동인인 통신부사 김성일은 토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 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 의 주장과는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 해 왔으니 이것이『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7년 동안 지속된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 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절제하여 사치를 배격 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고 양식을 절약하는 정책 을 실시해 민간경제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민간의 사기를 돋우고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전란 중 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공신을 녹훈하였다. 하지만 선조의 전란 복구 노력은 거듭 되 는 흉년으로 쉽게 효과를 볼 수 없었으며 조정은 당쟁이 더욱 악화되어 혼란이 점차 가속화 되었다.
결국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의인왕후를 비롯해 8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14남 11녀 의 자녀를 얻었다.
선조는 임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약하고 우유 부단한 왕으로 인식 되고 있지만 명종 시대의 혼란 을 수습하고 외척 정치를 없앴으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 이었다.
● 인목왕후 김씨(1584-1632) :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해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 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은 임해군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폐서 시켜 강화도에 유배하고 '7서의 옥' 이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증살(烝殺)함.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왕후로 폐비시킨 뒤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같은 패륜행위는 인조반정의 구실이 됐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 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 영창대군(1606-1614년) : 왕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은 까닭에 부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1613년 서양갑, 박응서 등 권력가의 7명의 서출들이 역모 꾸몄다 하혀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이 발생했다. 이때 이이첨 등은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 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증살시킴.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 을 잘봐달라는 유교를 남김).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 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추어 버린다.
이후 이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 하지만 선조는 미쳐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 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고, 유영경은 인목대비 에게 영창대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교지 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 임해군(1574-1609년) : 선조의 서출. 장남으로 광해군의 친형이다.
그는 성질이 난폭하고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는 공공연히 왕위를 도둑 맞았다고 생각 했는데,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책봉에 대한 서얼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하여 대북파의 주청 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죽임을 당했다.
● 정철(1536-1593): 그의 큰누이는 인종의 귀인 정씨였으며 둘째 누이는 계림군 유부인임. 이 때문에 그는 어릴 적부터 궁중 출입을 자주 하였으며, 명종과도 어릴 적부터 벗으로 지냄. 그가 27세에 별시문 과에 장원급제하자 명종이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좌의정 이었던 정철은 세자 책봉에 관 한 문제를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 할 것을 주청하려 했다. 또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상의했다. 그러나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김씨 소생인 신성군을(임란 피난중 사망) 총애하는 것을 알고 인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 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그러자 인빈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선조 는 매우 진노했다. 이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건져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 하였다. 유성룡,이산해 등은 침묵을 지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등은 모두 강등 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때부터 인조 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의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이었는데 그가 이때 처음으로 다룬 일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사건 이었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 하였지만, 그는 왕의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사형에 처해버렸다. 이일에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그의 강직한 성격 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 을 혼란 시키는 정쟁을 일삼치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그는 중앙 관직에 머물 때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며 격렬한 논쟁을 일삼는 파당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히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지방 수령으로써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뛰어난 관리적 기질을 발휘하곤 하였다 .
관동별곡, 훈민가,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 하여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 임진왜란 (1592.4월-1597.11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미술품 등이 없어지거나 약탈 당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견 했고, 이 때문에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되었다.
그 때문에 국가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 력 팽창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 이순신 (1545-1598년. 서울 건천동 출생)
그의 할아버지는 이백록은 조광조 등의 소장파 사림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 때 참화를 당함.
그 후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그가 태어날 즈음 가세는 많이 기울어 있었다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영창대군(이의), 정명공주.
공빈 김씨(恭嬪 金氏);-임해군(이진), 광해군(이혼).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안군(이성), 신성군(이후), 원종(이부,인조의 부친), 의창군(이광), 정신, 정혜, 정숙, 정안, 정휘옹주.
순빈 김씨(順嬪 金氏);-순화군(이보).
정빈 김씨(靜嬪 金氏);-인성군(이공), 인흥군(이영), 정인, 정선, 정근옹주.
정빈 홍씨(貞嬪 洪氏);-경찬군(이주), 정정옹주.
온빈 한씨(溫嬪 韓氏);-흥안군(이제), 경평군(이늑), 영성군(이계), 정화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