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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2년 초 프러시아의 대략적인 튜턴 기사단령(청색원)>
1. 반란의 징조
본문 속에서 어느 군대가 진격했다든가 제압했다라고 하는 표현은 단순한 단어상의 의미 이상의 것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습격 - 약탈 - 방화 - 반란 –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무자비한 과정들은 캠패인 기간 내내 이교도 영토의 여러 곳에서 소규모로,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복잡하고 섬세하게 구성된 영토확장 전략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길 만큼 영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기본 전술은 무척 단순한 원리에서 작동하고 있었는데 굳이 비유를 만들자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 ‘성경 아니면 검을 받아라.’
튜턴 기사단을 위시로 한 십자군은 프러시아의 이교도들에게 복종과 개종을 강요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락을 공격해서 초토화시키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저항하는 많은 이교도들이 칼에 맞고 목이 매달리고 불에 태워져 사라져갔습니다. 드물게 이교도에게 잡힌 기독교도들의 운명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전쟁은 십자군이 이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군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그 과정을 주위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리라고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쟁의 원한이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원인일 수 있었는데 사실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발트인의 생활 – 아풀로에 성(城)>
원래 전쟁의 무자비함은 발트해의 이교도들에겐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사민족이었고 죽음은 그 문화에서 친숙한 것이었습니다. 리투아니아와 프러시아, 리보니아의 이교도들은 주변의 민족들(바이킹, 슬라브 족)은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전쟁을 벌여왔습니다. 습격과 약탈, 살해 행위는 그들의 세상에 만연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신들과 사후세계를 강렬하게 믿고 있었고, 그 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05년에는 에스토니아에서 살해 당한 이교도 전사들의 미망인 50명이 나무에 목을 매어 집단 자살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1336년의 필레나이 공성에서는 성의 함락 직전, 성 안에 있던 이교도 리투아니아의 전사들이 적들을 저주하며 그들의 소중한 가족들과 재물을 모두 불에 태워 없앤 후, 최후의 순간이 되자 전원 자결했습니다.
<필레나이 성의 유적과 추모비>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기독교 인 연대기 작가들은 시큰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으니, 그 것은 이와 같은 비극들이 이 전쟁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미망인들)은 (자결을 함으로써) 자신의 남편들과 곧 (다시)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It is no wonder, since they believed that very soon they would live together with their husbands….)”
“…그러나, 이것은 놀랍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따라 그렇게 했으며 그들은 죽음을 훨씬 더 쉽게 숭배했기 때문이다… (…However, it is not amazing, since they did that according to their religion and they regarded the death much easier….)”
북유럽의 날씨만큼이나 을씨년스러운 이러한 사건들도 그들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에 대한 이교도들의 이런 태도는 그들이 전쟁과 죽음에 무감각했다고 확대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전쟁 그 자체만으로는 앞으로 40년 가까이 되풀이되는 프러시아 반란의 원인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교도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야만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편으로는 이 십자가 기사들과의 전쟁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별난 요소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침략자들은 약탈과 방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발트 연안에 정착한 이래 2000년 동안 믿어왔던 세계관까지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교로의 개종과 옛 종교의 전면적인 파괴를 의미했으며, 종교뿐만이 아니라 원주민 사회의 구조 자체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까지 포함했는데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이런 식의 압력은 낯선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종교와 가치관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발트 민족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프러시아의 경우에는 그러한 체제 전환이 갑작스럽고 무자비하게 강요되었다는 데에서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종교 면에서는 아직까지 귀족 선에서만 개종이 강요되고 있었으나 원주민들의 성소는 파괴되고 이교 풍습은 금지되었습니다. 이동의 자유는 금지되었고 독일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그들의 경제활동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튜턴 기사단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더 많은 보조병과 노동력과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원주민들로부터 더 많은 병력을 징집하고, 더 많은 세금을 긁어 모으고, 게다가 성채 건축 공사판에 동원할 더 많은 노동력을 끌고 와야 했습니다. 1239~1244년 사이에는 기사단장 한 명이 요절했고 그 후임자는 무능해서 리더십 혼란의 상태였으니, 아무튼 튜턴 기사단 프러시아 지부는 가지고 있는 것에서 쥐어짰던 것입니다.
프루스 인들은 기독교의 평온함보다는 자신들의 옛 성소가 파괴되는 것을 먼저 보아야 했고, 장원제도로 인한 경제적 결실을 보기 전에 자신의 자유가 속박 당하는 것을 먼저 겪어야 했습니다. 튜턴 기사단의 급속한 세력확장을 위해 원주민들이 짊어져야 하는 병역과 노역, 납세의 부담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이 것만 하더라도 프러시아의 퍼블릭 오더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발트인들에게 튜턴 기사단의 기억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고 한다. – 리투아니아의 동화책에 나오는 저주 받은 튜턴 기사의 일러스트 (2003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은 개종을 받아들이고 새 체제에 복종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에 진심으로 귀의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얻게 되는 영적 안식뿐 만 아니라 사법상의 권리도 누릴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유일신께서 십자가를 단 깡통머리들에게 승리를 보장해 준 것과 같이, 그 가호가 자신에게도 미치길 바랬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지 못해 튜턴 기사단의 강요에 따른 것뿐이겠지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튜턴 기사들을 따라 마을에 들어온 독일인 중재자들의 말이 맞는다면 그들은 개종의 대가로 기독교인들과 같은 권리를 누려야 했습니다. 또한 삼포제와 방앗간, 협동노동이 결합된 서구식 장원제도를 통해 전보다 더 많은 경제적인 수익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의 권리 보장은 그리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서구식 경제체제는 그 가치가 증명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때까지는 원주민들이 참아주어야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지배자들의 공정함이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으로부터 독점권을 얻은 독일인 상인과 제분업자들이 원주민들의 수익을 얼마나 챙겨 주느냐, 그리고 독일인 지배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원주민들의 권리를 얼마나 보장해 주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방앗간 – 중세의 제분업자들은 농부들의 밀가루 횡령에 도통했다고 하는데...>
결론적으로 튜턴 기사단의 원주민 정책의 실행은 이교도로 남은 자들에게는 물론이고 기독교로 개종한 원주민에게도 별로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세운 청사진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무능한 자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독점 제분업자와 상인들은 봉건제도에 익숙한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도 속된 말로 ‘삥땅’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런 일에 어리숙한 이교도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프루스 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귀족의 신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2등 민족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처지의 사람들에게 지배자 신분임을 과시하고 허세부리며 쥐꼬리 만한 권력이라도 그것을 남용하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2등 민족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발트해의 주변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군사적 영광과 전리품을 추구했던 전사들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튜턴 기사단은 교황청 직속의 일종의 교단이라 할 수 있으므로,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교회 세력이 있었다면 최소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그 권리를 누릴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도 가능성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프러시아의 경우에는 그 교회 세력의 수장이 무려 6년 동안이나 납치당한 상태에서 튜턴 기사단의 비호를 받는 성직자들만이 선교 사업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프러시아 교회의 공백을 틈타 기사단의 도움으로 이교도 사회에서 한 자리씩 맡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사단에는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프러시아에서 성직에 앉지 못한 다른 성직자들은 미래의 더 나은 자리를 꿈꾸며 독일과 폴란드에서 열광적으로 발트 십자군을 설파하고 다녔습니다. 주교가 없는 상태에서 프러시아 교회는 허수아비가 되어버렸습니다.
프러시아 주교인 크리스티안이 몸 값 800마르크를 내고 1239년에 이교도들로부터 풀려났을 때 직면하게 된 것도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2. 크리스티안 주교
크리스티안(Christian)은 본래 그다인스크의 인근에 위치한 올리바(Oliva)의 시토 수도회 (Cistercians) 수도승이었습니다. 그러나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프루스 인에 대한 선교와 개종 사업을 그에게 일임하면서 그의 인생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정력적으로 자신의 임무에 매진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의 성과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시토 수도회 문장>
1215년이 되자 크리스티안은 기독교로 개종한 12명의 프루스 인 귀족들을 거느리고 로마 교황청으로 가서 그의 선교 사업의 성과를 보여주었고 향후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계획 안을 직접 보고하였습니다. 그 직후 교황은 그를 신생 프러시아 교회의 첫 주교로 서임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루스 인들에 대한 선교사업은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리보니아에서 검의 형제단이 벌이고 있는 십자군 운동에 대한 풍문이 퍼졌고, 폴란드 세력의 확장에 자극 받은 프루스 인들이 들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헤우민스키(=쿨메를란트) 일대는 곧 이교도들의 공격으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1217년 3월이 되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크리스티안 주교에게 칙서를 보내 프루스 인들에 대한 십자군을 승인하면서 프러시아 십자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 교회가 모은 독일과 폴란드 십자군은 숫자가 적어 승리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주교도 이교도의 반격으로부터 피신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크리스티안 주교는 이에 굴하지 않고 마조프세 공 콘라드 1세와 프오츠크의 주교인 게데온(Gedeon)과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헤우민스키 지방에 장원과 성을 기증 받았으며 마조프세 공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수호하기 위한 도브진의 형제 기사단을 창설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도우러 온 십자군은 한 시즌이 끝나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고 남아있는 콘라드 1세와 크리스티안 주교의 군대로는 프루스 인들의 침입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도브진 성 – 마조프세 공이 도브진의 형제단에게 기증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주교는 튜턴 기사단이 발트 지역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환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헤우민스키와 프러시아에서의 성무 관할권을 제외한 교회의 재산을 튜턴 기사단에 기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이 후원하는 도미니크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자신의 교구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기사단에 대해 조금씩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교황 특사로 파견된 모데나의 윌리엄은 프러시아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본래 크리스티안 주교의 권위는 교황에게 직접 받은 것이었으며 그때까지 선교사업을 주관한 것도 프러시아 교회와 시토 수도회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튜턴 기사단이나 교황특사의 태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교황에게 호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작긴 하지만 무력수단으로서 도브진의 형제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었고 마조프세 공의 협력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갈등이 계속 커지게 된다면 크리스티안 주교의 프러시아 교회는 리보니아의 리가 교회와 마찬가지로 기사단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1233년, 기독교 개종자로 가장한 프루스 인들이 크리스티안 주교에게 직접 성사(聖事)를 받고 싶다고 접근한 후 경호병들을 모두 해치우고 주교를 납치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몸값을 요구해 왔지만 그 이후 6년 동안 튜턴 기사단은 주교의 석방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교황 특사인 모데나의 윌리엄은 한술 더 떠 프러시아를 도미니크 수도회의 성직자들이 주도하는 3개 교구로 분리하고자 하였습니다.
1239년 겨울이 되자 크리스티안 주교는 겨우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대신 붙잡혀 있을 인질들을 프루스 인들에게 제공한 뒤 풀려났고, 교황으로부터 그들을 석방하기 위한 몸값 800마르크를 받아 지불했던 것입니다.
크리스티안 주교가 프러시아 교회로 돌아왔을 때, 수 많은 위험과 희생을 무릅쓰며 프러시아의 선교사업에 매진해 왔던 자신의 교회를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교구는 분할되어 있었고 도브진의 형제 기사단은 사라졌으며 튜턴 기사들과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들이 프러시아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습니다. 주교가 납치되어 있을 때 그들이 취했던 태도까지 연관 지어 생각해 본다면, 그가 그 때 무슨 심정이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튜턴 기사단을 비난하는 편지를 교황에게 보냈는데 그 중 튜턴 기사단을 비난하는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튜턴의 형제 기사들은 기독교로 새로 개종한 사람들이 세례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기독교인들의 군주일 때 보다 이교도의 군주일 때 더 강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2) 만약 기사단에 복종할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은 주교(=크리스티안 주교)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까지 고문하며 괴롭혔다.
3) 그들은 순례자(=십자군)들이 교회를 짓는 것을 방해했고 그들이 건축한 것들은 이교도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확언했다.
4) 주교가 형제 기사들(=튜턴 기사단)에게 일정한 조약에 따라 일정한 감독권을 인정하였고, 그 권리를 통해 (튜턴 기사단에게) 주교구를 확장하고 이교도를 공격하고 평화와 카톨릭 신앙의 복음 전파를 수호하기 위한 임무를 맡겼음에도 불구하고, 형제 기사들은 프루스 인들이 자신을 붙잡았을 때 지켜주지 않았으며 몸값을 지불하라는 교황청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도 따르지 않았다.
5) 그들은 주교(=크리스티안 주교)와 교환하기로 된 어떤 프루스 족 귀족들은 돈을 받고 풀어주었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주교의 석방을 위한 인질로 제공했었던 새로 개종한 귀족은 죽여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만큼의 돈을 그 귀족으로부터 뜯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6) 주교가 붙잡혀 있는 동안, 형제 기사들과 몇몇 개종자들은 주교의 교회와 땅과 마을과 상티르(Sanctir)의 성에 침입하여, 그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모든 재물들을 약탈해 갔으며, 주교의 권리와 십일조, 그리고 다른 수익들을 폭력으로 갈취해 갔다. 또한 그들은 조약을 위반하고 프러시아 땅 전체를 도둑질하였다.
7) 그들이 프러시아 주교의 명예와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쿨름의 땅에서 많은 수익을 획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그 당연한 봉사를 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순례자들이 주교에게 의지하는 것도 방해하고 있다.
편지를 작성한 크리스티안 주교의 튜턴 기사단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할 수 있지만 내용의 사실성은 삭감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튜턴 기사단들의 ‘부도덕한’ 행위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1, 3번의 항목은 주교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지만 4번은 사실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많이 과장되었겠지만 실제로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기사단은 선교사업보다는 전쟁 자금이 더 필요 했고 프러시아 땅에서 확고히, 독점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프러시아 교회의 권위는 제발 사라져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것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귀족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튜턴 기사들의 변덕으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 받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1차 프러시아 반란의 종결을 즈음해서 체결된 1249년의 크리스트부르크(Christburg) 조약에서도 재차 확인되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튜턴 기사단이 세운 체제는 별로 공정하게 운영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중세 발트인들 - 프러시아 인과 리투아니아 인>
편지를 받은 교황은 튜턴 기사단에게 주교를 괴롭히는 행위를 중지하고 교회가 입은 손해에 대해 배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크리스티안 주교는 튜턴 기사단과 교섭하여 프러시아의 1/3을 넘겨 받았으며, 2/3의 기사단령에서도 성무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 특사인 모데나의 윌리엄은 프러시아를 몇 개의 교구로 쪼개고자 하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새로 즉위한 교황 이노센트 4세를 설득하여 프러시아 교회의 분할에 대한 승인을 받아내었습니다. 프러시아는 4개의 교구로 분열되었고 크리스티안 주교는 그 중 하나의 교구 만을 맡아야 했습니다.
<이노센트 4세>
주교는 이 결정에 저항했고 동료인 시토 수도회 원장들은 20년 동안 주교가 행한 프러시아 선교 사업의 노고를 인정해 달라고 교황에게 거듭 탄원했지만, 교황은 1245년 2월, 크리스티안 주교에게 2개월 이내에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구 관할권을 박탈하겠다고 최종 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2개월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같은 해 봄, 이 모든 사태에 지친 프러시아 교회의 초대 주교는 모든 프루스 인들의 영적 영도자라는 자신의 꿈이 산산이 흩어진 채, 같은 기독교인들의 음모와 배신에 환멸을 느끼며 결국 사망하였던 것입니다.
3. 자극
튜턴 기사들이 행한 전쟁의 원한, 개종의 압력, 자유의 상실, 가중되는 노역, 무능한 리더십, 불공정한 통치 등 반란을 위한 내부 요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졌습니다. 프루스 족 귀족들은 자리에서 들고 일어나 다시 한번 자신들의 군사적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고 자유민들은 언제라도 그들의 지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이었는데 그 것은 오래지 않아 바로 찾아왔습니다.
1241년 봄, 폴란드 남부가 몽골의 침입으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여러 폴란드의 군주들은 더 이상 프러시아 십자군을 지원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1242년이 되자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포메렐리아의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프루스 인들을 지원하겠다고 밀약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저 무적의 검은 십자가 기사들이 북방의 어떤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참패했다는 소문이 프러시아에까지 퍼졌습니다.
<얼음 호수 전투의 승전 기념비>
첫댓글 몽골침입과 알렉산드르 간지의 여파가 여기에도 영향을 미쳤군요-_-;
흠... 무시무시하군욥 역시...ㅠㅠ
알렉산더 네브스키 기념비인가 보죠? 크기 한번 ㄷㄷ 하군요.
동상스탈이 왠지 소련 대인배들이 세운거 같군엽...
크기 ㅎㄷㄷ하다길래 사진을 다시보니 옆에(?) 선 사람을 발견했다능 ㅎㄷㄷ
페이퍼스 전투 간지 하악하악... 앨런비님 말듣고 동상사진 다시보니 크기에 ㅎㄷㄷ.....
몽골이 전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을 보면 참으로 후덜덜 하네요 @..@;;;;
몽골 아해들이 서유럽까지 쳐들어 왔다면 독일애들이 프루스인처럼 되었겠죠 ;;;;;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교황은 도미니크회와 밀접했나 보군요.
뭐랄까, 예수회 등장이전엔 가톨릭 수도원 세력중 가장 머리좋고, 자부심이 너무 강한 사람들이랄까요.. 때문에 프란치스코파가 인정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크리스티안 주교.. 좀 안습이네요. 열정과 야심은 있었으나 ...정치력이 부족했다고 정의해도 될까 모르겠네요..
사실 주교는 운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30년까지는 리보니아 십자군 운동이 활발해서 많은 십자군 자원을 리가 교회와 검의 형제단이 끌어가고 있었으므로 주교가 서방의 지원을 받아 프러시아에서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233년에는 프루스 인들에게 납치 당해버렸으니 튜턴 기사단이 프러시아 교회를 한 구석으로 밀어버리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요.
조만간 튜튼기사단을 아작낼 러시아의 영웅이 등장하겠군요
불쌍하네요 진짜 종교를 하던 사람은 망하고 종교를 수단화 하던 사람들의 욕심은 승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