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이 책을 쓴 범일스님은 처음에는 밖의 대경(境)이 유경(能)에게 보내는 힘이 있어서 그것이 근에 안착하고 그 이후에 식이 알아차린다고 말하고서는 이제는 다시(p. 157) 바깥대경은 전오경과 육근과 법경이 서로 관계해서 드러난 모습이기에 바깥 대경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식 안에 있는 대경이 나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인식 되는 것이 우리들의 두 번째 착각이라고 말한다. 왜? 밖의 경계는 인식 안에 있는 것인데 마치 나의 인식하고 관계없이 밖에 있는 것처럼 드러나기에 그렇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우리들의 두 번째 착각이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말하는 바깥대경이 그대 인식의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대 속裏인 안이 밖인가?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인식이 밖이 되어야 하리라. 왜? 그대가 밖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이 밖이 되고 밖도 안이 되어 밖의 밖은 없어지게 된다. 밖의 밖이 없어지면 그대가 말하는 안도 없어지리라. 왜? 밖이 없기 때문이다. 밖이 없다면 안도 있을 수가 없다. 그대가 이 말을 이해 못한다면 그대는 유, 무의 개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이리라. 그렇다면 한 번 더 쉽게 말하리라.
그대가 말하는 밖이 인식의 현현이라면 밖의 대경은 없어지게 되고 오직 속인 식의 인식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하는 밖은 없는 것이 되고 오직 식만 남게 된다. 그렇다면 그대는 밖의 대경이 밖에 있지 않다고 말해야 되기에 외경의 입장에서 무변(無邊, 없다는 단견)에 떨어지게 된다. 왜? 밖의 대경은 밖에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또 밖의 대경은 그대가 오경, 법경과 의식의 관계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기에 안인 의식만이 남게 되고 그렇다면 그 의식은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왜? 그것이 일체를 드러나게 하기에 그렇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다시 또 유변(有邊, 있다는 단견)에 떨어지게 된다. 왜? 속內에 인식의 주체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 인식의 주체는 없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완전 단멸논자이리라. 그렇기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또 다시 한 번 더 허물을 지어서 있다는 유변에 자연스레 떨어지고 나아가서 그대는 유부의 유변에 떨어진 모습을 지나서 있다는 유변과 없다는 무변 이 양변에 모두 떨어지는 자가 된다. 십이처 등으로 피곤하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그대가 계속 우긴다면 이렇게 묻겠다. 세상의 수많은 범죄와 범죄자가 그대 인식에서 드러난 것이라면 경찰이 도둑놈을 잡으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어디 있나? 그대 인식 안에서 해결하면 되지. 수많은 번뇌를 그대 인식에서 제거하면 모두가 평화로워 지리라. 그렇기에 두 번째 착각이 어떻고 운운하면서 바깥 대경이 인식의 영역이기에 안에 있다는 등으로 말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 여래를 비방하게 된다. 왜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