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기다리겠어요 불 꺼진 삘딩 앞에 언제나
외로이 홀로 나 혼자 홀로
남 모르게 흘러 젖는 눈물을 씻으면서
달빛을 안고 별빛을 안고
바람을 가슴에다 안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대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낯설은 지붕 밑에서 기다리겠어요
二
기다리겠어요 내 마음 빈틈없이 언제나
그대를 찾는 그대를 찾는
카나리아 울적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사진을 보고 얼굴을 보고
그리운 눈동자를 보고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대가 웃고 오는 그날까지
꽃다발 손에 들고서 기다리겠어요
장영실 (蔣英實)
생몰년도 ; 미상
활동분야 ; 과학
* 생애와 업적
1442년 어느 날,소갈증(지금의 당뇨병)에 시달리던 세종은 온천에 가려고 연에 올랐다.
그런데 새로 제작된 연이 움직이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그만 부서지능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무리 실수라 해도 임금의 몸에 위해(危害)를 끼치는 일은 대역죄로 처벌되는 시대였다.
연을 설계한 장영실과 제작한 임효록은 의금부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였던 장영실이 더욱 능률적이고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고심하며
설계한 연이 그렇게 허망하게 부서졌다는 사실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다.
정교한 과학 기구를 수도 없이 만들던 그가 가마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는 말인가.
혹 누군가 고의로 장영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아닐까.
노비에서 정3품 관직으로 파격적인 신분 상승을 이룬 그를 보는 시선이
그다지 곱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세종실록》은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항주(蘇杭州)출신의 중국인이고,
어머니는 동래현의 기생이었다고 전한다.
반면,장영실의 문중으로 알려진 아산 장씨 가문은
장영실의 아버지가 기술직 관리를 지낸 사람이라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장영실이 통래현의 관노 출신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치밀한 두뇌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지는 그는 관찰력이 뛰어났으며,
기계의 원리 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또한 기계 등을 만들고 고치는 일에 능통했으며,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등의 일에 능숙했다.
1400년 영남 지방에 가뭄이 들자 강물을 끌어들여 가뭄을 이겨내게 한 공으로
동래 현감으로부터 상을 받기도 하는 등 그의 탁월한 재능은 차츰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그가 역사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12년(태종 12)의 일이다.
이때는 이미 궁중에서 일하고 있었던듯하다.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은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농업이 발달해야 하고,농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절기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뭄과 홍수 등 자연 재해에도 적절히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의 발달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렇듯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세종과 만나면서
장영실의 재능은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다.
즉위하고 2년 뒤 세종은 장영실•윤사웅•최천구와 천문학에 대한 열띤 논쟁을 벌인 끝에
장영실에 대해
“비록 지위는 낮으나 재주가 민첩하여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라는 극찬을 남겼다.
그리고 천문학자들을 명나라 베이징에 보낼 때 장영실도 함께 보내
1년간 명의 천문학을 익힐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장영실이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세종은 그가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왕실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상의원(尙衣院)의 별좌(別坐) 벼슬을 내리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별좌는 실권은 없었지만,정5품에 해당한다.
그 후 1424년(세종 6)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機)를 고쳐서 보완한 공을 인정받아
결국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시대에 천민이 공식 관직에 오른 것은
그의 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1432년(세종 14) 세종은 천문관측기구 제작을 위한 대규모 사업을 시작했다.
예문관 제학 정인이지가 총지휘하는 이 사업은
우선 천문관측기구인 서운관(書雲觀)을 확장하고,
대규모 천문 관측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를 경복궁 안에 건축했으며,
소규모 천문 관측대인 소간의대(小簡儀臺)는 북부 광화방 부근에 지었다.
또 각종기구 제작사업을 펼쳤는데,
이 일의 실무 책임은 이천이 맡았고,핵심적인 기술 역량으로 장영실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작업에 착수한지 1년 만에 혼천의를 만들었다.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우주관 가운데 하나인 혼천설(渾天說)에 근거를 두고 있다.
혼천설은 우주는 둥근 원으로 얽혀 있고
지구는 그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둥근 원이라는 학설이다.
이러한 천문학적 지식 위에서 장영실을 비롯한 학자들은 해시계와 물시계 등을 만들었다.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솥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의 해시계’ 라는 뜻으로,
그 모양이 마치 가마솥에 다리가 세 개 붙어 있는 것 같이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앙부일구는 솥같이 생긴 반구 손에 그림자침이 한가운데 우뚝 솟아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해시계가 반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당시 학자들이 태양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시계는 낮 동안만 사용할 수 있었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린 날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물시계이다.
1434년 장영실은 김빈과 함께 정교한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자격루는 단순한 물시계에다 정밀한 기계장치를 결합해,
때가 되면 인형과 정•북•종이 시각과 청각을 통해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이다.
자격루는 1434년 7월 1일부터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용되었다.
자격루의 완성으로 장영실은 정4품 무관 벼슬인 호군(護軍)에 임명됐다.
5년 뒤 장영실은 자격루보다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었다
자격루와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옥루는,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이다.
이외에도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
시간과 함께 남북의 방위도 알려주는 해시계인 정남일구(定南日晷)를 만들었다.
금속 활자인 갑인자(甲寅字)의 주조 작업에도 참여해 인쇄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구리와 철강을 채광하고 제련 기술을 향상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세종은 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장영실을 종3품인 상호군(上護軍)으로까지 승진시켰다.
세종 대의 과학 혁명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주도한 사람은 단연 장영실이었다.
이렇듯 세종의 과학적 열정을 현실화시키는 데 일생을 바친 최고의 기술과학자였던
그가 연을 잘못 만들었다는 죄로 하루 아침에 파직되고 만다.
단 한번의 실수 때문인지,파격적인 신분 상승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세력들 때문인지,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맞은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이후의 삶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동국여지승림》에‘아산의 명신’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년을 아산에서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 평 가
장영실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 아니라
반상(班常)의 구별이 뚜렷했던 당시 가장 천한 노비의 신분에서
종3품의 벼슬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과학 기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의지를 지닌 세종,
그리고 세종의 의지와 아이디어를 기술로 실현시킨 장영실,
이 두 사람은 세종대 과학 혁명을 이룬 주인공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