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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
1.나는 아들이 좋다
특별히 남아선호사상이 있는 것도 아닌 데 나는 아들이 좋다. 어쩌면 남자가 좋은지도 모른다. 여학교에 근무할 때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남학교에 있을 때가 좀 더 숨통이 트이고 자유롭다.
아들이 자라면 함께 여행하고 싶었다. 아내와 딸은 여행스타일이 달라서 함께 즐기는 포인트가 많이 다르다. 하지만 아들은 40세가 다 되어서야 세상에 태어났고 참 더디게도 자랐다.
지난 해 여름 아들의 등에 배낭을 지우고 전라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전주, 곡성을 거쳐 여수까지 다녀왔는데 아들은 처음이어서인지 낮선 배낭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오면서 또 다시 불을 지폈다. 겨울방학에는 유럽 배낭여행을 갈 것이며, 그래서 영어나 불어를 공부할 것이며, 이번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지리산 배낭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내가 아들만 챙기는 것이 미안해 올해 고등학생이 된 딸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했다. 딸은 예상대로 ‘아빠나 다녀와. 나는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준 교실에서 보충수업 할 꺼야’라며 일축해버렸다.
선생님들 모임에서 남고 김선생과 아들 교육에 대하여 대화하다가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 방학에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한다고 말했더니 자기 아들도 함께 데려가 달란다. 아들과 동행이 있으면 더 좋을 것도 같았고 또 김선생 아들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기도 해서 흔쾌히 승낙했다.
2.오랫만에 밤기차를 타다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평택문화원팀에게 납치를 당했다. 문화원 교육프로그램에서 송탄지역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 안내를 해달라는 강요(?)였다. 비몽사몽 서정리역과 송탄동 일대를 답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아내가, ‘내일 준민이네랑, 정이네랑, 유리네랑 캠핑가기로 했어요’라고 던진다. ‘에궁,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궁시렁거리며 베란다 창고에서 1년이나 묵은 텐트와 캠핑장비를 꺼내 차에 실었다.
캠핑을 다녀와서 서둘러 컴퓨터에 앉았다. 여행을 하기 전 신문사에 연재하고 있는 ‘평택의 근현대를 걷다’ 원고부터 써야 했다. 다음 날 아침까지 허겁지겁 원고지를 메워 가는데 따르릉 전화가 왔다. 평택시사신문의 박 부사장이었다. ‘삼남로에 대한 수요칼럼 좀 써줘요’ 언제까지냐고 물었더니 월요일 여행가기 전까지란다. 나중에는 ‘여행가지 전에 꼭 쓰세요’라는 문자까지 날리며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
나는 이번 여행의 컨셉을 두 가지로 잡았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하는 분들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였다. 그런데 캠핑을 다녀와 찾아뵐 분들에게 연락을 하려니 여의치가 않았다. 서둘러 두 번째 아이템을 수행할 계획을 짰다. 여행지는 전남 구레에서 하동까지 지리산 둘레길과 섬진강변 답사. 또 여행지에서 지리산 시인 이원규와 박남준을 만나고 지리산학교와 쌍계사 전통차 시배지도 다녀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오전에 평택역에 나가서 밤 11시 35분에 출발하는 전라선 기차표를 샀다. 밤 11시 35분이라. 20여 년 전 지리산 등반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시절에 많이 탔던 기차다. 차표를 구입하는 데 구례구까지 무려 18,000원씩이나 된다. 집으로 돌아와 신문 칼럼원고까지 쓰고 났더니 10시 55분이다. 서둘러 배낭을 꾸리고 기차역으로 달음질쳤다.
3.노숙을 하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기 전이기 때문인지 기차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몽롱한 눈으로 구례구역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 5분. 출구로 나가면서 택시기사에게 근처 찜질방이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얼마 전까지 운영했는데 근래 폐업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구례버스터미널까지 가서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택시를 탔다.
늦은 새벽 구례버스터미널은 지리산 등반객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대합실에 앉아 이틀 동안의 여행계획을 짰다. 아이들은 먼저 화엄사를 답사한 뒤 지리산 둘레길 18코스를 걷자는 제안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는다. 하기야 뭘 알아야 이의를 제기하지...
북적대던 등산객들은 3시 50분 노고단행 버스를 타고 떠나고 우리는 화엄사행 첫차가 올 때까지 비박을 하기로 했다. 머뭇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대합실에 들어가서 긴 의자를 옮기고 나니 셋이 누울 수 있는 아늑한 잠자리가 확보되었다. 시멘트 바닥에 돗자리를 펴고 개인용 침낭을 덮어주며 2시간 동안 잠 좀 자두라고 당부했다. 눕자마자 골아떨어진 성이와는 달리 헌이는 파리가 날아다녀 잠을 잘 수 없다며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그게 파리 때문 만이겠는가!
터미널 직원의 고함소리에 잠이 깬 것은 5시 30분.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정리한 뒤 화엄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벽 6시를 조금 넘긴 화엄사 입구는 정적이 감돌았다. 입장료를 받는 직원들도 출근하기 전이어서 우리는 무료입장객의 행운을 누렸다. 30대 시절 산을 좋아할 때는 무던히도 들락거렸던 화엄사는 거대사찰이면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가람배치가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금강문 옆으로는 지리산의 경관을 가로 막는 거대한 건물이 완공단계에 있었고, 금강문, 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도 비싼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현대 대형교회를 닮아가는 사찰, 사찰을 닮아가는 교회. 썩은 돈 냄새의 구린내 나는 향연.
아이들과 누정의 난간에 걸터앉아 화엄사 전각 너머로 부드럽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았다. 난간에서는 정면으로 대웅전, 좌측으로는 조선후기 불교건축을 대표하는 각황전이 아름답게 조망되었다.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 각황전 앞의 석등과 사사자석등도 이곳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아침 공양을 마친 스님들이 발우를 손에 들고 서쪽 요사에서 쏟아져 나오고 나는 아이들에게 불교건축과 조각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역사적으로 종교가 서 있어야할 자리, 인간의 탐욕이 종교를 얼마나 타락시키는가를 이야기했다고 해야 옳다.
4.사람을 통하여 배운다
화엄사를 오가는 내내 몽롱했던 정신이 화엄사 계곡에서 수행한 세수 한 번으로 정신이 번쩍 든다.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구한 뒤 근처 식당에 들러 콩나물 국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콩나물 국밥의 명가 전주 삼백집에서 먹어도 밑반찬이라고 해야 겨우 서너 가지뿐인데 이곳에서는 무려 11가지의 산나물이 반찬으로 나온다. 밥상을 물리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지리산 영봉을 얼려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화엄사 입구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식당주인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가 반가운지 화색이었지만 나는 오늘 가야할 길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우산을 펴들고 길을 나섰다. 화엄사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더니 산길이 시작된다. 인적이 없는 시멘트 길을 휘적휘적 걸어 오르는데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하다. 1시간 20분쯤 걸었을까 그새 가랑비는 폭우로 변하여 더 이상 걸어갈 엄두가 안 난다.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일단 마을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상사마을 뒤편 신축하고 있던 한옥집 처마밑에서 잠시 비를 피했다.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아이들은 문지방에 걸터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조금 잦아든듯하여 다시 길을 나섰다. 100미터쯤 내려왔을까 상사마을 노인들이 정자에 모여앉아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삼아 술추렴을 한다. 듣자하니 오늘이 중복이란다. 아이들과 함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더니 어서 올라와서 한 점 먹고 가라며 손짓을 했다. 못이기는 척 정자 위에 걸터앉아 앉아 술이며 고기며 떡을 배불리 대접받았다. 할머니들은 ‘집 떠나면 고생이여, 집 떠나면 배곯는 법이랑께’라고 말씀하며 아이들 입 속에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쓰신다.
상사마을에서 머물다 가라며 붙잡는 것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걸어가면서도 노인들의 따뜻한 인정에 감동한 아이들은 ‘너무 좋았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상사마을을 지나면 하사마을이고, 하사마을 동구밖을 돌아서면 오미마을이 나타난다. 오미마을에는 경주 최부자집과 더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구레 운조루가 있다. 다리쉼을 할 겸 운조루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구레 지리산차 시음장으로 들어갔다. 한가하게 앉아 있던 주인은 잠시 구경만 하고 가겠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차 한 잔 나누자며 자리에 앉혔다. 염치 불구하고 자리에 앉아 녹차, 감잎차, 겨우살이차를 비롯하여 무려 다섯 가지 종류의 차를 대접받으며 귀촌하여 차 가공공장을 경영하기까지의 인생 풀 스토리를 들었다.
5.부자(富者)보다는 잘사는 사람이 많아야
요즘 식당이나 상점에 들어가면 ‘부자 되세요’라는 현판을 자주 보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모두의 꿈일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좀 더 살다보면 ‘부자’보다는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잘 살았던 부자 가운데 첫 손가락은 경주 최부자집일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억만금의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의 형제가 있으며, 빈자들을 구제하기에 힘썼던 구레 운조루도 빠지지 않는다.
운조루를 지은 사람은 영조 때 무인이었던 류이주다. 그는 삼수부사와 순천부사를 지냈던 인물로, 삼수부사로 부임할 때는 고갯마루에서 만난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잡아 가죽은 임금께 바치고 뼈는 대문간에 매달아 두었다는 사람이다. 운조루는 류이주가 순천 부사를 지낼 때 금환낙지의 명당을 보고 지은 집이라고 한다. ‘운조루’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다가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관직을 버리고 천하의 명당에 귀거하여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집주인의 마음이 읽혀지는 당호다.
입장료가 있다고 하여 문간채를 두리번거렸지만 사람이 없다. 아이들과 사랑채를 거쳐 안채를 돌아보고 나오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중늙은이가 헐헐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관리인인줄 알고 이것저것 물었더니 자신이 종부(宗婦)의 둘째아들이란다. 무던히도 심심했던지 우리를 붙들고 농지개혁으로 재산이 모두 흩어진 이야기, 호랑이 뼈에 관한 이야기,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데 전통에 대한 자긍심보다는 쇠락한 운조루의 현실만이 눈에 읽힌다.
걸음을 재촉하여 토지면소재지인 구만리에서 올갱이 수재비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섬진강의 1급수 올갱이로 끊여낸 수재비는 쫄깃함과 시원함이 어우러져 텁텁해진 미각을 돋운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걷고 또 걸었더니 이제는 좀 쉬고 싶다. 어디에서 잘까 생각을 굴리다가 지리산 피아골 직전마을로 가는 구례 군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6.피아골, 아 피아골
1990년이었을 것이다. 친구로 지내던 동료 교사들과 함께 지리산 피아골로 야간등반을 갔다. 등산화도 갖추지 않은 풋내기 등산가에게 피아골은 쉬 길을 내주지 않았다. 그때쯤 읽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의 장면들도 칠흑같은 어둠과 겹쳐 나타났다. 앞서가는 동료교사 뒤에 바짝 달라붙어 몇 시간을 올라갔을까 멀리 임걸령 능선 위에 불빛이 보였다. 당시 지리산은 어디서나 야영과 비박을 할 수 있었다. 때론 모닥불도 피울 수 있어서 화재의 위험은 있었지만 낭만이 철철 넘쳤다. 우물이 있었던 임걸령은 등산가들이 애호하던 야영지였는데 우리가 올랐을 때에도 텐트 10여 동과 모닥불을 피워 놓고 몇몇 등산객들이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우리일행을 반가이 맞이하며 반합 뚜껑에 따라주던 소주잔, 그들과의 우정 정말 잊을 수 없다.
그 뒤로도 두어 차례 피아골을 방문하였으니 이번 방문은 거의 20여 년 만이다. 외곡삼거리에서 좌회전 하여 피아골 계곡 따라 올라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였다. 직전마을 정거장에 내려 다음 날 버스시간표를 확인하고는 민박집 물색에 나섰다. 아이들 눈에 띈 집은 펜션이라 비쌌고, 그 아래쪽에 노고단, 임걸령과 계곡이 잘 바라보이는 민박집이 있어 자리를 잡았다. 샤워를 하고 우선 잠을 청했다. 밤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던 몸은 등짝이 방바닥에 닿자마자 골아 떨어져 버린다.
폭약이 터지는 것같은 계곡물 소리에 잠이 깨었다. 밤 8시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어야겠기에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손님이 많지 않은 평일이어서인지 주인집 식당도 문을 닫았고 근처 식당들도 마찬가지다. 겨우 정거장까지 내려가 김치부침개와 도토리묵에 반찬 몇 가지 그리고 산수유 막걸리를 곁들여 밥을 먹었다. 평소 술맛을 아는 아들놈은 내 잔에 담긴 술을 부러운 눈으로 건너다본다. 식당이모에게 술잔을 하나 더 부탁하여 한잔을 따라주었더니 숨도 쉬지 않고 원샷을 해버리고는 그대로 뻗어버렸다.
7.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서둘러 민박집을 나섰다. 오늘 일정은 지리산 쌍계사를 거쳐 하동 악양 평사리의 최참판댁 마을을 답사하고 지리산학교를 방문하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외곡 삼거리까지 나와 쌍계사행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시간을 물으러 외곡휴게소에 들렀다가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 시절 지리산이 좋아 솥단지 지고 산을 오르다가 여든 두 살이나 된 지금까지 지리산 자락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주인장.
버스를 기다리기 지루하여 장난삼아 히치하이크를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번 만에 우리 앞에 차가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놀람과 기쁨을 즐길새도 없이 후다닥 올라타고는 화개까지 안전하게 이동했다. 화개에서 쌍계사까지는 6km, 도보로도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거리다. 아이들과 의기투합하여 3백 미터쯤 걸었을까,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갑자기 폭우로 돌변한다. 안 되겠다 싶어 아이들과 함께 119소방대 차고로 피신을 해서는 다시 한 번 히치하이크를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도 많이 오지 않고 쉽지도 않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무렵 지나가던 승용차가 갑자기 정차를 한다. 부리나케 뛰어가서 올라타며 문짝을 확인했더니 하동보건진료소 차다. 간호사님은 쌍계사를 거쳐 평사리 지리산학교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우리일정을 듣더니, 자신도 지리산학교에서 공예를 배우고 있노라고 반가워하며 쌍계사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화엄사가 세속의 물욕을 버리지 못한 인상이었다면 쌍계사는 단아하고 정갈한 전통사찰의 풍모였다.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특징인 ‘자연과의 조화’ ‘차경’의 의미를 이야기해주며 호젓한 산길을 걸어올라 절의 경내로 들어섰다. 팔영루 난간에 걸터앉아 비를 피하며 산봉우리로부터 내려오는 운무와 변화무쌍한 풍경을 감상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가운데 하나인 대웅전 앞마당의 진감선사혜심의 대공답비에서는 가슴 아리는 아픔이 전해온다. 개혁의 꿈을 안고 신라로 돌아왔지만 골품제의 한계에 부딪쳐 좌절하고 만 신라 최고의 지식인 고운 최치원의 한이 비문에 서려 있는 듯하다.
아이들에게 쌍계사 차맛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내려가는 길에 매표소 직원에게 전통차를 가장 잘 우려내는 집을 물었더니 부산식당 맞은 편의 희심찻집을 소개한다. ‘희심(?)’. 왠지 낮익어 곰곰이 생각해보니 쌍계사에 오르기 전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숨어들었던 가게다. ‘희심찻집은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전통차를 파는 가게에 들어가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 히치하이크에 실패한 아이들이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운다.
8.지리산학교를 방문했지만
1만 5천원에 악양 평사리 최참판택까지 가기로 하고 택시에 올라탔다. 올해 72세나 된 택시기사는 화개가 고향으로 평생을 이곳에서만 살았다고 했다. 72세라면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아닌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하동지역의 한국전쟁 상황과 빨치산에 대하여 물었더니, 여순사건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경로며,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학도병이 싸웠던 고소산성전투, 최병덕장군이 전사했던 이야기, 빨치산이 보급투쟁을 내려오면 식량과 가축을 모두 잡아가서 저녁이 되면 키우던 소들을 파출소가 있던 화개읍내까지 가져다 놓았다는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낸다.
평사리 최참판댁은 지난 5월 수학여행 때 와보고 두 번째다. 아이들과 매표소 입구의 밀면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와 성이는 밀면, 헌이는 팥칼국수 그리고 감자전도 한 장 주문했다. 밀면은 부산 초량밀면만은 못했지만 그런대로 훌륭했다. 농업전시관, 문학관을 거쳐 최참판댁을 답사한 뒤 지리산학교로 향했다. 밀면집 여사장은 지리산학교를 묻는 질문에 ‘학교가 쪼그만데’라고 응수했다. 평사리 하평마을에 있는 지리산학교는 문이 닫혀 있었다. 농가를 개조한 건물은 밀면집 사장님 말마따나 정말 작았고 학생들은 방학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학생들 뿐아니라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공예, 그림, 문학, 야생화사진, 차, 커피, 전래놀이 등 다양한 정규과정 5개 반과 온라인학습 2개 반을 운영한다. 소설가 공지영이 ‘지리산행복학교’라는 책에서 밝혔듯이 지리산학교의 교사들은 도시생활에서 지쳐 귀농, 귀촌한 문화 예술인들이다. 정년퇴임 뒤 인문학학교 설립을 꿈꾸는 나에게는 지리산학교나 녹색대학같은 학교들이 롤모델이다.
지리산학교에서 발걸음을 돌려 하평마을로 내려왔다. 이제 집으로 가야지. 하평마을 노인들에게 버스시간을 물었더니 무려 25분이나 남았다. 버스정류장에서 놀며 장난치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한 번 히치하이크를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달려오던 자동차가 tm르르 서주시는 게 아닌가? 따뜻한 인정에 감사하며 화개까지 나와 다시 구례행 시외버스를 탔다. 거의 쉴 틈 없이 버스를 갈아탔더니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낮 익은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구례구역 버스표를 구입하여 달려 나갔지만 우리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3시 반 경에 기차가 있었던 것 같아 재빨리 택시를 탔다. 구례구역에 도착하였는데 승무원들이 5분 후에 출발한다며 빨리 탑승하라고 재촉한다. 바람처럼 달려 개찰구를 통과한 뒤 기차에 몸을 던졌다. (2013.7.28)
첫댓글 지리산 둘레길 구경 잘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건강 조심하시기를...
샘은 아들 바보?
보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사진을 좀더 보고 싶었는데 이곳에 있네요. 진헌이가 너무 많이 커 버려서 놀랐습니다. 게다가 핸섬하기까지...아빠 닮았어요.^^
이글 읽고 회원가임했어요...... 혹시 다른 여행 계획이 있으면 미리 좀.....ㅎㅎㅎ
저도 지리산을 좋아했습니다. 등산도 60회 이상 했고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지리산 자락에만 가면 가슴이 설레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여행계획은 늘 있지만 시간이 따라주지 않네요. 계획 있으면 공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