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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길은 항상 있다.”라는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서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터닝 포인트가 온다...인생 전체를 바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 길에 섰지만...작은 한순간 한순간을 태산같이 모아 크게 빵 터지는 티핑 포인트에 닿으련다. 무를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그때의 선택을 옳게 만드는 힘은 결국 지금, 오늘 하루의 힘!”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가지 극적인 순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입니다. 말 그대로 방향을 바꾸는 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금 생소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저자인 그Malcolm Gladwell의 또 다른 책의 제목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어떤 상황이 처음에는 아주 미미微微하게 진행됩니다. 오랫동안 쌓입니다. 그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느 날(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칩니다. 한 순간에 갑자기 폭발합니다. 그야말로 급격한 변화입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폭풍 성장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찌나 급격한 변화인지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이 변화의 순간을 일컬어 티핑 포인트라고 합니다.
이 극적 경험이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꿉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그 시작입니다. 신앙 상담을 하다보면,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태산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수히 많은 티끌들이 모여야 됩니다. 천리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걸음부터 시작됩니다. 성숙한 신앙생활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게 되면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고 헌신합니다. 그렇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폭풍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Washington, D. C.의 중심가는 흑인 밀집지역입니다. 그러나 원래 이곳은 거의 백인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흑인들이 한두 명씩 이주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대부분의 주민이 흑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백인들은 거의 워싱턴 외곽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흑인 마을로 변하는 그래프가 대각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느 지점을 지나는 순간, 흑인의 비율은 매우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백인들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극적이고 폭발적 변화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티핑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허물과 죄로 죽은, 병들고 왜곡된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몸부림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우리를 살려 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주어지는 모든 순간,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할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계1:12-13a)라고 시작됩니다. “금χρυσας”은 “금으로 만든, 금제의” 등의 뜻입니다. “그가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나는 순금으로 만든 등잔대가 보인다고 대답하였다. 그 등잔대 꼭대기에는 그릇이 하나 있고, 그 가장 자리로는 돌아가면서 심지 주둥이가 하나씩 뚫린 등잔 일곱 개가 붙어 있었다.”(슥4:2)라는 말씀에 따르면, 순금입니다.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 가장 고귀高貴한 금속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속한 거룩한 것을 상징합니다. 등잔대에는 일곱 개의 등잔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일곱 금 촛대입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라는 말씀에 따르면, 사도가 본서를 기록해서 보내야 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입니다. 존재하는 장소는 분명 이 세상이지만, 실제로는 하늘에 속해 있는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전 세계의 보편적인 모든 교회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인자 같은 이”는 “내가 밤에 환상을 보고 있는데 마치 사람같이 생긴 분이(곧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왔다. 그가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자 누군가가 그를 하나님께 인도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생긴 분에게(예수 그리스도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셨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기 다른 말을 쓰는 모든 사람은 그를 섬겨야 했다. 그의 다스림은 영원할 것이며 그의 나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단7:13-14)라는 말씀의 반영입니다. 본서를 사도에게 계시하는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행7:56b)라는 스데반의 외침대로, 영원한 죽음과 저주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뒤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몸을 돌렸습니다. 일곱 금 촛대가 보였습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습니다. 현존하는 모든 교회와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교회의 머리로서, 오로지 당신 한 분만 감당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직임을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낮고 천한 인간 곧 인자로 오신 예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셨습니다. 심장이 터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물과 피가 분리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던 환난과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물과 피를 남김없이 다 흘리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살아생전 약속하신 대로, 삼일 만에 영원한 죽음과 저주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히13:5b)라는 약속대로, 오늘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친히 임재 하여 계십니다.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 받기를 마다하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났다 할지라도, 아무리 외롭고 고독하고 견디기 힘겨운 상황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 우리 스스로는 믿을 수도, 은혜 안에 거할 수도, 겸손할 수도, 용기를 낼 수도 없습니다.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동행 하고 계시는,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임재 하여 계시는, 세상 끝 날까지 떠나지 않고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우리로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아무리 가지려고 몸부림쳐도 결코 가질 수 없는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솟아오르게 하시는 용기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감사와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릴 수 있는 참된 믿음과 용기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1:13b)라고 이어집니다. ① 구약의 제사장들은 발에 끌리는 예복을 입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 얼굴과 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철저히 가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 사람의 타락 이후, 인간의 몸은 죄를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들어야 할 옷은 이러하니 가슴 덮개(흉패)와 대제사장의 예복인 에봇과 겉옷과 줄무늬 속옷과 관과 띠이다.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이 만들어 준 거룩한 옷을 입고 나를 섬기는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하여라.”(출28:4)라는 말씀에 따르면, 제사장을 위해서 마련된 예복은 흉패와 겉옷 위에 걸치는 에봇Ephod과 겉옷과 속옷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흉패에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습니다. 열두 지파는 교회입니다. 성전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옷감은 성막을 짓는 천과 같았습니다. 사용하는 실의 색상도 유사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입고 있는 옷이 곧 성막입니다. 성전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성막의 지성소는 정사각형입니다.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전혀 없다는 의미입니다. 흉패 역시 정사각형입니다.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제사장이 교회와 성전과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성막을 입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a)라는 사도의 외침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거하시매εσκηνωσεν”는 “천막을 치다, 야영하다, 거주하다, 천막에 임시로 거처하다.” 등의 뜻입니다.
특히 사도는 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15-17)라고 외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 위에 장막을 치셨다고 외쳤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예복은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사장이 성막을 입었다는 말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 저와 여러분이 참된 성막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도가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갈3:27)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입니다. 격려입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절망을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② 대제사장 예복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슴에 금띠를 두르셨습니다.
가슴에 금띠를 두른 사람은 왕이었습니다. 또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b)라는 말씀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팔 소리 같은 음성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나팔 소리 같은 음성으로 선포하는 사람은 선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요, 왕이요, 선지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는 여호와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랐다...고운 모양도 없었고, 훌륭한 풍채도 없었다.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도 없었다.”(사53:2)라고 소개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모진 고난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내려놓으셨던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서의 영광을 완전히 회복하셨습니다. 오늘,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함께 계십니다. 또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대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의 모습으로 재림하십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③ 본문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계1:14a)라고 이어집니다.
“보좌들이 자리에 놓인 것도 보았다.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보좌 가운데 앉으셨다. 하나님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양털처럼 깨끗했다. 그 보좌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보좌의 바퀴에서는 불길이 이글거렸다.”(단7:9)라는 예언의 인용입니다. “흰색”은 언제나 “권위와 영광과 순결”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 영원성, 영원한 신성을 상징합니다. 2000년 전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는 영광을 완전히 회복하신 심판자의 모습으로 강림하십니다.
④ 이어지는 “그의 눈은 불 꽃 같고”(계1:14b)라는 말씀은 “그의 몸은 황옥 같았고, 그의 얼굴은 번개처럼 환했으며, 그의 눈은 불 같았고, 그의 팔과 다리는 빛나는 놋쇠처럼 반짝였다. 또한 그의 목소리는 많은 무리가 외치는 소리와 같았다.”(단10:6)라는 예언의 인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전지Omniscience를 가리킵니다. 전지全知 안에는 불가능이 전혀 없는 전능Omnipotence과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의지意志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꿰뚫어보십니다.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십니다. 선과 악에 대하여 완벽한 공의를 행하십니다.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끝나지 않을 고통에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거룩한 보혈로 허물과 죄를 씻음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입니다. 격려입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깊은 절망을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교회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교회가 교회답기를 원하십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교회는 반드시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들을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1:15)라고 이어집니다. ⑤ “빛난 주석χαλκολιβανω”의 어원語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금 같은 청동 또는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 정도로 이해합니다. “주석 같은 발”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또 풀무에 단련된 발입니다.
풀무는 고난입니다. 고난은 당신을 제물로 드린 영단번의 제사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능력의 왕으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고난을 통해서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려놓으셨던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고난을 통해서 회복하셨습니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끝 날이 되면 다릅니다. 영광과 권능으로 다시 오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 한 모든 더러운 무리들을 철저하게 짓밟으십니다. 당신을 대적한 무리들 역시 처참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벧전1:6-7)라는 사도의 외침대로, 지금 당장 당하는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에 동참하는 첩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실 때,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불로 연단한 금을 사게 하실 때,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오히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용기를 내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⑥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는 “내가 보니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마치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소리 같았다.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환하게 빛났다.”(겔43:2)라는 예언의 인용입니다. “많은 물소리φωνη υδατων πολλων”는 불가항력적인 권위와 위엄으로 반복해서 선포되는 음성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집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천둥처럼 소리를 내십니다...여호와의 목소리는 힘이 있고 위엄이 넘쳐흐릅니다.”(시29:3-4)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은 모든 대적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두려움과 무서움 속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각종 이적들보다 성경을 가까이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6)라고 이어집니다.
⑦ 주님의 오른 손에는 일곱별이 들려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며...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쳐부수셨습니다.”(출15:6), “보아라, 주 여호와께서 능력의 하나님으로 오신다. 주께서 그 능력으로 모든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보아라, 주께서 백성에게 주실 상을 가지고 오시며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사41:10)라는 말씀에 따르면, “오른손”은 권세 있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보호와 안전을 상징합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가리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의 사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보혈로 사신 우리 교회를 권세 있는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절망 속에 던져져 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⑧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왔습니다. 시인은 “주께서 내 혀를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셨고, 나를 주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주께서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셔서 주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사49:2)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양쪽에 날이 선 칼보다도 더 날카로워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며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까지 알아냅니다.”(히4:12)라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날선 검”은 신구약 성경에서 흔히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그분은 입에 모든 나라를 쳐부술 날카로운 칼을 물고 계셨으며 왕의 홀을 갖고 온 세상을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계19:15a)라는 말씀에 따르면, 열국을 심판하실 수 있는 메시아의 권세를 암시합니다. 특히, “검ρομφαια”은 주로 전쟁 때 사용되는 큰 칼입니다. 날이 길고 넓습니다.
웬만한 사람의 키 만 한 무시무시한 칼입니다. 또 좌우에 시퍼렇게 날이 서 있습니다. 미치는 방향성을 가리킵니다. 좌우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입니다.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히 죽이는 무기입니다. 완전한 심판입니다. ⑨ 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얼굴οψις”은 “외모, 용모, 외관” 등의 뜻입니다. 사도가 본 환상 전체에 대한 결론적 묘사입니다.
“그들 앞에서 주님의 모습이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처럼 희게 되었습니다.”(마17:2)라는 말씀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화려한 모든 영광들을 한없이 초월하는 영광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어울리는 우월한 영광입니다. 신성으로 충만한 영광입니다. 거룩한 영광입니다. 가장 완벽한 영광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을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권세와 능력과 우월한 영광으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당신과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셔서 구원하신 교회들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멸하십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딛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라고 이어집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εγω ειμι ο πρωτος και ο εσχατος”는 구조상 강조 용법입니다. “처음과 나중인 바로 나로다.”라는 의미입니다. “곧 산 자라και ο ζων”는 “처음과 나중”이라는 칭호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늘, 항상, 언제나, 모든 순간 살아계시는 “영원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영원히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하여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이 제한된 시간 곧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버지 속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5:26)라는 말씀대로,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 안에 충만한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수여하실 수 있는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망의 영역을 완벽하게 정복하셨습니다. 죽음의 영역까지도 당신의 뜻대로 완전히 주관하실 수 있는 열쇠 곧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권세와 능력과 절대 주권으로 무장하셨습니다.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광채는...여호와의 영광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땅에 엎드렸다.”(겔1:28a), “가브리엘이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왔는데, 그가 가까이 올 때 나는 너무나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단8:17a)라는 선지자들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환상을 목격한 사도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에 완전히 압도되었고 말았습니다.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지게 되는 공포와 전율 정도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목격한 인간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도의 몸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휘몰아치던 폭풍우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사도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건네셨던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14:27b)라는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된 당신의 모습을 목격하고 죽은 자처럼 엎어져 있었던 제자들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하셨던 “일어나라, 무서워하지 마라.”(마17:7b)라는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사도가 직접 들었던 인자와 긍휼이 넘치는 바로 그 음성이었습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였습니다. 격려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용기가 불쑥 치고 올라왔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당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더할 나위없는 위로입니다. 격려입니다. 얼마든지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19-20)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실 본서를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소아시아에 속한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보혈로 사신 우리 교회를 권능의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십니다. 주석 같은 발로 지키고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좌우에 날이 선 칼 같은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나팔과 많은 물소리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책망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대제사장인 당신을 우리를 위한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세세토록 이어질 왕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과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통해서는 “그러니까 잘 참고 견뎌봐. 내가 반드시 이기게 해 줄게.”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위로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쉽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히려 당신의 전부를 희생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어진 하루하루를 기꺼이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쏟아 부을 수 있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곧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는 폭풍 성장까지 경험하는 삶, “비록 무화과는 열리지 않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데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호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합3:17-18)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삶,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궁극적으로는 이기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