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여대를 나와 소설가로서 젊은이의 애정모럴과 낭만적 작품, 분단의 비극성, 역사물을 주로 다루었던 강신재님. 나는 90년대초 강작가와 서신교환을 하게 되었다. 강작가는 서명한 작품집도 보내주었다. 강작가님 작품은 문예물이면서 대중성도 강한 맛이 있어서 여러 편이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젊은 느티나무>, <임진강의 민들레>, <파도 >등이 그렇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 쓰고 나오는 때이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18 살의 여고생인 숙희와 22 살의 대학생인 현수는 한 집에 사는 오누이와 같은 관계이다. 즉 숙희는 후처가 데리고 온 딸이고 현규는 전처 소생의 아들이다. 나(숙희)는 그 현규에게 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둘은 사랑하는 사이로 둘 다 균형과 조화가 잡혀 있는 아름다운 남녀이다. 그녀의 엄마는 무슈 리와 재혼을 했다. 혈연이 없는 남남이면서 그들의 부모가 부부라는 형식적인 제약 때문에 서로 고민한다. 오누이의 관계에서 사랑하는 사이이므로 고민에 빠지게 되나, 숙희가 알고 있는 K 장관의 아들이자 의과대학생인 지수가 숙희에게 러브 레터를 보내자 현규는 분한 마음에 숙희의 뺨을 갈기고, 숙희는 현규의 사랑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의부가 외국으로 떠나고 엄마가 따라가자 숙희는 엄마가 없이 현규와 둘이만 있어야 할 집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걱정한다. 그래서 그녀는 할머니에게 다녀온다고 우기고 서울을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으면서 시골로 내려가서 거의 매일 뒷산에 올랐다.
느티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할 때, 현규가 나타났다. 둘은 무의미한 윤리의 껍질을 벗어 던지고 연인으로 돌아가 사랑해도 괜찮을 방법을 찾으면서 느티나무를 잡고 이성으로 각자의 현재의 길(숙희에게는 학업의 길)을 걷자고 맹세한다. 우리에게는 외국으로 떠나는 길도 있다고 하며... ... 젊은 느티나무는 이들 연인의 기쁨을 품은 슬픈 맹세를 듣는 증인이 된다.


신성일, 문 희
T.V문학관(이효정과 김혜수)
여고생 숙희 역(실제 16세.청순한 이미지 김혜수)
법적 남매의 사랑이라는 구도는 통속적이고 이야기 전개는 다소 신파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충분히 아름답다. 작가는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소녀의 심리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고 발랄하고 재치 있는 문체는 사회적 금기인 애정의 모럴을 무난히 소화해 부담을 주지 않는다. 두 청춘은 물론 고뇌하지만 심리적 갈등을 건강하게 직시한다. 현규는 스스로의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골 할머니 집으로 도망간 ‘나’를 찾아와서 우리의 감정은 진실이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만나기 위해 헤어지는 것이라며 미래를 응시할 힘을 준다. 그리하여 마지막 문장.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전후 문학이 참혹한 전쟁 참상과 그로 인한 희생, 파멸, 고통을 다룬 세계와의 힘겨운 싸움이 태반이었던데 반해 이 작품은 세련되고 고급스런 상류층의 청춘을 등장시켜 젊은이의 사랑과 갈등, 애정모럴, 그리고 희망을 암시하는 가치를 투사하고 있다. '물을 뒤집어쓴 채 욕실에서 나오는 그에게서 비누냄새가 난다'에서 그 냄새는 여고생 숙희, 아니 전후 힘겨운 삶을 살았던 한국의 젊은 독자들의 내면을 파고들어 영혼을 흐북히 적시고 꿈의 날개를 꿈틀거리게 한 언어의 힘이 되었다.
첫댓글 김향숙 소설가의 회고담이다.
“강신재 소설가를 흠모하고 좋아해서 강신재 소설을 다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몇 번 보고 1977년 『여성동아』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김향숙 씨가 당선된 것은 강신재 심사위원 선생님 덕분이라는 말을 전하면서 편집장이 만나기를 원했다.
‘최종심 두 편중 작품완결성은 다른 분이 더 나은데 이 사람은 미흡하지만 가능성이 있다. 신인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셔서 당선되었다. 혹시 강신재 선생님께 사사 받았는가.’ 라는 말을 들었다.
아름다운 분이셨다. 바지에 니트 차림으로, 커다란 백을 들고 계셨는데, 작품과 선생님의 모습이
일치했다. 지금도 후암동 하면, 선생님이 머무는 곳으로 생각이 떠올라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강신재 1924. 5. 8(서울)~ 2001. 5.12(77세)
우연일까.. 강작가님은 계절의 여왕 5월에 태어나 장미의 계절 5월 속으로 떠났다. 그녀에게선 장미 비누 향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