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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유서깊은 폐사지와 사찰을 찾아
충남지역 보령, 부여, 청양지역의 성주사터, 무량사, 장곡사 답사
보령땅 성주산에서 부여땅 끝자락인 만수산 자락으로 하여 다시 청양 칠갑산으로 이어지는 답사지는 결코 수월히 보아 넘길 곳이 아니다.
부여 정림사터에서 보았던 오층석탑과 닮은 탑들을 만날 수 있고, 통일신라기에 완성을 본 삼층석탑의 모습도 함께 공존해 문화의 변천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게다가 칠갑산 장곡사의 예사롭지 않은 절집 구성과 부처상의 모습은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려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려 조금만 서두른다면 하룻길에 여러 곳을 둘러볼 수 있다.
성주사터(聖住寺址)
성주천을 앞에 두고 성주산 자락에 둘러싸인 9천여평의 넓은 빈 절터에는 4기의 석탑과 1기의 탑비, 석불입상만이 덩그만히 서 있어 늦가을에 찾아가면 다소 황량한 느낌마저 든다.
이 절은 통일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로 이름을 떨쳤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전까지 매우 번성했던 절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로 지정된 탑비와 석탑만이 남아 옛 터를 지키고 있지만 옛 영화(榮華)의 한편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법왕이 왕자일 때 전쟁으로 희생된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로서 창건 당시 백제의 주요 사찰 중의 하나였다. 성주사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이었다.
성주사(聖住寺)는 풀이하면 성인(聖人)이 주석(住席)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성인은 신라 말기 성주산문의 개창 조사(祖師)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를 지칭한다.
무염국사는 태종 무열왕의 8세손으로 13세에 출가(出家)하고 21세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선(禪)수행에 정진하였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는 칭호로 불렸던 무염국사는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백성들을 보살피다가 25년 만인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였다.
웅천(지금의 보령) 지방의 호족이었던 김양(金陽)의 권고로 웅천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무염은 현실과 유리된 교리에 빠져 있던 교종을 비판하면서 이심전심(以心傳心)하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의 길이라고 하는 ‘무설토론‘(無舌吐論)을 주창하였다.
무염의 혁신적인 교리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아 마침내 성주산문을 이루었다.
무염국사가 주지로 있던 성주사는 불전 80칸, 행랑 800여 칸, 수각(水閣) 7칸, 고사(庫舍) 50여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로 위세를 떨쳤다.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천여명에 달해 공양쌀을 씻으면 뜨물이 성주천을 지나 십여리 떨어진 개화리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성주사지에서 백제시대에서 통일신라, 고려, 조선초에 걸치는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성주사가 숱한 전란 가운데서도 증축, 개축을 통해 꾸준히 교세를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의 부도비가 성주산 북쪽에 있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 성주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복원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사적307호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오층석탑, 중앙삼층석탑, 서삼층석탑, 동삼층석탑과 석계단과 석등이 있다. 발굴 조사에 의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가 밝혀졌다.
☞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오늘날의 기독교가 크게 천주교(구교)와 기독교(개신교)로 나뉘어지고, 개신교의 경우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으로 종파가 형성되었듯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도 크게 경전교리를 통해 깨우침을 얻는 교종(敎宗)과 참선(參禪)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으로 나뉘어진다.
불교가 번성했던 신라말 고려초에 교종은 5개 교파로, 선종은 9산선문으로 종파를 형성해 내려오다가 교종과 선종의 교리를 통합한 조계종이 오늘날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신라시대 때 각 불교 교파가 들어선 장소와 중심스님, 중심사찰을 중심으로 한 5교와 9산선문은 다음과 같다. 9산선문의 경우 산이름을 중심으로 이름을 붙였기에 성주선문을 성주산문, 혹은 성주산파라고 부른다.
5교(五敎)
열반종(涅槃宗, 보덕, 전주 경복사)
계율종(戒律宗, 자장, 양산 통도사)
법성종(法性宗, 원효, 경주 분황사)
화엄종(華嚴宗, 의상, 영주 부석사)
법상종(法相宗, 진표, 원측, 김제 법산사)
9산선문(九山禪門)
가지산파(보조체징, 장흥 보림사) , 실상산파(흥척, 남원 실상사)
동리산파(혜철, 곡성 대안사) , 사굴산파(범일, 강릉 굴산사), 봉림산파(현욱, 창원 봉림사) ;
사자산파(도윤, 영월 흥녕사) , 희양산파(지선, 도헌, 문경 봉암사) , 성주산파(무염, 보령 성주사)
수미산파(이엄, 해주 광조사)
☞ 신라 말기의 불우한 지식인, 최치원(崔致遠, 857~950?)
신라 말기 ‘3최’라 하여 최언위, 최승우와 함께 천재라 일컬어지던 최치원은 육두품으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신라의 관등은 17 등급으로 구분돼 있었는데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은 아찬(오늘날의 차관 정도)이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기였기에 앞날의 희망을 내다볼 수 없었던 최씨 집안은 최치원을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보냈다.
최치원은 18살에 빈공과(당나라에서 외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 시험)에 급제하나 말단외직외에 다른 관직에 대한 보장이 없었다.
최치원은 학문을 더 연마하여 출세하리라는 다짐을 하고 외직을 사임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당시 문객들과 교우하기를 좋아했던 고변장군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러다가 황소의 난 때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격문(토황소격문)으로 고변 장군의 신임을 얻어 높은 관직까지 받는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29살 때 신라로 돌아왔지만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8세기 후반부터 신라는 골품제의 붕괴와 그 폐단으로 귀족들의 권력쟁탈이 심해지고, 지방 호족 세력이 등장하면서 극심한 혼란과 함께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이에 최치원은 지방관 직책이었지만 진성여왕에게(894) 사회적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시무책 10여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방랑하면서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마지막에는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고운(孤雲)⋅해운(海雲)⋅해부(海夫)⋅홍운(弘雲) 등의 호를 가졌던 최치원은 후세에 유선(儒仙)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서는 김가기(?~859)와 더불어 우화등선(羽化登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무량사(無量寺)
무량사는 부여에서 가장 큰 절로 외산면 만수산 기슭, 소나무가 울창하고 물이 넉넉하게 흐르는 숲 속에 자리하고 있다.
계절 따라 그 느낌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데, 이 절은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가 창건하였다하며, 고려 때 크게 융성했고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조선 인조(1636~1646)때에 재건되었다.
무량사는 2층의 대웅전과 백제 정림사탑을 계승한 오층석탑이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어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조선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 말년을 보냈고 사후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김시습은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유랑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이 절에 들어와 59세 때 입적하였는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았다 한다.
화장할 때 발견된 사리를 모신 부도와 직접 그렸다는 자화상이 보존되어 있다.
그동안 이 자화상은 산신각 한쪽 벽에 모셔져 있다가 최근 경내에 새로 불사증축을 하면서 김시습이 편액을 써준 대웅전 바로 왼쪽 옆에 영정각을 별도로 세우고 모셔두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야 김시습은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지만 김시습의 여정을 돌아볼 때, 무량사는 충분히 제 할 일을 했다고 본다.
절 내에는 극락전(보물 제356호), 오층석탑( 보물 제185호), 석등(보물 제233호), 미륵불괘불탱(보물 제1265호)과 당간지주(유형문화재 제57호), 김시습 영정(유형문화재 제64호)과 부도(유형문화재 제25호) 등의 문화재가 있는데 모두 눈여겨 볼 것들이다.
이 가운데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드물게 보는 2층 불전(佛殿)으로 내부는 상⋅하층의 구분이 없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목조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극락전 내에는 거대한 좌불(坐佛)이 안치되었는데 중앙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좌고(坐高)가 16자, 가슴둘레 24자이며 좌우의 관세음(觀世音)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각 좌고가 16자에 가슴둘레가 18자이다.
또한 여기에는 석가불화(釋迦佛畵)가 있는데 길이 45자 8치, 폭이 25자 2치나 되는 조선 인조 때의 불화로 기구(機構)가 장대(壯大)하며 묘법(描法)도 뛰어나고 채색도 선명하다.
☞ 조선의 우울했던 지식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세종 17∼성종 24)]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淸簡). 단종을 폐한 세조에게 저항, 끝까지 절개를 지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
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썼다.
1463년(세조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일년 후 아내가 죽자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가 죽고 난 290년 뒤인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김시습에 대해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 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지나치고 중후함은 모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하였다.
또한 유곡은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고 평가하였으니 뜻을 펼 세상을 만나지 못한 지식인의 처지를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했다.
장곡사(長谷寺)
청양의 장곡사가 자리잡은 칠갑산은 해발 561m의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칠갑산이란 이름은 만물생성의 근원이 되는 땅과 불 그리고 물과 바람 등 일곱 가지 요소를 일컫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의 숫자 ‘칠(七)‘과 천체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의 첫 번째인 ‘갑(甲)‘자를 써서 지었다 한다. 칠갑산은 만물생성의 근원과 천체운행의 으뜸이 되는 산이란 뜻이다.
장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서 통일신라시대 850년(문성왕 12)에 보조선사(普照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장곡사는 2개의 대웅전이 있는데다 경내에 탑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경사진 대지의 아래쪽에 운학루(雲鶴樓), 하대웅전(下大雄殿:보물 제181호), 요사(療舍), 주지실이 있고, 그곳에서 돌계단으로 70여단을 올라가면 위쪽으로 상대웅전과 응진전이 있다.
상대웅전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불좌상부석조대좌(국보 제58호)와 철조비로자나불좌상부석조대좌(보물 제174호)가 봉안되어 있으며, 하대웅전에는 고려시대의 금동약사불좌상(보물 제337호)이 있다.
장곡사(長谷寺)는 긴 계곡에 자리잡았다는 뜻으로 절의 지리적인 특징이 이름이 되었다. 언제 두 개의 대웅전이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상대웅전의 모습에는 부분적으로 고려시대의 형식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판 기록에는 ‘건륭 42년(1778)‘재건된 것으로 되어 있어 원래의 건물이 이 때 크게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장곡사 건축물의 구조와 특징
일주문을 지나 한참 올라가면 범종각과 운학루가 우뚝 서있으며, 오른쪽으로 난 길을 조금 오르면 네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에는 설선당이 있으며, 오늘쪽에는 하대웅전이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대웅전에는 보물 337호인 금동약사여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하대웅전 우측에 있는 지장전과 편액이 걸려 있지 않은 전각 그리고 운학루와 설선당은 전체적으로 口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상대웅전은 하대웅전 좌측의 돌계단 위, 우측으로 동남향으로 놓여 있다.
상대웅전은 비로자나부처가 주불로 모셔져 있으며 협시불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상대웅전 내부의 불상이나 석조대좌 방전 등이 모두 10~11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상대웅전도 이 때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 무고주 5량집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상대웅전은 3단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기둥은 강한 배흘림이 남아 있으며, 그 위에 다포로 공포를 짜 올렸다. 원래는 주심포식 건물이었으나 후일 다포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상대웅전은 다포식 건물로 보기에는 어딘가 어색하다. 다포식 건물은 기둥 상부에서 창방 위에 평방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지만 여기서는 창방만을 두고 평방은 생략했다.
주심포에서 다포로 변화되면서 공포를 다시 짜올리지 않고 주간포만 추가되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둥 위에 짜올린 주포의 주두굽은 곡선이지만 기둥 사이의 공포인 주간포의 주두굽은 직선으로 만들어 주두 모양이 다르다.
또한, 첨차의 하단부가 곡선으로 마감되고, 측면 대들보의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닥에 마루를 깔지 않고 바닥벽돌을 깔아둔 점도 고려 때 흔히 사용하던 건축기법이었다. 상대웅전 하단이 현재의 장곡사 중심가람인데, 이 중심가람의 주 불전이 하대웅전이다.
하대웅전의 정확한 건물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건물의 구조와 양식 수법은 조선 중기의 특징을 나타낸다. 자연석으로 2단의 축대를 쌓고 그 상단에 장대석 외벌대로 기단을 만들었다.
초석은 덤벙주초로 만들고 그 위에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인데 특이하게도 사면에 공포를 배치하였다.
<출처 : 2004년 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