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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지창조의 자가용시대>의 줄거리:
본문에서 마가는 우리의 시선을 태초에 있었던 첫번째 안식일로 이끌어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통해 이 첫번째 안식일이 회복되면서 그와함께 자가용 천지창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자가용 비행기, 자가용 요트따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해와 달을 다시 만들지는 않더라도 분명히 천지창조를 자가용으로 일상화 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천지창조의 자가용시대
(막3:1-6)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천지창조의 자가용시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미국의 시애틀에 가면 보잉社가 있습니다.
거기서 비행기를 한 대 만들어서 일본에 팔게 될 때, 일본이 무역수지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팔아야 될 물량은 도요타 자동차 camry를 2만 대를 팔아야 된다고 합니다.
비행기 한 대 값이 그만큼 비싼 거죠.
그래서 요즘 부자의 상징은 자가용비행기입니다.
자가용비행기도 여러 종류가 있죠?
자가용제트기가 있고, 자가용여객기가 있습니다, 자가용이 점보만할 필요는 없겠지만 크기에 따라서 값도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저희 동네에 전기가 처음 들어올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시절에 자가용자동차는 지금의 자가용비행기와 맞먹는 의미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가용요트, 자가용발전기 등, 요즘 건물이나 빌딩 지하실에 자체로 발전을 시킬 수 있도록 자가용발전기를 두고 있는 빌딩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천지창조를 자가용으로 일상화하며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늘과 땅과 해와 달, 별을 만드셨는데, 이런 규모로 일어나지는 않을지라도, 또 그런 규모의 창조가 내게 필요하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내 개인의 삶 속에서 자가용처럼 계속되어져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something new 새로운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잘못 믿는 것이라는 겁니다.
천지창조의 연장이 나 개인의 자가용이 되어서 계속 일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가용자동차가 있고 없고가 부자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바로 천지창조를 자가용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짓는다는 얘깁니다, 요즘에 자가용비행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해낼 수 있는 것처럼.
오늘 본문을 보면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시면서 다시 논쟁이 불거집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안식일 논쟁의 전개상황은 조금 달라요.
뭐가 다른가 하면, 이전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눌려버려서 더 이상 논쟁이 이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판정승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계속 예수님을 옭아맬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언행을 좀 삼가시고 조심하시는 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반대로, 공격적으로 노골적으로 나오십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손 마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시고 손 마른 사람을 회당 가운데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올무에 걸기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알다시피 오늘이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 누구나가 다 이제 이 손 마른 사람이 과제인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 선한 일을 행하는 것과 악한 일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어봅니다.
사람들이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이 참 의미가 깊어요, ‘선한 일을 행하는 것과 악한 일을 행하는 것,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안식일에 합당하냐?’
이 질문을 우리가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하면 삶의 생업을 위한 모든 행동이 다 금지됩니다.
그래서 이들의 율법조항을 살펴보면 병을 고치는 것조차도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입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예외규정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달라요.
그러나 이렇게 응급상황이 아닌 다음에는 안식일에는 치유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들의 규정에 따르면 손 마른 사람은 그렇게 오늘 내일 한 시간 두 시간 내에 죽는 사람이 아니에요.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오른손이라고 돼있어요, 힘의 근원이고 노동력의 상징인 오른손이 말랐다는 얘기는 오른손에 피가 말랐고 마비가 되어서 기운이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당장 죽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안식일 규정을 분명히 아시면서 굳이 그날 고치실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논쟁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에요.
왜 이렇게도 꼭 성격이 괴팍한 사람처럼 행동하시는지 모른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이 질문을 우리가 이렇게 받아들인다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는 안식일의 규정을 초월할 만한 위급한 일, 초월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을 지금 들이대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생명을 구하는 일은 생명이라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안식일 규정에 예외가 성립할 수 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에요.
앞에서도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끊어서 먹을 때 시비를 걸지 않습니까?
이때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것을 예로 드신 것을 ‘사람이 굶어죽는 일이 급한 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해도 된다’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본문에서의 초점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 안식의 상태이고, 그 안식의 상태가 충족되었을 때 그 상태에서 밀 이삭을 베어 먹는 것은 안식일의 뜻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행동을 하지 말라는 규정에 예외가 성립될 수 있는 더 상위의 가치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이니까 해도 된다는 식의 얘기가…
어렸을 때,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어요.
성수주일 하기 위해서 해야 될 일들.
운전기사분이 버스 운전하시는 것, 소방관 아저씨가 불을 끄는 것, 이런 것이 아닌 다음에는 다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께서 짜장면 사준다고 하셔도 외식하지 마라, 성수주일을 위해서는.
이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는 거죠.
안식일의 참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마가는 우리의 시선을 태초로 이끌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이렇게 물어보신 질문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마가는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왜 이렇게 물어보실까? 선과 생명.
여러분, 선(善)의 절대적인 정의가 무엇입니까?
절대적이라는 건 시간과 환경을 모두 초월했다는 뜻이에요, 성경이 가르치는 선의 절대적인 정의가 무엇입니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선(善)이 있습니다, 사서삼경이 말하는 선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절대적인 정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이게 바로 선입니다.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도덕기준에 맞추어진 게 선이 아니라, 심지어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고 번제를 드리기 위해 죽이려고 하는 장면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장면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선의 기준과 선의 정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선(善)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 언제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였습니다.
6일 동안 창조하시는 동안에 매번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다, 좋다’고 얘기하십니다.
이는 ‘선하다, 선하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선하다, 내가 만든 것이 내 마음에 든다, 선하다’
그러면 생명이 뭡니까?
생명은 ‘있는 것’이에요, 창조 때에 일어난 일이 생명을 만드신 것 아닙니까?
‘없음’으로부터 ‘있는 것’들을 만들어내신 겁니다.
생명을 만들어내신 것이에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물어보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선과 생명의 문제는 창조의 문제와 연결이 되어있고 주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은 그 태초에 있었던 안식을 회복하시는 것이라 이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죠.
태초의 안식, 창조 이래 있었던 첫 번째 안식일.
다 알고 계시죠, 여러분?
하나님아버지께서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우주와 해와 달 지구와 지구 위에 있는 모든 것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6일째 마지막 창조의 타이밍에 인간을 만드신 다음에 7일째 인간이 의식을 갖고 눈을 떴을 때 모든 창조활동을 끝내시고 쉬고 계시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맞이하신 이 첫 번째 안식일 날 인간은 의식이 깨어나면서 인간으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활동을 중단하신 그날 인간은 생명으로서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었어요.
이 생명으로서의 활동이 시작된 첫째 날, 자기 생애의 아니 인류역사상 인간에게 주어진 생의 첫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거예요.
생의 첫째 날 그가 눈뜨고 처음으로 본 것, 돈 문제 가족문제 결혼문제 나라의 일 동물사랑 자연사랑 자식 키우는 것, 모든 것 생각하기 이전에 완전히 백지 같은 마음으로 첫 번째로 딱 만난 대상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게 아담의 첫 번째 안식일이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과 아담이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첫 번째 안식일에, 하나님은 아담만을 과제로 삼으시고, 아담은 하나님만을 과제로 삼게 됩니다.
그리고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의 교통하심 속에 아담이 영입되고 초대되고, 환영받아 들어가게 됩니다.
그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아담이 초청받아 들어가면서 성령님을 통하여 마음속에 하나님이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게 첫 번째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으로 가득 찬 이후 그날이 지나고 아담의 활동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으로 가득 찬 아담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번성시키는 일인데, 이것이 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태어나기 이전에 당신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창조하셨던 활동이 이제는 아담의 자가용이 되어서 아담의 삶 속에서 아담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창조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첫 번째 안식은 당신의 창조활동을 쉬는 것이었고, 인간 아담에게 첫 번째 안식은 이후에 있을 모든 활동이 샘솟는 샘의 원천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던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활동이 시작되기 위한 샘물이 솟는 것 같은 원천이 바로 안식이었다는 거예요.
그것으로부터 하나님하고만 만나서 백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만나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아담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기운이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뜻이 흘러들어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의미가 흘러들어옵니다.
그 힘과 그 의미와 그 뜻이 아담을 통하여 창조적 활동을 해나갑니다.
그래서 아담의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삶의 모습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이 선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아담의 활동을 상징하는 오른손을 통하여 계속해서 당신의 창조 작업을 해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이 말라버린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거예요.
구약시대에 아직 복음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완결되기 전에, 인간들이 십자가로 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죄인 됨을 가르쳐주어야 할 그 시점에서, 모세는 안식일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할 것이고 칠 일째는 안식할 것이니라’
결국 이것이 안됐어요.
의미가 왜곡되고, 유대인들이 열심히 안식일을 지켰다고 하지만 참 안식일의 의미가 살아난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의 의도가 뭡니까?
안식일이 왜곡되어 버렸다는 뜻이에요.
백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 세상에서 만난 것들, 만난 사람들을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는 어떤 식으로든지 칠 일째 아무것도 안 하고 규정을 지켜도 참 안식의 의미대로 안식을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구약시대에는 아예 조건 자체가 안식을 지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백지 같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눈을 뜬 그 순간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제일 먼저 본 것처럼 그렇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안식이라는 게 주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시간 속에도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보다 먼저 이 세상의 문제, 이 세상의 대상들이 마음에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안식이 아닙니다, 안식이 아닌 거예요.
마음의 백지상태, 완전히 비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로 만나는 것이 안식인 겁니다.
이것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마가는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에 이 세상이 차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운이 오른손이 마른 사람으로 상징되는바 나타나지를 않는 거예요.
내가 오른손으로 일을 한다,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의 상징이에요.
그런데 내가 손대는 일에 하나님의 기운이 나타나지를 않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선한 일이 창조되지를 않는 겁니다.
내가 자식을 만지면 만지는 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황이 자식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져야 되는데, 사업을 하면 사업을 하는 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지를 않는 거예요.
왜? 내 마음속에 사업이 먼저 차있고, 자식이 먼저 차있으니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무슨 일을 합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마음에 담고 살고 있는 이 나의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 연합해서 죽어버림을 통하여 주님이 부활하실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연합해 죽은 자만이 주님의 부활과 함께 그 마음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렇게 살아나서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과 교통할 때, 아담이 눈을 떠서 의식이 처음으로 작동할 때에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몇 일째이건 상관없이 이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상태가 진정한 안식이고, 이 안식으로부터 손 마름의 상황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기운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생명을 살리시고 풍성하고 유익하게 하시는 역사가 내가 손대는 일마다 나타나게 되는 천지창조의 자가용시대가 열린다는 얘깁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날마다 아담이 첫 번째로 맞이했던 그 안식으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 직전까지 있었던 나 자신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고, 주님이 부활하심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살려내셔서 성령의 역사 가운데 두실 때, 아담이 타락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경험했던 그 안식이 내게 주어지고,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짐이 있고, 거기에 행복한 하나님 냄새 맡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엄청난 얘기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주님이 갖고 오신 복음의 내용이라는 거예요.
‘태초의 첫 번째 안식을 회복하고, 그 안식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오는 그 기운으로 활동해라! 안식은 활동의 끝이 아니라 활동을 위한 준비요, 활동을 위한 전제요, 활동을 위한 샘의 원천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가의 메시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고 함께 죽음을 통하여 아담이 타락 이전에 가졌던 그 태초의 안식을 때마다 시마다 날마다 경험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통해 계속해서 천지창조의 역사를 해나가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