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지리산자락
대한불교 제 17교구 금산사 말사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에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만수천변에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있는 호국사찰로 천년을 버텨 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멀리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 홍척이 당나라에 유학, 자장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운 뒤 귀국하여 선정처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을 일으켰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실상사 석장승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 원래 절로 가는 도중 내를 건너기 전에 두개의 장승중에 홍수에 쓸려가 현재는
세 개만 남았다.
장승들의 높이는 대략 2.5~2.9m 너비 40~50cm 가량이다. 조선 영조 1년(1725)에 세운 작품이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다리를 건너 절로들어서면 입구에 2기의 장승이 또 있다.
실상사 삼층석탑 보물 제 37호
실상사의 주불전인 보광전 앞뜰에 동. 서로 세워져 있는 높이 5.4m(꼭대기 8.4m)의두 탑이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희귀한 예이다. 서쪽 탑은 아쉽게도 꼭대기 일부를 잃어버렸으나, 비교적 원래대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실상사 석등 보물 제 35호
보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실상사 극락전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년(1831)에 지어졌다고 한다.
약사전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보물 제 41호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머리에는 머리칼을 붙이고, 정수리 위에는 육계가 아담한 크기이고, 귀는 긴 편이고, 목의 삼도는 얇고,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 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이같은 특징을 지닌 철불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롤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높이 2.69m인 이 불상은 신라 선종사찰 가운데 초기에 창건된 실상사의 본존불상으로 창건조사인 흥척국사 내지
2대조사인 수철국사이래 수많은 사람들의 귀의를 받아온 부처님이다.
철불 부처님의 등과 어깨뒤 일부도 얇은 목재로 복원을 해 놓았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인 두 손은 새로 찾아낸 원래 철제손 그대로 1986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무릎 아래부분 역시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극락전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원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려 조선 숙종(1674~1719) 때 다시 지었다. 그러나 고종 때
함양과 산청 출신 유생들이 절터를 가로채고자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후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건물로
복구 하였다. 천장은 바둑판 모양으로 짜 넣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보물 제 39호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 갔다가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 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보물 제33호
수철화상의 사리탑.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렸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보물 제 34호
수철화상의 탑비이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해우소로 사용하던 작은 건물을 화랑으로 바꿔 변소화랑으로 명명한다.
따스한 이 봄날에, 정면으로 보이는 천왕봉이 아직 흰 눈을 머리에 쓰고 한눈에 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