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공포 영화 <쓰리> 두 번째 이야기, 김지운 감독의 <메모리 즈>를 보고
형용 할 수 없는 상쾌한 공포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관객들은 세 번째 이야기 진가신의 <고잉홈>에 손을
들어 줬겠지만 이야기의 범위를 서서히 실타래가 엉겨들 듯이 좁혀가는 <메모리즈 >의 매력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르겠다. 관객들이 왜 <메모리즈>를 싫어하고 <장화, 홍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지를. 혹시 객석을 메운 많은 이들은 헐리우 드 리더기의 역할에 너무 충실한 것은 아닌가?
김지운의
공포영화에는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지금이 아닌) 느낌 의 첨단(디지털이 아니다)이 묻어 나온다. <장화, 홍련>은
<메모리즈 >의 연장선상에 있다. 바르게 표현한다면 <메모리즈>는 <장화, 홍련 >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고 여겨진다.
김지운의 공포가 사운드와 모션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포영화 지만 정작
알맹이가 빠진 공포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아니 세상에 비주얼만으로 공포의 모두를 표현하는 영화가 존 재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관객들은 김지운의 영화가 더 무섭고 아기자기하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는가?
<디아더스>가 <식스센스>보다 충격이 약하다고 해 서 더 그럴듯한 공포가 아니라는 많은 주장에 동의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영화를 어떻게 보든 그것은 수용자의 몫이겠지만 이 영화가 시 시한 영화라든지 실망스러운 공포라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 할 수
없 다.
물론 <장화, 홍련>은 무섭다기보다 슬프다는 표현이 훨씬 더 적절한 영화다. 그
비극의 출발과 완성에 깃든 멍에와 허무는 가볍게 지나치 기에는 가슴을 건조하게 만들고, 건조하면서도 슬프다.
또한 후반부의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에도 역시 동의 할 수 없다.
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기승전결식이나 발단에서 결말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강요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에 있어 <장화,
홍련>은 전혀 실험적이지 않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도 없다.
오히려 관객을 고려한 나머지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 주려하지 않았 나 하는 우려가 있다. 실제로 인물들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카메라 의 앵글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공포를 느끼게하는 것은 김지운의 공포에 대한 점진적인
진보 다. 앞으로 더 얼마나 강렬하고 매력적인 공포영화를 양산해 낼지 아 직도 젖어 있는 눈시울을 닦으며 두 눈 부릅뜨고 주시 할
일이다.
출처: 장화홍련 공식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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