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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소속감 얻고 하나님 팔기>의 줄거리:
다음은 마더 테레사의 말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재앙은 나병이나 결핵이 아니라 소속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는 사정이 다릅니다. 무소속의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소속감이 재앙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신앙인이 이 땅 위에서 소속감을 갖을 때 그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팔고서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속감 얻고 하나님 팔기
(눅4:14-30)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소속감 얻고 하나님 팔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소속감을 얻고 그 대신에 하나님을 팔아버립니다.
신앙인들이 이러한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에 아주 쉬운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도원의 아침편지’라는 것을 다들 접해보시고 많은 신앙인들이 아침마다 편지를 받아서 읽으면서 거기서 많은 깨달음을 얻고 하루를 시작하는 걸로 압니다.
거기에 실린 이야기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마더 테레사의 이야기인데,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마더 테레사는 평생을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보낸 후에 다음과 같은 통찰을 얻었다, 오늘날 가장 큰 재앙은 나병이나 결핵이 아니라 소속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병은 유행처럼 되었다, 우리는 소속되기를 애타게 열망하면서도 스스로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낀다.>
이 무소속의 느낌, 내가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 나병이나 결핵보다 더 큰 재앙이다, 뭐 요새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나병과 결핵이 재앙은 아닙니다.
그런데 마더 테레사가 인도에서 희생하며 섬기던 그곳에서는 나병과 결핵이 재앙으로 받아들여지지요.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뭐냐 하면 사람이 소속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결핵과 나병보다 더 큰 불행과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면 마더 테레사의 말이 경험적으로 맞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100% 동의하기는 힘듭니다.
어떤 경우에 마더 테레사의 말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취직 못하고 있을 때, 대학을 졸업했는데 한 5년째 취직을 못하고 있다, 이건 재앙입니다.
제가 취직을 못해서 괴로워해본 적은 없지만 삼수 할 때, 대한민국 사회에서 삼수생, 특히 저는 학원에도 나가지를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재수생 삼수생에게 느껴지는 부담감의 핵심은 소속감이 없다는 겁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붕 떠있습니다.
가정의 소속감만 가지고 만족하기에는 이제 성인이 되었잖아요?
어렸을 때는 가정에 대한 소속감만으로 충분합니다마는.
그러나 이렇게 소속감이 재앙이라고 하는 마더 테레사의 말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측면으로 소속감의 문제를 가져와버리면 이 땅 위에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다고 하는 안정된 마음, 이 땅 위에서 갖는 소속감은 신앙에 대해서 엄청난 재앙입니다.
왜 재앙이냐 하면, 하나님을 팔지 않고는 이 땅에서의 소속감을 갖고 거기에 마음이 안심하며 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땅 위에서 소속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팔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값으로 지불하고서야 소속감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언뜻 보기에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마치신 뒤에 성령이 충만하신 가운데 갈릴리 지역으로 들어가셔서 전도활동을 하십니다.
이때 뭇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칭송하게 됩니다.
이 칭송이란 말을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누가가 의도적으로 이 이야기를 간단하게 두 줄로 갈릴리 사역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칭송이란 단어를 끄집어냅니다, 거기에 주목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를 개조시키는 것이에요.
그 다음 이야기는 뭐냐 하면 갈릴리 사역을 끝내시고, 갈릴리 지역이지만 나사렛이라고 하는 예수님께서 자라시던 고향마을로 들어가서 전도활동을 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전도활동을 갈릴리에서처럼 오래 하지를 못합니다.
초장에 엄청난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여버립니다.
계속 읽어가다 보면 29절에서 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면, 예수님과 30년을 같이 살던 나사렛 동네사람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예수님과 30년을 함께 살던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나사렛 마을에 세워져 있는 낭떠러지 끝으로 밀고 가서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는 상황까지 전개됩니다.
왜 이렇게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는가 살펴보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 맡은 자가 예수님께 건네주는 성경을 받아들고 성경을 읽습니다.
이미 이때는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안식일에 성경을 읽을 만한 신분이 못돼요.
그런데 갈릴리 지역에서 전도활동 하던 이야기가 소문으로 퍼져 있어서 안식일에 동네사람들이 ‘그럼 한번 여기서도 읽어봐라’ 하고 기회를 준 겁니다.
그렇게 읽고 나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주목하여 궁금해 하는 가운데 말씀을 전하실 때에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사렛 고향사람들도 갈릴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놀랍니다.
놀라기는 똑같이 놀랐는데, 이 사람들은 칭송 대신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다 놀라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30년을 우리와 같이 지낸 그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집의 아이들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뭐라고 말합니까?
‘그 집 부모들은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말하는 걸 보면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야’ 이렇게들 이야기하잖아요?
자식들의 모습을 보고 부모들의 얘기를 하게 마련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면서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는 이 동네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히 발끈하십니다.
너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십니다.
뭐라고 반응하시는가 하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이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의사야, 네가 의사라면 다른 사람을 고치기 전에 저 자신을 고쳐라라는 그 속담을 너희가 기억하면서 나에게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서도 한번 행해보라!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나를 안 받아들인다는 얘기이고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일이 없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3년 반 동안 온 유대 땅에 가뭄이 가득했을 때, 엘리야가 보냄을 받아서 가뭄 속에서 3년 반이라는 장기간의 가뭄 속에서 먹을 것으로 충분히 공급되게 된 가정은, 그래서 먹을 것에 있어서 구원이 이루어진 그 가정은 유대 땅이 아니라 이방 땅 사렙다라는 곳에 있는 과부 한 사람에게 보내졌다.”
“또, 유대 땅에 그렇게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엘리사 때 나병을 고침 받은 자는 오직 수리아사람, 이방사람 나아만 밖에 없었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구원을 보여주실 때에 모든 선민이 다 배제되어버리고 이방 땅에 있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하시는 바람에 더 이상 듣고 참을 수가 없었던 이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밀고 나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 것을 예수님께서 빠져나오십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또, 누가는 지금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는 이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왜 우리에게 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자,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는 이 말씀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놀랄 정도로 은혜스러운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아니,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우리와 같은 나사렛이라는 마을사람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나사렛 사람이 아니냐? 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에게 나사렛 사람이라는 의식을 반영하는 겁니다.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데, 어떻게 이 사람은 이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하느냐, 그러니까 뭔가가 잘못 된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나사렛 사람이라는 자아의식을 반영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나사렛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었는가 하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려고 할 때 나다나엘이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 ‘선한 것’이라는 말은 선민사회인 유대사회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것일수록 선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선한 분이시고, 최상의 선한 분이시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된 것일수록 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말은, 나사렛이라는 지역에서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유래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느냐 하는 것을 말해줍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나사렛에 있는 한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어떤 기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는 깨달음, 이런 것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유대사회에서 제일 밑바닥이지마는 선민들의 사회인 유대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다행이고 자랑이다.’
유대사회가 하나님을 정점으로 피라미드식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바로 밑에 대제사장이 있고, 그 다음 제사장 그룹이 있고, 장로 그룹이 있고, 율법사와 서기관들이 있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 파, 그 다음에 평민들이 있고, 평민들 중에서도 지역적으로 예루살렘 같은 지역에 사는 자들이 있고, 갈릴리나 나사렛 같은 천대받는 지역에 사는 자들이 있었고, 그 밑에 죄인인 세리와 창기, 이방인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사렛에 사는 사람들은 맨 아래 죄인들의 그룹 바로 위에 있는 자들로서 평민들 층에서도 가장 후진 곳에 사는 자들이었고, 이들이 마음속에 갖는 생각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저 위에 계신 분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나서 우리들에게 지시해주는 바대로 그저 받아먹고 살면 된다는 생각, 그래서 유대사회에 소속된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 이 생각을 갖고 살다가 예수님을 보면서 은혜로운 말씀, 뭔가 나사렛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이상한 것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와 같은 자가 아니냐? 라고 예수님을 거부했던 겁니다.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 위에 있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칭송했어요.
칭송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독사조메노스’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적인 영화로운 빛을 볼 때 하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디 출신인지 모르고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이 칭송했다는 얘기는 뭔가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 땅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나올 수 없는 이야기,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이 배워도 나올 수 없는 이야기, 뭔가 신적인 빛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똑같이 신적인 느낌을 받을 때 예수님의 출신을 알고 있던 나사렛 사람들은 자기들의 자아의식,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생각을 예수님께 덮어씌우면서, 저 사람이 우리와 함께 살던 요셉, 그 집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하늘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에게 화를 내신 이유를 여러분들 아시겠습니까?
유대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 자들은 저~ 예루살렘에 사는 제사장 그룹, 장로 그룹, 그들에게 속해있는 일이라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일을 미뤄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가 그들을 옥조인 것이 아니에요.
다윗은 레위인도 아니고, 사울 같은 왕족도,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동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 더 강렬하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사렙다 과부에게 엘리야가 보내졌다, 유대 땅에 수많은 과부가 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직접 가서 만난 자는 사렙다 과부 하나다.’
피라미드식의 조직으로 되어있는 이 선민의 사회 바깥에 있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데, 이 선민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밑바닥을 형성하고 있는 과부들 중에서는 단 한 사람도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자가 없다 이겁니다.
이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나병환자들은 하나님과 만날 기회를 상실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아예 사회 바깥으로 쫓겨나서 사회 밑바닥 지하로 내려가 버렸으니까.
그런데 이 사회 조직 바깥에 있던 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직접 닿는 역사가 나아만에게 일어났다는 얘깁니다.
자, 이사야서의 글을 읽으시면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 이 말이 너희 귀에 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나타난 일이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직접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소통을 하게 됩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주시고, 하는 이 모든 메시아 사역을 통해서 나사렛 사람인 나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나 개인의 위에 하늘 문이 열린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은 내가 나사렛 사람인 한, 유대사회에 소속되어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직접 관계 맺는다는 것은 포기하고, 하나님과 직접 관계 맺는 것은 이 유대사회의 조직상 위에 있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인정하면서, 나는 단지 유대사회에 소속감을 갖고 거기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이들의 악함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사회 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것,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 없어도 되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지낼 수 있느냐는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여러분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직장에 소속되었다는 마음을 갖고 계시죠?
여러분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심지어 local church, 동네에 있는 어느 교회에 소속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시죠?
그 소속감, 그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소속된 자들이 이 땅에서 모이는 곳일 뿐이지, 소속감의 출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그렇게 핍박을 받아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지금 지역교회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으로 살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방인들 사회 속에서 초대교회가 처음 성립할 때, 그들은 다 하늘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라는 조직이 아무리 핍박을 받아도 교회는 무너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 소속감이 하늘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직장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을 판 것이에요.
하나님과의 직접관계를 팔았으니까 직장에 소속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늘 문이 열려서 내가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잡고 있는 자들에게는 천국소속감밖에 없어요.
이 땅 위의 직장은 소속감의 출처가 아니라, 내가 파견 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속된 자가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서 파견 나가 있는 것이지, 이 직장이 소속이 아니에요.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배우자 자식 부모가 있는 가정이 내가 소속된 곳이 아닙니다.
그 가정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가지려면 반드시 하나님과의 직접관계를 팔아버려야지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직접관계를 가진 자는 천국에 소속되었음을 느끼고, 이 땅에 몸이 처한 상황에서 풍랑이 일든 어쩌든 사실은 상관이 없어요.
가정도 직장도 내가 속한 단체도 조직도 대한민국도 내 소속이 아닙니다.
내가 속한 지역교회도 내 소속감의 출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로 우리는 이 땅을 등지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보낸 자들입니다.
그 사람 위에 하늘이 열려서 하나님께서 소통을 직접 하실 때에, 내 소속은 하나님 품이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고, 천국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 안이 내 소속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그동안 소속감이라고 느끼고 살았던 모든 단체 모든 조직은 단지 내가 천국으로부터 파견 나와 있는 곳이지, 내가 속한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포기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소속되고, 천국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이 땅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거기서 안심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판 사람들입니다, 그 소속감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이 메시아로 오신 이유는 내가 직접 하나님께 소속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에든지 소속을 느끼며 마음의 안정을 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판 것입니다.
주님,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있지 않게 하시고, 오늘 하루 온종일 하나님께 소속된 자로써 가정에, 직장에, 내가 속한 단체에, 내가 속한 사회에 파견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