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다가 새벽 두시 반 즈음 깼다. 남녀무리 일당이 술 먹고 시끌시끌하게 들어왔다.
어느 나라 말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잠결에 소리를 지를 뻔 했는데, 순간 쪽수가 딸리는 군. 큰일 날 수 있어.
하고 그냥 짜증내다 잠들었다. 사람의 살고자 하는 본능은 무섭군.
혼자 지내니 말 수가 줄어들고, 온화해진다. 무슨 말을 하게 되면 항상 슈렉에 나오는
반데라스 고양이처럼 눈을 초롱초롱하게 하면서 묻는다. 착해졌나 보다.
오늘은 관광과 쇼핑을 한 날이라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아무리 많이 자려해도 여덟시에는 눈이 떠진다.
안나샘이 말한 나이소이에 가서 빅사이즈와 밥 한 공기를 먹고, 파쑤멘 요새에 갔다가
53번 버스를 타고, 왓프라께우에 갔다.
파쑤멘 요새는 220여년 전, 방콕을 수도로 정한 라마1세가 지었으며, 도시의 방어를 위해 성벽을 축조하면서
14개의 요새도 함께 만들었는데 그 중 2개가 남아있다고 한다.
겉이 하얀색이고, 군데군데 대포가 놓여져있어 마치 서양 건축물 같이 느껴진다. 워낙 낡아서인지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있다.
요새 근처에는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주는데, 방콕 시내는 결코 자전거를 타기 좋게 되어있지 않기에 선택하지 않았다.
차도 너무 밀리고, 사람도 많고 위험하다. 방콕, 스마일 바이크라 써있지만 선뜻 타기 쉽지 않다. 실제로 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독일 뮌헨의 자전거 천국과는 너무 다르다. 치앙마이에서 차보다 오토바이가 많았고, 미터 택시보다 뚝뚝이,
버스가 아니라 썽터우가 있었다면, 방콕은 오토바이는 별로 없고 차가 훨씬 많으며, 뚝뚝보다 미터 택시가 더 많으며,
썽터우는 볼 수 없다.
53번 버스를 탔다. 에잇 오늘은 돈을 받는다. 7밧 밖에 하지 않지만, 왠지 이번 버스는 공짜이길 하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빌게 된다. 날씨가 아침부터 푹푹 찐다. 도저히 긴 바지와 팔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어서, 가방에 도트 선생님이 주신 어부 바지와
반팔 옷을 챙겼다. 사원에 갈 때는 변신을 해야 한다.
왓프라께우(에메랄드 사원) 앞에는 벌써 사람들이 드글드글 하다. 타이 사람은 공짜고, 외국인은 350밧이다. 입장료가 한국
돈으로 쳐도 14000원 정도이니 타이 물가로 치면 비싸다.
하도 여행서와 블로거들이 멋있다 멋있다 해서 그리 숨이 막힐 정도로 감탄하지는 않았으나, 14000원 정도 낼 가치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금빛 찬란한 탑과 1971년 새롭게 축조한 여러 건물들과 한껏 서양식 멋을 낸 궁전보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역시 에메랄드
불상이 모셔져 있는 법당 안이다.
이곳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내 눈에 담아야 한다. 경내에서는 서 있으면 안 되고 모두 바닥에 앉아 있어야
한다. 사진 촬영도, 서는 것도 안 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야 하니 절로 경건해진다.
에메랄드 불상은 실제로 녹색의 옥으로 만들어졌는데, 1434년에 치앙라이에 있는 한 사원의 무너진 탑 속에서 발견되었다.
처음 발견한 스님이 초록색이 에메랄드 같다하여 이름을 그렇게 붙이셨단다. 원래는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없는 그냥 흰 석고로
만든 불상일 뿐 이었는데, 어느날 탑에 벼락이 떨어져 석고가 벗겨지면서 지금의 초록빛의 불상이 나타났단다.
에메랄드 불상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왕위 계승과 관련해서 방콕으로 갔다가 라오스로 갔다가 다시 방콕으로 왔으며,
라마 1세가 1778년 현 왕궁자리에 도읍지를 정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있게 됐단다. 왕위 계승과 등극과 관련해 자신의 정당성과
위엄을 돋우고자 할 때 무언가 신비롭고, 영광의 역사가 있는 전리품이나 발명품 또는 영험하게 여겨지는 물품이 함께 하는
것은 어디나 언제나 비슷한 것 같다.
그곳에서 성탄절에 나만의 절을 하며, 가족과 지인과 SOM의 안녕을 위해 마음 속 깊이 빌었다.
살살 걸어서 타티엔 선착장으로 갔다. 왓아룬(새벽 사원)을 가기 위함이다. 그런데 날씨는 더 힘겹다.
온몸이 지글지글 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연과 사람들과 햇볕과 습도는 정말 지치게
한다. 3밧 짜리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강을 건넜다. 이 배는 참 싸네 하고 생각하고 나면 도착이다. 그래서 3밧 이구나.
블로거의 글을 읽다 입구에 있는 40밧 짜리에 많은 분들이 낚인다라는 문장을 봤는데, 나도 낚일 뻔 했다. 얼굴 부분 구멍
뚫어놓고 사진 찍게 해 놓은 것이다. 나는 혼자 아이폰으로 셀카 한 장 찍었는데, 어린 여자 아이가 오더니 훠티밧인데 이런다.
얼른 재빨리 쌔앵 하고 걸었다. 휴우 다행이다. 아마 아이폰이라 이미 찍었는지 몰랐나보다.
왓아룬 입장료는 50밧. 역시 왓포처럼 허술하다. 표를 사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
마음 속으로 50밧의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왓아룬은 왓프라깨우에 비하자면 매우 단촐하다. 탑하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올라가는 길의 어려움과 내려가는 길의 아슬아슬함. 그리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맛은 있다.
꼼꼼히 본 다고 했는데, 2시간 30분 만에 관관을 모두 마쳤다. 혼자 다녀서 그런가 빠르다.
다시 3밧짜리 배를 타고 강을 건너, 53번 버스를 탔다. 얏호 이번에는 공짜다. 너무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 자다가 카오산로드로
나갔다.
페디큐어도 받았다. 방콕도 치앙마이 못지않은 기술이다. 정말 마음에 드는 털모자를 샀다. 마음에 딱 드는 모자가 여기 밖에
없어서 얼마 깎지도 못해 예상보다 비쌌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서 기분이 좋다. 커플 모자다. 겨울이면 더 머리가
시릴 건이 쓰기도 좋을 정도로 꽉 끼지도 않는다.
저녁으로 노점에서 야채 파인애플 볶음밥과 망고쉐이크를 먹었다.
내일은 방 보증금 빼서 어렵게 찾아낸 향을 사야겠다. 오늘은 거지다.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 말고는 홍대에서 먹을 만한
밥 한 끼 먹는 돈으로 하루를 산다. 이곳에서는 아주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는데, 내년 3월의 도쿄는 슬슬 걱정이다.
엔화가 좀 떨어져야 할 텐데.
첫댓글 태국 좋은나라...ㅋㅋㅋ 모자득템 ㅊㅋㅊㅋㅎㅎ
와우 멋져요 ㅎㅎ
셀카력 상승중이심...아 근데 밤에 먹는거 보니 배고파요. 아아..저런거 못묵은지 한 참 되었음...ㅠ.,ㅠ
태국처럼 따뜻한 나라에 털실모자를 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