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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지속 : 사라진 사람들을 위한 송가
김대현
사라져가는 것들에 익숙해지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세상은 이전에 곁에 있던 것들의 부재에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생의 활력으로 가득했던 자들이 사라진 자리는 어느새 다른 것으로 메워지고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슬픔은 스멀거리는 새로운 욕망으로 대체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는 끔찍한 사건은 그렇게 종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들의 자리를 여백으로 남겨놓을지언정 마지막까지 다른 것으로 봉합하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이미 종료되었어야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너의 결론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환원 불가능한 사건에 대하여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이야기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는 종료되어야 할 사건들에 대해 어떠한 효과적인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면서도 결코 망각과 타협하지 않으며 사건의 종결과 동떨어진 지점으로 스스로를 가둔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끊임없는 부정성의 생산, 어쩌면 이것이 시의 실체일는지도 모른다. 시가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사건의 합리적인 결론이 아니라 기억의 단절이기 때문이다. 시는 슬픔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킴으로써 사회를 관장하는 시스템의 이면 속에 근본적으로 누락된 어떤 것을 기어코 발견해낸다. 그래서 축적된 시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이며 후대에게 시대를 증빙하는 기록이 된다.
시의 본질이 기억 행위라는 주장은 이런 것에서 연유할지도 모른다. 시와 역사를 관장하는 여신들(Mousai)이 자매관계로서 그들의 공통된 어머니가 기억의 여신(Mnemosyne)이라는 이야기를 상기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거울을 덮어줘. 검은 얼굴이 자꾸만 흘러나와. 하지만 살아 있는 친구들이 장막을 걷고 있어. 빛이 쏟아지고. 나는 잠 없이 꿈속을 돌아다녀. 너는 내게 몇백 개의 거울을 깨버리라고 했지만. 아프리카 커피를 마시면서 물 없는 개천을 걷는다. 대기는 친구들로 꽉 차 있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붙어 있으면 서로 헷갈리잖아. 누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거울은 얼굴들로 꽉 차 있어. 아프리카에서 커피를 마신다면 어디가 덥혀질까. 지금은 밖보다 안이 더 추운 시간. 개천은 쓰레기들로 꽉 차 있어. 너는 내게 산책을 하자고 말했지. 그렇게 너는 침묵 속으로 떨어진다. 회오리바람이 잠든 곳에서 우리는 물 없이 걷는다. 이 꿈속은 왜 이렇게 좁은 거니? 너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너의 등에 업혀가야 하잖아.
그림자가 가득 찬 캠핑 텐트가 터질 듯이 팽팽하네. 못들이 바닥에 얼굴을 막고 있어. 너는 계속해서 떨어진다. 미안해. 병에 걸려서 장례에 실패했어. 속삭인다. 그렇게 너는 거울을 깨고 떨어지지. 이렇게 버려진 시신이 되면 신이 될 거 같아. 텐트는 넘쳐나는 그림자들로 기우뚱거리네. 살아 있는 친구들은 방수포를 펼치고 누워 서로 얼싸안는다. 이봐. 이렇게 가까이하면 너무 꽉 차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뒤바뀌잖아. 침냄새. 나는 거울처럼 바깥으로 얼굴을 흘리고 있지. 지금은 바깥보다 안이 더 죽은 시간. ‘친구를 돌려주세요.’ 쓰이지 않은 유서를 잘 접어 마지막 문장을 덮자. 이 비밀을 언제까지 파헤쳐야 나는 잘 수 있을까. 쓰레기가 넘쳐나는 개천에서 우리는 산책을 한다. 대기가 알 수 없는 어린 친구들로 꽉 차 있어. 물은 어디로 흘러간 것일까. 핏물이 빠지고 있다.
-이영주,「광화문 산책」(『문학동네』2014년 겨울)전문
거울을 마주하는 시간은 가장 사적이면서도 은밀한 순간이다. 평시에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나 자신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소한 변화는 발생하는 즉시 거울에 반응한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의 변화를 내가 만족할 때까지 잔소리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나와 거울 속의 나는 은밀하게 서로를 지탱해주는 관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모든 관계는 언젠가 더 이상 지탱 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거울을 응시하는 것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일 때가 그럴 것이다.
이영주의「광화문 산책」에서 죽은 자와 남겨진 자는 “거울”을 통해 만난다. 시에서 죽은 자는 자신이 죽은 것이라는 상황을 명료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애초의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죽음의 관념이란 무의 상태에서 홀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끔찍한 사건이 유래한 특수한 죽음은 다르다. 이 공간의 “대기는 친구들로 꽉 차 있”어서 “누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친구들과 함께 “잠 없이 꿈속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죽은 것을 인지하지 못한 자는 거울을 보는 것이 두렵다. 거울에서 그를 응시하는 것은 생기 넘치던 시절의 자신의 얼굴이 아닌 “검은 얼굴”로서 망자에게 죽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제야 자신이 처지를 깨달은 죽은 자는 “거울을 덮어줘”라고 요청하지만 “살아 있는 친구들”은 오히려 “장막을 걷고 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친구들의 등에 업혀 아직 현세에 남아 있다.
남겨진 자가 거울을 가리는 장막을 들추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천막으로 차려진 합동분향소엔 주인을 잃은 친구들의 그림자들이 넘쳐난다. 밤새 분향을 마치고 지친 “살아 있는 친구들” 또한 한 곳에서 죽은 친구들의 모양과 같이 한데 모여 서로 얼싸 앉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은 까닭이 어떤 필연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아서라는 걸 안다. 때문에 그들 또한 산 자와 죽은 자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남겨진 자들은 자신이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 죽은 친구들이 도대체 왜 죽어야 했는지를 밝혀내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친구들을 보내지 못한다. 그래서 남겨진 친구들은 한 때 자신의 얼굴과 같았던 죽은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가린 장막을 들춘다. 결국 그들은 사건을 종결시키려는 죽은 자들의 “장례에 실패”하고 그들이 살아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 파헤쳐야”하는 “비밀”을 통해 잠 없는 꿈속에서 그들의 죽음을 끝없이 유예한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두렵지 않던
사방이 안개가 지천이던
두 발과 날개 달린 어깨가 허공에 떠올랐던
눈치라는 물건을 욕지거리쯤으로 생각해버린
방정맞게 아름다운 춤을 추는 열여덟 너의 애인에게
그리하여 높이 떠있는 너의 옷자락에 흠집이라도 내리라던
투명망토를 두른 고깔 쓴 사춘기라야만 가능했던 너의
푸드득거리는 그림책을 씹어 먹는 상상을 하고
주머니 속 돌멩이를 아빠에게 던지는 포즈를 취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너의 몸에 꽃무더기 휘날릴 수 있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계단 입구에서 쪼그려 담배를 피우는 너의
그림자 극장이었던 사춘기 속으로 들어가자
그것은 다만 유령이 된 사춘기일 때만 가능한 일
그것은 다만 기억이 된 사춘기일 때만 가능한 일
그것은 다만 사춘기여야만 하는 사춘기의 시절
침묵이 쌓이는 시간들 네가 없는 어리둥절한 시간들
밥 한 끼 먹으려했던 너의 사춘기로 되돌아가는 시간들
한쪽 벽면에 교복이 거짓말처럼 박제되어 있는
-유현아,「또 다시, 사춘기」(『작가들』2014년 겨울)전문
어떤 사건에 의해 사라진 자들이 그림자로 귀환하는 것은 유현아의「또 다시, 사춘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자는 주인 없는 그림자들이 연극을 공연하는 “그림자극장”을 통해 자신의 “사춘기”를 언제까지나 향유한다. 아직은 많은 것을 모르는 시절, 안 보여서 모르고 덜 자라서 두려움이라는 것을 모르는 시절, 그리고 그로 인해 모든 것에서 일탈할 수 있는 향기로운 시절을 말이다.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으며 가장 행복한 시절에 고정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의무 없는 특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곧 어떤 위화감을 가져다주는데, 주인 없는 그림자라는 존재가 그럴 것이다. 그림자가 주어지는 근원적 방식은 신체에 의존한다. 그림자는 빛과 신체사이에서 발생하는 2차적 부산물이다. 그러므로 신체 없는 그림자라는 존재는 부재하는 원인에 의한 것으로써 인과율을 위반하는 모순된 존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규정은 신체 없는 그림자보다 조금 익숙한 하나의 관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바로 유령이다.
유령은 신체 없는 정신으로써 신체와 정신이 불일치한 상태를 의미한다. 오로지 기억만을 간직한 그것은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난’ 지점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신체를 찾아 언제까지나 방황한다. 그러기에 유령은 “네가 없는 어리둥절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 한다. 하지만 어긋난 공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어긋난 존재가 현실의 존재에게 인지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결국 신체 없는 그림자가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유령이 된 사춘기”이며 다른 사람의 “기억이 된 사춘기”에 한정된다. 특권은 어디에서나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유령의 존재는 마치 “한쪽 벽면에” “거짓말처럼 박제 되어있는” “교복”처럼 언제까지나 쓸쓸히 그 안에 고정되어 있다. 산자와 남겨진 자가 만날 수 없는 공간에서 “침묵이 쌓이는 시간들”은 계속해서 누적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령일뿐
깊게 출렁이며 흘러가는 강물의 그림자도
만나지 못한다. 대낮의 백양나무와
삼나무 그림자 속에도 들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뿐
두통과 불면의 밤을 지나온 유령일뿐
서로의 그림자 속에 들지 못하므로
우리의 대낮과 밤 속에는 태양도 별빛도
서로의 그림자를 만들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
유리잔 속에 떠도는 몇 모금의 상념일 뿐
연기로 부유하는 흐린 영혼의 구름일 뿐
우리는 서로에게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므로
꿈꾸어도 죽어가는
꿈꾸지 않아도 사라지는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
몇 번의 혼숙과 합숙의 날들 속에서도
새벽닭이 우는 희부윰한 들판을 바라보며
가야할 곳의 몰락과 몰락의 지평선을 아득히 바라보는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이어서
빛과 어둠의 상처를 보듬지 못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지 유령일 뿐
눈물의 가장 깊은 그림자를 만지지 못한다
아무런 상처의 그림자도 만들지 못한다
-리산,「프리미어리그의 세탁부들」(『애지』2014년 겨울)전문
비록 한정된 시간에 제한되긴 하지만 유령이 언제나 특권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유령들은 그 반작용인지 권리 없는 의무만 가지기도 한다. 리산의「프리미어리그의 세탁부들」 또한 자신의 실존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유령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유령은 우리가 고전적 감성으로 상상하는 유령과는 조금 다르다. 이전의 유령이라는 관념이 부재하는 신체에 실존하는 정신이었다면, 현대의 자본에 의해 발생하는 유령은 그 반전된 요건으로써 영혼 없는 신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전적인 유령과 다르게 사람들의 시각에 물리적인 실체로 명확히 인식된다. 하지만 이들이 고전적인 유령에 비해 더욱 대접이 좋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유령이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점에 있다. 대개의 두려움은 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 하지만 먹고 자고 배설함으로써 우리에게 명백히 인식되는 유령이란 참으로 무능하다. 아무런 적의도 공격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자신의 무력한 신체를 최소한의 방어 수단 없이 백일하에 드러내는 유령이란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가. 사람들에게 어떠한 두려움도 주지 못하는 유령은 유령으로서도 실격이다.
최고의 프로축구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서 노동하는 청소부들도 이런 존재에 해당한다. 그들은 수억 명이 지켜보는 리그의 매 경기마다 “몇 번의 혼숙과 합숙의 날들”을 거쳐 나름의 방식으로 참여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리그의 곳곳에서 부유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생성되는 환호와 탄식은 결코 그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저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삶일뿐, 삶을 자신의 의식이 지향하는 목적으로 삼지 못한다. 그렇게 “꿈꾸어도 죽어가는/꿈꾸지 않아도 사라지는” 존재로서 그들은 영혼이 거세된 살아있는 주검으로 인식되며 세계 속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잊혀 간다.
“대신 살아드립니다”라는 광고를 보고 그를 찾아갔다. 당신이 당신이라는 증거를 가져왔습니까? 그가 벽 속에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좋습니다. 당신은 당신이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를 벗겼다. 내 얼굴을, 발을 입은 그가 뚜벅뚜벅 벽 밖으로 걸어나갔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가 돌아왔다, 구멍에 빠진 사람들이 말을 겁니다. 벽을 따라 걸으면 하나, 둘, 셋, 입이 반복되고 벽에 입을 넣고 입을 읽으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 때문에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귀를 자르겠습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내 귀를 벗었다.
다음 날, 그가 다시 벽 속으로 들어왔다. 이 가죽 속에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죽지도 않고 밤마다 당신의 내장을 긁어대고 있습니다. 이 가죽은 그들의 집입니다. 따갑습니다. 그러니 이 가죽을 벗겠습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그는 가죽을 벗었다.
그 다음날 그는 말했다. 모든 문제는 이 머리에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머리를 죽이겠습니다. 열이 나는 머리. 형광등과 컵과 안경의 생각을 생각하는 머리를 죽이겠습니다. 머리 때문에 시키는 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내 머리통을 부쉈다.
오랫동안 그는 오지 않았다. 벽 속에서 나는 남겨진 사람들과 놀았다. 벽 속을 떠돌다가 버려진 광고판을 발견했다. “대신 살아드립니다”라는 광고를 붙였다. 한참 후, 그가 처음 보는 몸을 입고 벽을 두드렸다.
-손미,「광고」(『내일을 여는 작가』2014년 하반기)전문
세계에 의해 실존을 의심받는 사람들은 손미의「광고」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인물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자신이 자신의 원본성을 확신하지 못할 때 오히려 자신임을 승인받는 사람과, 그의 삶을 대체하려는 사람. 그리고 그 과정을 관찰하는 주변 인물들이 시 속의 구성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로의 역할을 순환하여 교대한다는 점에 있다.
스스로의 삶이 진정함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을 인계한다. 타인의 삶을 인계받은 사람 또한 그와 같은 처지라는 것을 추론하기엔 어렵지 않다. 결국 그는 타인의 신체를 쓰고 벽 속에서 나가지만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돌아와 인계받은 신체의 일부를 차츰차츰 탈착하고 마침내 그를 압박하던 타인의 “머리통을 부”숨으로써 다시 원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그는 어느 날 “대신 살아드리겠습니다”라는 익숙한 광고를 보고 그의 삶을 포기하기 위해 벽으로 찾아온다.
그럼으로써 이 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순차적으로 무한히 회귀한다.“벽 속에” 거주하는 실체가 모호한 삶은 다시 타인의 삶을 살아가길 욕망한다.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가 다시 그와 모호한 삶을 교대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로도 탈출할 수 없는 벽이라는 불길한 공간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신체와 욕망을 복제한다. 하지만 애초에 원본이 확인되지 않은 복사물을 복제한 그들의 삶은 복제의 과정이 진행될수록 자신의 삶에서 멀어져 갈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서히 자기 자신을 지워간다.
아, 어쩌지 일기를 마저 없애버리는 걸 깜박했다 머리에서 끈적한 것이 흘러내리네 목은 아마 꺾어진 것 같은데 어쩌지 삭제하지 못한 최근의 문서들이 하필 이 순간에 떠오르다니
누가 그걸 읽으면 안 되는데, 다시 화면을 거꾸로 돌려 저 위로 휙 날아오를 수 있다면 다 말끔하게 처리하고 올 텐데, 아 그나저나 누가 나를 빨리 발견이라도 하면 어쩌지
내가 보았던 죽은 사람들은 정말 죽었던 것일까 그들은 왜 내게 찾아와 아무 말 없이 어슬렁거리기만 하다 돌아간 걸까 나는 조용히 이대로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
아, 누가 내 일기를 좀 불태워다오 빈틈없는 죽음이란 없는 거구나 허술한 죽음만이 죽음 같구나 아, 어쩌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 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 말을 너무 오래 아껴두었구나
그토록 오래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이제야 이해하겠다 용서할 수 있겠다 그대가 누구인지 알기도 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로 했구나 삶이여, 이제 나는 없다 그러니……
-조용미,「슬픔의 연대기」(『문학과 사회』2014년 겨울)전문
조용미의「슬픔의 연대기」는 스스로의 삶을 지우기 위해 고층에서 추락하는 자가 땅에 충격하는 찰나의 순간에 떠오른 단상들을 기록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때 행해지는 단상들이 이성의 구속에 구애 받지 않고 의식의 흐름으로 자동기술 되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이 시는 몇 가지 합리성을 배반하는 이미지를 구현한다. 예컨대 시작은 일기를 마저 없애지 못했다는 사춘기 소녀와 같은 조금은 천진한 고민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진술은 시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전복시킨다. 고민의 당사자의 머리가 현재 지면과의 충돌로 인해 박살난 상태이며 목은 꺾어진 끔찍한 상태라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당사자는 잔혹한 현실이 마치 남의 일인 양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내면을 가벼운 목소리로 진술한다. 트랜스상태에서 행해지는 상이한 두 이미지의 병치는 시를 읽는 이의 감정을 혼란스럽게 한다.
동시에 시에서는 모순된 욕망이 교차로 진술된다. 한 가지는 “이대로 흔적 없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남은 한 가지는 남겨진 자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은 것이 그렇다. 두 욕망은 하나가 이루어지면 남은 하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다시 논리적 난점을 이룬다. 하지만 두 욕망의 승패는 의외로 쉽게 갈라진다. 삶을 살았던 사람이 생에 아무런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납득해버렸기 때문이다. 상호배반관계에서 한 욕망이 불능이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욕망은 참으로 결정된다. 배반으로 점철된 이 시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진의를 표명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이 시는 다시 또 하나의 반어를 남긴다.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자가 생의 마지막에서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는 서인이 마무리 짓지 않은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든 복원할 수 있겠다. 새로운 계절의 시들을 이야기한 이 글의 결론 또한 동일하다. 마치 까뮈의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은 그 말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그러니…… 그대 부디 살아라.’
필자 약력
김대현. 문학평론가. 2012년『실천문학』평론 신인상 수상. 현『리얼리스트』『삶이보이는 창』등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