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
7항그 밖의 인류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베풀기도 하고 베풀지 않기도 하는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 뜻의 결정을 따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주권적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시고 그들의 죄로 인한 수치와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하기를 기뻐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하기 위해서이다.
8항 지극히 신비한 이 예정 교리는 특별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계시 된 하나님의 뜻에 주의하고 그것에 순종함으로 그들의 유효한 부르심의 확실성으로부터 자신의 영원한 선택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되면 이 교리는 복음을 신실하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경외와 찬양을 드리게 하며 겸손과 근면함과 풍성한 위로를 줄 것이다.
1. 구원의 확신
누군가 구원으로 선택을 받았다면 누군가는 버리도록 선택된 것입니다. 이 버리는 것을 ‘유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 버릴 자들을 적극적으로 작정하신 걸까? 아니면 단지 버릴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고 내버려 두시기만 한 걸까? 이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확실한 건 누군가는 선택되었다면 그렇지 않은 자는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고 이 결정에 대해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기될 자를 사랑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분명히 전제하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럼에도 왜 버릴 자가 있게 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숙고해 보면, 우리는 알지 못하나 어딘가로부터 도덕 악이 발생했고 그 악에 대해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의 판단자이십니다. 누군가는 은혜를 베풀고 누군가는 버리기로 하신 건 하나님의 주권이고 하나님이 자기 것을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은 옳고 의로운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악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연악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분명합니다. 자연악은 도덕악이 원인이었습니다. 여기 도덕악이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금한 선악과에 대한 범과, 즉 죄가 자연악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도덕악,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행동, 이 악이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고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의 순종, 그 여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유기에도 바로 이 점에 대해 역사적 의미와 영원한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역사적으로 버려진 것 같으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되고 이방인은 버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안에 이방인들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방인으로 버려진 자들이었고 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께 접붙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넓은 범주에서 그러하고 좁은 범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버려진 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영원한 선택을 받은 자로 입증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 점으로 인해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경고합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그래서 선택과 유기에 대한 예정은 지극히 신비해서 매우 조심히 다루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점들이 실천적인 신앙에 있어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선택과 유기가 역사적 상황에서 변할 수 있는 이 점으로 인해 구원에 대해 확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역사적 상황에서 변하는 것으로 인해 더 구원에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 “하나님 말씀에 계시 된 하나님의 뜻에 주의하고 그것에 순종함으로” 구원의 확신은 말씀을 주의하고 순종하는 것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내가 예수 믿는다는 믿음 혹은 신념으로 지니면 안 되는 겁니다. 물론 이것도 확신 안에 포함되나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이 아니라 자기 신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에 주의하고 순종하고자 한다는 건 그 부르심이 효력 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악 된 본성과 싸우며 말씀에 주의하고 말씀을 순종하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로 된 것인 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겸손해지며 말씀과 기도와 예배에 부지런해지며 어떤 상황에도 위로를 얻습니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련의 일들을 목격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구원의 수단마저 작정하신 대로 나에게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스스로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거짓된 확신이나 자기 신념이 아닌지에 대한 염려로 인해 확신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확신이나 신념의 상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낫고 그 자체가 구원받은 자라는 또 다른 확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창조에 관하여
1항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영원한 능력, 지혜,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초에 무로부터 세계와 그 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 모든 게 지극히 선하였다(심히 좋았다).
1. 창조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드러나 있습니다. 진선미, 지극히 참되며 선하며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만물이 지어졌고 그 가운데 사람은 꽃과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창조가 있기 전 그 어떤 것도 없는 無의 상태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 외에 존재가 없었다는 뜻인데 우리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기 무의 의미는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물질과 공간과 시간에 종속된 분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와 같지도 사람과 같지도 않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으나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지극히 탁월한 점으로 인해 “하나님은 영이시다.”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6일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과학의 시각으로 볼 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엄밀한 과학적 계산으로 본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창조의 시간은 말이 안 되게 짧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말씀이 허구인 걸까요? 창조과학은 이 문제를 과학으로 해결해 보려 합니다. 그런 시도들이 가치가 없다 볼 수 없지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학을 배척하려 한다든지, 또는 과학을 신봉하려 한다든지 하는 태도를 지니면 안 됩니다.
성경의 6일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날과 같은가? 여기에는 누구도 답할 수 없습니다. 6일에 대한 날의 의미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24시간으로 볼지 아닐지의 여지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렇지 않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본다면 과학적 계산과 너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천날이 하루와 같고 하루가 천날과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적 법칙을 뛰어넘어 역사하신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에게는 그만큼의 시간 계산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성경의 6일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루의 24시간이 아니라 해서 달라질 게 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과학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 세계의 주인인지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과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은 진실은 될 수 있습니다. 진실이란? 제한적 상황에서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거나 사실관계가 더 밝혀지면 진실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진리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실관계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만이 오직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과학을 진리로 여기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과학은 끊임없이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에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 불변하는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현상을 설명할 뿐 현상 너머에 있는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과학은 어떻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지만 왜? 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화론도 다른 어떤 과학이론도 다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입니다. 좋았다는 말은 선하다는 말입니다. 심히 선하다는 것은 그 어떤 악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을 더럽히고 죄로 얼룩지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해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 자기 집을 빌려주었더니 그 집의 귀한 걸 다 부숴 버리고 오물로 뒤덮어 버린 것과 같습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러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질문
1.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있다면 왜 확신합니다. 없다면 왜 확신하지 못합니까?
2. 당신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성경적일까요? 아닐까요?
3. 당신은 과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있습니까?
4. 하나님이 지으신 선하신 세계를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