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수거
박갑순
“갑순, 좋아할 만한 책꽂이 분리수거장에 있네.”
평소 다양한 가구들을 주워다 재사용하는 모습을 보아온 지인이 보내온 톡이다. 집 안을 스캔하듯 샅샅이 살펴보니 소품 하나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그럼에도 얼른 밖으로 나갔다. 색칠하지 않아 나무의 색감 그대로인 원목 책장이 말끔했다. 뒷면 옆면까지도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고 탄탄했다. 2년 전에 가져다 사용하는 책장의 크기와 비슷해서 교체하여 사용하면 딱 좋겠지만, 공사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 아쉬운 마음을 접고 돌아서야 했다.
이렇게 나와 인연을 맺은 물건들이 많다. 크고 작은 책장이 네댓 개나 되고 탁자와 식탁과 의자도 여러 번 교체하여 사용 중이다. 형님 댁에서 잘 쓰지 않아 버리겠다고 했던 전기 매트와 유선 청소기, 매일 사용하는 식기류들까지 하면 여기저기에서 수거해 온 품목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어렸을 적, 한마을에 사는 네 살 연상 언니가 입던 옷은 작아질 때면 어김없이 내게로 왔다. 남이 입던 옷을 입었다고 친구들이 가끔 놀리기도 했지만 창피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엄마가 명절 앞두고 사다주는 옷보다 고급지고 예뻤기 때문이다. 새 옷 살 형편이 되지 않으니 엄마는 시장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구제옷을 사오셨던 것이다. 가끔은 옷의 흰 부분이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것도 있고 치맛단 올이 풀려 실 가닥이 길게 매달린 옷도 있었다. 누가 입었는지도 모르는 그런 옷들보다 예쁜 언니가 입었던 옷이니 내게는 설빔이었다.
재사용하는 것이 몸에 익은 탓일까. 멀쩡한 것들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까지 든다.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인연을 억지로 끊어버린 것 같다. 책장은 주인이 세워둔 위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을 뿐일 텐데. 이사한다고, 새것으로 바꾸기 위해 야멸차게 분리수거장으로 내쫓기는 것이 어디 사물에만 해당하겠는가.
인간관계도 친밀도에 따라 순위를 매긴다면 영순위인 그녀와 형제지간보다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건 이십여 년 전쯤의 일. 삶이 닮은 데가 많아서 서로 더 끌렸던 것일까. 매일 만나고 수시로 통화하고, 틈만 나면 가까운 곳으로 바람을 쐬러 다니고 정말 연인처럼 지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왠지 전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일까 아무리 곱씹어봐도 짐작되지 않았다. 그냥 가벼운 톡을 보내도 읽은 후 며칠 만에 건조하고 짧은 답만 왔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부재중을 확인하고도 전화가 없었다. 그냥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다시 전화를 시도한 끝에 통화가 되었고,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정말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점 때문에 섭섭했노라는 말만 했어도 즉시 해명해서 골이 그토록 깊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눈물로 설명하고 사정해서 겨우 금이 간 관계에 땜질을 했다.
나는 오래되어 낡은 물건도 쉽게 버리지 못하고 한번 맺은 인연도 쉽게 놓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한번 깨진 바가지는 수선해도 소용이 없다고 했던가. 다시 어떤 일로 관계가 꼬였다. 몇 번 톡을 보냈더니, 이제 편히 쉬고 싶다고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답이 왔다. 나는 언제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마음이 편안해지면 연락 달라는 답문을 보내고 불통 중이다.
한동안 내가 버려진 책상 같았다. 원하는 공간에 놓인 순간부터 버려지는 순간까지 책장은 소임을 다했을 것이다. 소중한 관계를 잘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아무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수거장으로 쫓겨난 책장은 얼마나 쓸쓸하고 서글플까. 책장은 본래 주인과 연을 끊고 다른 주인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저 처분만 바라다가 내쫓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내 모습인 듯하다. 주인도 오래된 인연에 쉼표를 찍고 쉬고 싶었을까. 내가 소각장으로 실려가 흔적 없이 사라질 것만 같다.
인연의 관리를 생각해본다. 가끔은 마음의 창고를 뒤적여 끈끈한 정도에 따른 분류를 해야 할 것 같다. 진정으로 오래 갈 인연, 대강 가볍게 지내야 할 인연, 아예 쓰레기장에 내다 버려야 할 인연.
2,000여 개의 전화번호가 저장된 휴대폰을 뒤적인다. 몇 년째 톡을 보내도 답이 없는 인연도 있고, 내가 보내는 톡에는 꼬박꼬박 답을 하는 인연도 있고, 내가 하기 전에 먼저 안부를 물어주는 인연도 있다. 십 년 넘게 연락 한 번 오가지 않는 사람의 번호도 폰에 저장되어 있다.
오늘은 과감하게 낡고 오래된 것들, 크게 소용이 없는 작은 물품 몇 가지를 내다 버렸다. 맘먹은 김에 휴대폰의 인연도 분리수거를 한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연락되지 않은 번호를 과감하게 버리고, 언젠가는 소용이 있을 것 같은 번호는 확인하고 다시 저장한다.
늦은 오후 한가한 바람이 시원하다. 왠지 쓸쓸한 마음을 다독이며 밖으로 나가니 분리수거장에 멀쩡한 행거가 있다. 순간 반짝이는 눈빛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저것을 가져다 어디에 놓고 사용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