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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소설 창작 방법론
1. 잘 읽어야 잘 쓴다.
이승우 | 2003-03-01
너무 당연해서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쓰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읽어야 한다. 잘 쓰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잘 읽어야 한다. 잘 쓰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잘 읽은 사람이다. 자기가 경험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100권도 모자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을 흔하게 본다. 우리는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 사람이 100권 이상 분량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읽지 않고 살아 왔다면, 단 한 권도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이다.
경험이 없이도 쓸 수 있다. 그가 읽어 왔다면.
하지만 읽지 않고는 쓸 수 없다.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경험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읽기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소설을 쓰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환영할 만한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최소한 이 정도는 읽었어야 할 책들을 읽지 않았거나 아예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은 환영할 만한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읽지 않고, 읽는 건 무시하고 쓰기만 하겠다? 글쎄, 나는 믿지 않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아마 천재일 거다. 천재들에 대해서는 나는 할 말이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천재들이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쓰기가 특별한 재능을 타고 태어난 유별난 신분의 사람들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니다. 예컨대 한 몇 개월 학원 다녀서 딸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몇 개월 테크닉이나 배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소설쓰기가 테크닉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어떤 점에서는 따로 배울 테크닉 같은 게 없다는 것이다.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소설 창작 방법에 대한 모든 것은 소설 속에 들어 있다. 백 명의 작가에게 물어 보라. 당신은 소설 공부를 어떻게 했는가? 백 명 모두 소설을 통해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소설 창작의 교과서가 따로 없다. 좋은 작품이 곧 교과서이다. 그러니까 소설 창작 방법론의 첫장은 읽기이다.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만이 잘 쓴다.
느리게 읽기
잘 읽는 방법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느리게 읽기이다. 속독의 유용성에 대한 코멘트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또 속독이 유용한 것도 사실이다.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고 더구나 정보의 확보가 곧 경쟁력인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정보를 얻거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독서일 때 이야기이다. 정보를 얻거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사람은 없다. 정보나 지식을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소득일 뿐이다. 백과사전이나 전문 서적을 읽는 편이 정보와 지식의 습득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하나마나한 소리이다.
느리게 읽기가 빨리 읽기보다 더 어렵다는 건 느리게 읽기를 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은 마치 오래 밥을 씹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고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의 페달을 아주 천천히 밟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음식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려 하고,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고 자전거 페달을 느리게 밟다 보면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하루에 책을 여러 권씩 읽어내는 사람은 존경스럽지만, 만일 그 사람이 소설쓰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쓰기를 원하는 사람이 소설을 그렇게 읽는 것이라면, 그것은 백해무익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그다지 좋은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미 작가가 된 사람들 중에는 선배 작가들의 좋은 소설을 여러 번 베껴 썼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베껴 쓰기 자체에 무슨 마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느리게 읽기의 한 방법이기 때문에 추천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꼼꼼하게 천천히,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심지어 문장 부호 하나에 집중하는 책읽기. 단어와 문장, 심지어 문장 부호 하나하나의 쓰임새를 음미하는 책읽기. 소설쓰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소설을 아주 천천히 꼼꼼하게 읽고 있는 사람은 이미 소설쓰기를 시작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생략한 사람은 지금 무언가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소설쓰기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다.
2.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2003년 4월 1일.)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마이크를 잡는다. 할 말이 없는 사람은 마이크를 잡을 이유가 없거니와 실은 잡아서도 안 된다. 할 말이 없는 사람의 마이크는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세상과 인간에 대해, 세상과 인간을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한다는 것이다. 할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말을 할 욕구를 느끼지 않고, 따라서 소설을 쓰지 않는다.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근원적으로 소설가는 자발적인 이야기꾼이다. 누군가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기 때문에, 남들이 듣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할 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소설가가 된다. 어떤 작가는 한 편의 소설을 쓰고 나서, 바로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 있어야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소설을 쓰려는 욕구를 느끼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가 말을 만들고 소설을 쓰게 한다. 이청준은 그것을 복수심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지배와 해방-언어사회학서설3).
소설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이론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거울은 사물을 비추되
거울 자신의 욕망과 의도에 따라 비춘다. 욕망도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은 거울은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다. 그럴 의욕이 없기 때문이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거울이 이 세상에 대해 불만과 의혹, 욕망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소설은, 어떻게 말하든 소설을 쓰는 사람의 세계 해석이고, 그 해석의 뿌리는 그의 욕망과 의도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겠다고 하면서 무얼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쓸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소설을 쓰겠다는 의욕을 느낄까? 그저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러면 그는 왜 소설가가 되고 싶을까? 소설가가 무슨 대단한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라는 건 다 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소설을 쓰겠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말이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소설을 쓰기 때문에, 쓰는 동안 소설가로 불리우는 것이다. 무얼 쓸지 모르겠는 사람은 쓸 것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무얼 써야 할지 모르면서 무언가를 쓰는 것은 할 말도 없으면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것과 같아서 당사자와 주변을 짜증나게 하기 쉽다.
우선 하려고 하는 말은 절실한 것이어야 한다. 적어도 누군가 들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그런 요청이 결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크기나 무게가 아니라 깊이이다. 말을 하는(소설을 쓰는) 사람이 자기가 말하려는(쓰려는) 내용을 얼마나 핍절하고 간절하게 여기고 있는가이다. 자기 자신도 절실하지 않은 이야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에 귀기울일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그러기 전에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내용에 성의가 더해지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제 꼴을 갖춰 풀려나갈 가능성도 없다고 해야겠다. 그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절실한 것은 어디에 있을까? 다는 아니지만, 그것의 한 처소는 기억이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퇴적이 아니고 편집된 과거이다. 편집의 과정에는 잘라내기와 붙여쓰기와 축소와 과장과
오려붙이기가 포함되어 있다. 치명적인 기억은 과장되어 있을 수도 있고 잘라내졌을 수도 있다. 때로는 드러내기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말할 때, 소설로 쓸 때 신중해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또한 하려고 하는 말은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소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이다. 이미지가 아니라 물질이다. 아무리 고상한 사상이나 관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구체를 얻지 못 한다면 소설이 되기 어렵다. 이미지는 시로 족하고 사상은 철학을 만족시킨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들, 이미지나 사상,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혼에 다름 아닌 그것들에 실체를 부여하는 육화(肉化)의 과정이다. 막연한 것, 추상적인 것, 모호한 것,
자기 자신도 아직은 무언지 확실하지 않은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소설을 시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써나가다 보면, 지금은 모호하고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양인가가 만들어지겠지, 어떻게 되겠지, 하고 기대하지 말라. 어떻게 되지 않는다.
3. 발상에서 소설이 태어난다. (2003년 5월 1일.)
나무는 씨앗에서 태어난다. 식물의 씨앗 속에는 뿌리와 줄기와 잎이, 가능성의 형태로 이미 들어 있다. 씨앗 속의 뿌리가 나무의 뿌리가 되고 씨앗 속의 줄기가 나무의 줄기가 되고 씨앗 속의 잎이 나무의 잎이 된다. 소나무는 소나무 씨에서 나왔기 때문에 소나무이고 잣나무는 잣나무 씨에서 나왔기 때문에 잣나무일 수밖에 없다.
씨는 미래의 나무를 품고 있다. 겨자 씨를 뿌려 놓고 야자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야자수 씨에서 겨자가 나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자연의 법칙은 그렇게 막무가내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발상은 소설의 씨앗이다. 씨앗이 미래의 나무를 품고 있는 것처럼 발상은 한 편의, 훌륭하거나 시원찮은 작품을 품고 있다. 소설 창작이 자연 법칙에 충실하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연 법칙에 어긋나지는 않는다.
일기조차도 제 스스로 쓰지 못 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날 경험했던 일 가운데 인상적인 것을 선택해서 쓰는 것이 일기이다. 그런데 무얼 써야 할지 몰라서 자기 엄마에게 물어 보는 아이들이 꽤 많다고 한다. 아이 엄마가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잖느냐, 그걸 써라, 하고 알려 주면
아, 그래, 그걸 써야지, 한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쓸거리를 제공해 주는 그 자상한 어머니의 태도는 바람직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글쓰기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찾고 궁리하고 선택하는 것부터가 글쓰기이다. 아니, 그 단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글의 성격과 수준과 성향의 상당 부분이 이 단계, 즉 발상의 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발상이 차지하는 비중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일기는 아이의 일기가 아니라 아이 엄마의 것이다.
이걸 소설로 쓴다면 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소중하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 세상에 씌어진 모든 좋은 소설들의 작가는 그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이 세상에 씌어지지 않았거나 씌어졌으되 시원찮은 모든 소설들의 작가는 그 순간을 소중하게 포착하지 못 했거나
아직 그런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물론 과장해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순전한 과장만은 아니다. 나무를 품고 있지 않은 씨는 없다. 정해진 발상법이 따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모티프를 찾는 방법이 다르고, 또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쓴 모든 작품의 발상법이 다 똑같으란 법도 없다.
책을 읽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르기도 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이걸 써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행에서 겪은 어떤 일이 모티프를 제공하기도 하고, 신문 한 귀퉁이에서 읽은 어떤 기사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중에, 혹은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는 중에 그럴 듯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도 있다. 화장실에서, 만원 버스 속에서, 심지어는 꿈에서 깨어난 직후에 그런 단서가 떠오르기도 한다.
우리의 머리 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매우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은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영감처럼 떠오른 것들은 또 그만큼 쉽게 잊혀지기도 한다. 뭔가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올라서 흡족해했다가 나중에 그걸 되살려 보려고 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속상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나 자료를 메모해 두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다. 주변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다 소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을 썼다고 해서 다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그러나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착상의 단서를 잡아내는 일이다. 거미줄을 친 거미만이 잠자리를 잡는다. 사물과 현상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지속적인 독서와 사유(나는 그것을 문학적 자장이라고 표현하는데)를 유지하는 사람이 소설의 씨앗을 찾아낸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만만하지 않은 것처럼 소설 역시 만만하지 않다. 좋은 소설을 얻기 위해서는 소설의 자장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자장 안에서 놀아야 한다.
20년 동안 소설을 써 온 작가도 좀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고 있으면 소설 쓰기가 어려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걸 잘 만지면 소설이 되겠구나 싶은 착상이 잘 떠올라 주지 않아 버린다. 그럴 때는 기분이 참담해진다. 그런 참담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소설을 생각하고 소설 쓰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소설을 쓰다 보면, 쓰고 있는 동안 또 다른 발상들이 나를 찾아온다. 소설 쓰기를 계속하는 한 소설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