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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선한 창조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은 세상의 창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의 화해, 약속된 세상의 갱신과 완성으로 나타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베푸심과 자비하심이 드러난다.
기독교 신앙과 생태학적 위기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른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라고 명령하셨다는(창 1:26) 말씀에 기인하여 무자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이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였다고 정당화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고 있다. 역사가 린 화이트는 기독교가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에 대하여 '엄청난 무게의 죄책감’을 지고 있다는 결론을 지었다.
<기독교 신학과 교회에 제기하는 생태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들 >
1. 인간 중심주의-세계가 우선적으로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간주하다는 견해이다.
2. 지배로서의 권력-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고 그러기에 과학의 임무는 자연으로 하여금 비밀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 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와 같고 권력을 지배로 이해하는 견해가 서구의 과학과 기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였다.
3. 상호연관성의 부인-인간 중심주의와 지배로서 권력 개념은 모든 형태의 생명의 상호 연관성과 상호 의존성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부인하고 자 연계의 가치란 오로지 인간에 대해 갖는 효용적 가치일 뿐이다 즉 인간만이 전부라는 태도이다.
4. 인간의 목적을 위해 천연 자원이 무한하고 재생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가정
5. 고삐 풀린 소비 지향 주의-'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슬로건의 관점에서 보면 지상 최대의 목적은 세계 재화를 최대한 많이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이며 어떤 사회의 통제되지 않는 소비는 광범위한 지역을 빈곤과 기본적 필수품조차 부족한 극빈 상태로 만든다.
창조에 관한 성경 증언의 재해석
성경은 창조, 화해,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다른 피조물을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로 기술하고 있다. 창세 때 하나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해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하신 말씀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귀히 보시고 모든 것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인간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권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자연을 보호하도록 위탁받은 현명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신실하게 돌보고 다스리시는 은혜로운 통치 방식을 닮아야 한다. 그 전거로 동물과 땅이 정기적으로 쉬는 희년을 누리는 율법이 제정되었다.
창조론 주제의 재고찰
기독교창조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비추어서 전개되어야 하며,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주제들에 주의를 기울이며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창조론의 주제들>
1. 하나님을 창조자로 세상의 모든 것을 피조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타자성, 초월성, 주권성을 확증한다는 뜻이다.
창조는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행동이며 타자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와 나눔과 생명을 공유하고 환대하는 모습이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안에 근거하며 이 모습은 창조 행위에서도 넘쳐흐른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 자기 겸손, 자기 제한이다. 에밀 브룬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도달한 자기 비움은 세상의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라고 썼다.
2. 세상 전체와 개별적인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듦과 같이(사 40:6)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지도 지속될 수도 없는 비존재의 경계선상에서 살아간다. 프리드리히 쉴라이에르마허는 이것을 ‘절대적’ 의존‘의 보편적 감정이라고 하였으며, 루돌프 오토는 ’ 피조물 감정‘이라고 불렀다.
3. 창조는 모든 우연성, 유한성,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선하다는 것이다.
창조가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이원론(대표적으로 마니교)을 배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일부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우리에게 유용한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는 완벽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전과 위험과 성장이 피조물의 일부이라면 고통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선한 창조 안에 있는 ‘그늘진 면’ 이 있을 뿐이다. 창조가 선하다고 해서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이 세계가 타락했으며 구원될 필요가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4. 모든 피조물은 철저한 공존성과 상호 의존성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
5. 창조자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도 역동적이고 목적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창조세계의 해방의 목적은 구속으로부터의 외적 자유인 동시에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과의 교제의 삶이 주는 내적 자유이다.
삼위일체, 창조, 생태학
<기독교 신학과 생태학 문헌들에서 나온 접근법>
1. 변증법적 접근법-기독교가 생태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에 맞서 기독교 신학을옹호하고 반박하였지만 전통을 갱신하고 개혁할 필요성을 강조하지 못했다.
2. 과정신학적 접근법-기독교 신앙과 신학이 생태위기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면 기독교 신학을 철저히 재개념화 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논증했다. 테이야르 드 샤르뎅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3. 개혁주의적 삼위일체적 접근법-성경과 신학 전통 안에 인간 중심주의적 흐름이 있음을 인정하고 신학을 재해석하고 갱신하는 주된 토대를 성경 의 중심적 증언과 성경에 근거한 삼위일체적 교제의 존재론에서 발견한다.
<삼위일체적 창조론이 생태학적 창조론을 세우기 위한 자원이 되는 이유>
1. 삼위일체 신학은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함께 확증하면서 그 둘을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우주적 기독론을
요청함으로써 몰트만은 성령 안에서의 창조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성숙시키는 길만이 하나님의 활동과 목적이 가진 우주적 차원을 인정
하고 생태신학을 세우는 필요조건이라고 주창한다.
2. 삼위일체적 하나님 이해를 통해 피조 질서의 정합성과 풍성한 다양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 또 그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생태적 세계와 공동체의 토대와 비전을 제공하는 분은 말씀과 성령으로 세상 속에 현존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3. 창조의 선함과 창조의 신음 그리고 창조의 갱신과 완성에 대한 소망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창조의 모델들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이해하는 대표적인 입장에는 유신론(하나님이 이 세계의 초월적인 창조자다), 범신론(세상이 하나님의 존재의 양식이다), 만유재신론(세상과 하나님이 상호 의존적이다)이 있다.
<기독교신학에서 조지 헨드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행동을 표현할 때 쓰이는 모형과 유비들>
1. 출생의 유비-예언자들과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과 부모로서의 돌봄을 의미한다.
2. 조성 또는 형성의 유비-조성의 개념은 하나님을 집을 세우는 자로, 형성의 개념은 창조자 하나님을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로
표현한다. 이 유비들은 창조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만 조성에 필요한 재료가 먼저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만든
창조물에 비인격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단점이 있다.
3. 유출의 유비-하나님의 충만함과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4. 몸/마음의 관계의 유비-어떤 신학자들은 세상을 하나님의 몸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몸과 마음의 유비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
에서 친밀성과 상호성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했지만 하나님과 세상 사이가 은혜롭고 비필연적이고 비대칭적이라는 관계를 잘 나타내지는
못했다.
5. 예술적 표현 또는 놀이의 유비- 놀이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예술적 표현이며 하나님이 선한 기쁨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에서 유래한다.
창조론과 현대 과학
<이안 바버의 종교와 과학을 관계 짓는 표준적인 유형론>
1. 갈등-다른 관점을 무조건 거부하는 입장
2. 독립-각 영역은 분리적이라는 입장.
3. 대화-둘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
4. 통합-어느 정도의 조화 또는 종합을 시도하려는 입장.
<기독교 신학과 현대 과학이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원리들>
1. 과학의 언어와 신학의 언어는 서로 구별하여 사용되어야 하며 한쪽이 다른 쪽으로 흡수되어서도 안 된다. 즉 두 개의 ‘언어 게임’(비트겐슈타인의 용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2. 과학과 신학의 두 개의 언어는 비록 구별되지만 전적으로 다르거나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자연 과학에 사용될 수 있는 무오 한 교과서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신앙의 편에서 과학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고 역으로 진화론과 명시적인 무신론을 결합하여 주장한다면, 그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신앙에 총대를 겨누는 것과 같다. 창조과학 역시 세계의 창조자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확증으로부터 도출되는 가장 적절한 결론이 아니므로 과학 환원주의와 신학적 제국주의는 둘 다 피해야 한다.
3. 과학과 신앙은 서로 불화하지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상대를 풍성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내용이 많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되기 시작했다. 스탠리 자키는 근대 과학을 가능하게 했던 가정들이 기독교 창조론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다.
과학자와 신학자 사이의 대화를 진전시키려면 과학은 자신의 연구에 내포된 창조적 신비에, 신앙과 신학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목적 지향적 행위에 서로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개방적 대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 그것이 선한 창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첫댓글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