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자료는 한양조(趙)씨만 발췌한 것임을 참고하시기 바람
조거남(趙居南, 1789~184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일(景逸), 호는 고은(古隱).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문하에 들어가 왕래 수학했다. 스승의 영향을 받아 동서양의 학문과 천문상수(天文象數)에 통달하였다.
조거선(趙居善, 1738~180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유성(幼性), 호는 가옹(稼翁). 조운도(趙運道)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1780년(정조 4년)에 진사(進士)가 된 그는 1788년(정조 12년) 서울에 장기 체류하면서 선조의 신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거신(趙居信, 1749~182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충언(忠彦), 호는 매오(梅塢). 조진도(趙進道)(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백부인 조준도(趙遵道)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생부와 숙부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학문을 배웠다. 특히 문장이 뛰어났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여 그의 문장을 보고 가상히 여겨 응제(應製)로 등용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여, 산천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며 지냈다.
조건(趙健, 1570~161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강(汝剛), 호는 연담(蓮潭).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친동생인 전(全)(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권춘란(權春蘭)(본 인물편 참조) · 권호문(權好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길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공부하여 몸소 실천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음관(蔭官)으로 충의위(忠義衛)를 제수받았다.
조경기(趙慶基, 1889~193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여(善餘), 호는 정엄(楨广). 조기용(趙耆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경사백가(經史白家) 뿐만 아니라 동 · 서양의 지리 및 역사에도 능통하였는데, 학문의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44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조광의(趙光義, 1543~1608) 본관은 한양(漢陽). 조원(趙源)의 둘째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약관에 음사(蔭仕)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거쳐 분순위(奮順位) · 적순위(迪順位)를 거쳐 1582년(선조 15년)에 내금위(內禁尉)에 올랐다. 1577년(선조 10년)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 (영양읍 현리 소재, 현재 옛터만 남아 있음)을 창설할 때 그는 맏형 광인(光仁)(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참가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에 군량이 넉넉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자진해서 많은 곡물을 제공하였다. 1593년 그는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제수받고 통정대부에 오르고 장악원 판결사(掌樂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만년에 약산당(約山堂)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그 곳에서 거처하면서 빈객과 더불어 잔을 들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조광인(趙光仁, 1537~158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애(景愛), 호는 미상. 조원(趙源)의 맏아들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1577년(선조 10)에 김진(金璡)이 영산서당(英山書堂)(영양읍 현리에 있었으나 현재 옛터만 남아 있음)의 창설을 주창할 때, 동생 광의(光義)(본 인물편 참조)와 같이 참가하였다.
조구용(趙垢容, 1833~190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명(晦明). 호는 노계(魯溪). 조병추(趙秉樞)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족조(族祖)인 조목간(趙木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이 출중하여 향리에서 명성이 있었다.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조군(趙頵, 1629~169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평(子平). 조정형(趙廷珩)의 아들이며,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타인의 과실을 논하지 않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가난한 사람과 걸인에게 곡식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의 이러한 인품이 향리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조규(趙頍, 1630~167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면(子冕), 호는 삼수당(三秀堂).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임천리(臨川里)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로 이주하였다. 1660년(현종 1년)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남주고사(南州高士)’라 불렀다고 한다. 그는 중년에 영양읍 감천 2리(가짓들, 嘉芝坪)에 정자를 지어 임천리로 옮겨 살았다.
조근복(趙根復, 1782~187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회백(晦伯), 호는 송오(松塢). 조시(趙禔)의 증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7세 때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뒤에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조근해(趙根海, 1938~1995) 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출생.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공군사관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그후 공군학교와 고급지휘관 및 참모과정을 거쳐 1985년 제15전투비행단장, 이어 감찰감 · 한미 연합참모부장 · 작전참모 및 사령관 등을 지냈으며, 1993년 제22대 공군참모총장(공군대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가 1995년 별세하였다. 보국훈장으로 상일장 · 국선장 · 통일장 · 천수장 등과 수교훈장으로 광화장을 수훈하였다.
조대봉(趙大鳳, 1934~1992)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명남(明南).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10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남. 그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1959)하고 대구문성(文星)초등학교 · 영양고등학교 교사, 경상북도 교육연구소 연구사를 거쳐 1971년부터 1992년 때까지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34년간 2세 교육에 전심전력하였으며, 국민훈장 석류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인간행동의 이해와 자아실현』(문음사, 1990) 외 2권이 있다.
조덕구(趙德久, 1668~173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구지(久之), 호는 임악(霖嶽). 조병(趙頩)의 아들인데, 덕후(德厚)(본 인물편 참조)는 그의 맏형이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난 그는 그의 맏형(덕후)의 영향으로 일찍 학문을 탐구하였다. 1699년(숙종 25년) 진사(進士)하고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자연에 묻혀 지냈다. 특히『주역』에 관심을 가져 길흉 및 소장(消長)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조덕린(趙德鄭. 1658~173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 별호(別號)를 창주(滄洲)라 했다.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이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난 그는 1677년(숙종 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 17)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 · 교리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년) 사간으로서 노론 · 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조의 소(疏)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서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귀양 끝에 1727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良)이 영남과 호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영남상도 호소사(嶺南上道號召使)로 임명되어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었기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사에 대한 뜻을 버리고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1736년(영조 12)에 그가 서원을 마구 설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다시 노론의 탄핵을 받고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던 중 강진에서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다. 사후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 · 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저서로『옥천문집(玉川文集)』18권 9책(목판본)이 있다.
조덕순(趙德純, 1652~169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현부(顯夫). 현보(顯甫), 호는 호봉(壺峯) 조군(趙頵)(본 인물편 참조)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679년(숙종 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유학할 때 다른 유생들의 모범이 되었다. 1689년(숙종 15년) 섣달 숙종 앞에서 과거를 보는데, 그의 문사(文辭)와 필치가 빛나고 힘있고 우아하여 고시관이 장원으로 뽑았다. 1690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필법이 묘연하여 시관(試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구전으로 암송하여 전승하였다. 관직은 결성 현감(結城縣監)을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이조랑(吏曹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다. 그의 문장 일부가『옥천문집(玉川文集)』(조덕린의 시문집)에 전하고 있다.
조덕후(趙德厚, 1655~168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재숙(載叔). 조병(趙頩)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1678년(숙종 4년)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재명(才名)을 떨치더니 불행하게도 27세로 요절하였다.
조동진(趙東振, 1917~1937)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세림(世林). 조헌영(趙憲泳)의 장남으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조지훈(본명 동탁)의 형. 그는 영양공립보통학교(현 영양초등학교)를 졸업,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독학으로 독서에 전념하여 문인 수업을 위한 문학서적을 탐독하며 습작에 힘썼다. 당시 나라 잃은 슬픔을 그의 서정시를 통해 읊었다. 문학인으로서 대성하기도 전에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1주기 때 그의 유작을 긴추려『세림시집(世林詩集)』이 간행되었는데, 동향시인 오일도(吳一道)(본명은 熙秉)(본 인물편 참조)의 정회 서린 서문이 있다.
조동탁(趙東卓, 1920~1968) 시인 · 국문학자.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지훈(芝薰).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운 뒤 영양보통공립학교(현 영양초등학교) 3년을 수학하고 전문학교 입학자격 검정시험을 거쳐 1941년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현 동국대학교의 전신) 문과를 졸업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하였다. 이 오대산 월정사의 생활은 일제말 암흑기의 속진을 떠난 은둔생활이었다. 민족문화 말살에 혈안이 된 일제는 많은 조선 문인을 일본 어용문인으로 변절시켰을 때 그는 징용 징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끝내 몸을 굽히지 않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큰사전』편찬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강사 ·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위원 ·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위원이 되어 잃었던 국어와 국사교육의 기본을 닦기에 힘썼다. 1946년에 조선 문학가 동맹이란 좌익계 문학단체가 문학을 정치 도구화하려고 맹렬히 문학 청년들을 유인할 때, 그는 김동리(金東里) · 조연현(趙演鉉) 등과 함께 전국 문필가협회와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위원이 되어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 문학의 수호 · 육성에 힘썼다. 같은 해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이해 가을부터 타계할 때까지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0년 6 · 25사변 때는 종군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시작(詩作)보다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한국문화사 대계(韓國文化史大系)』편찬을 기획하고 추진하였다. 그의 작품활동은 1939년 4월『문장(文章)』지에서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1월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이 추천작품들은 한국의 역사적 연면성(連綿性)을 의식하고 고전적인 미의 세계를 찬양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봉황수>에서는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 경향은 『청록집(靑鹿集)』(1946) ·『풀잎 단장(斷章)』(1952) ·『조지훈 시선(趙芝薰詩選)(1956) 등의 작품들과 『역사앞에서』(1957)의 작품들로 대별된다. 박목월(朴木月) · 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청록집』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또한『풀잎단장』과『조지훈시선』은『청록집』에서보인 전통지향적 시세계를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역사 앞에서』는 일대 시적 전환을 보이고 있는데,『청록집』등에서 나타난 시세계와는 다르게 현실에 대응하는 시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역사 앞에서> · <다부원(多富院)> · <패강 무정(浿江無情)>등의 시에서 광복 당시의 격심한 사상적 분열 현상과 국토의 양분화 현실 및 6 · 25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의 분노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 밖의 저서로는 시집『여운(餘韻)』(1964), 수상록『창에 기대어』(1956), 시론집『시의 원리』(1959), 수필집『시와 인생』(1959) ·『지조론』(1962), 번역서『채근담(菜根譚)』(1959) 등이 있다. 또한 <영양군민의 노래>와 <영양중학교가>를 작사하였다. 그는“아직 할일이 산더미 같은데……”라는 절언을 남긴 채 향년 49세로 타계하였다. 한국문화예술인총연합회의 문인장(文人葬)으로 엄수되었다. 1972년 서울 남산에 ‘지훈선생 시비(趙芝薰先生詩碑)’. 1982년 영양에‘지훈 시비(芝薰詩碑)’가 각각 건립되었다.
조두해(趙斗海. 1928~1995) 본관은 한양(漢陽).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14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고를 거쳐 영남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대구시선거관리위원회 상임관리관을 역임하였다. 근정포장과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다.
조명기(趙命基. 1843~1902) 한양(漢陽). 자는 국형(國馨), 호는 난고(蘭皐). 조재용(趙載容)의 아들이며, 승기(承基)의 아우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수편의 글이 전하고 있다.
조병(趙頩. 1633~168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휴(子休), 호는 임수(霖叟). 조정형(趙廷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조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조카 덕순(德純) · 덕린(德鄰)(본 인물편 참조)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맏아들 덕후(德厚) · 둘째 아들 덕구(德久)(이상 본 인물편 참조)가 연이어 소과에 급제하였음은 그의 훈도 육성한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조병규(趙秉奎, 1796~182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옥(穉玉), 호는 대박료(大樸寮).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으나, 33세로 요절하였다.
조병노(趙秉魯, 1797~187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주(穉周), 호는 용은당(蓉隱堂). 조언유(趙彦儒)의 아들이요, 병주(秉周)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구휼하여 향리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만년에 용은당(蓉隱堂)을 지었다.
조병석(趙秉碩. 1842~188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형(士亨), 호는 구암(龜岩). 조언민(趙彦敏)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세사(世事)가 혼탁하고 어지러워 관직을 포기하고 귀향하여 자연풍미를 벗삼아 시를 옳으며 여생을 보냈다.
조병성(趙秉性, 1813~187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선(穉善), 호는 임강(霖崗). 조병주(趙秉周)(본 인물편 참조)의 아우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문망(文望)이 높았다.
조병시(趙秉時, 1837~1911)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가중(可中), 호는 침계(枕溪). 조언목(趙彦穆)의 아들로서 영양읍 사고리에서 출생, 그는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자연을 벗삼아 청빈한 생활 속에서 학문을 닦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유고집 6권 3책이 전하고 있다.
조병연(趙秉淵, 1801~185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심(穉深), 호는 용산(蓉山).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이며 조언휴(趙彦休)(본 인물편 참조)의 조카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유고집 2권이 있다.
조병유(趙秉裕, 1836~190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흠(士欽), 호는 근계(近溪).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원군(大院君)과 교유하였으며 후에 음서(蔭敍)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조병주(趙秉周, 1790~187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노(穉魯), 호는 치헌(癡軒). 조언유(趙彦儒)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학파(趙鶴坡)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덕행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조병중(趙秉重, 1819~186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구(穉九), 호는 국오(菊塢). 조언윤(趙彦倫)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근복(趙根復)(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받았으며 문장이 뛰어나『심경근사강의록(心經近思講義錄)』여러 권이 있다.
조병하(趙炳夏, 1926~1990) 본관은 한양(漢陽). 청기면 상청리 269번지에서 태어남. 그는 영양서부초등학교 · 경북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서독 Hamburg대와 영국 Imperial 이공대에서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주요 경력으로는 경북대학교 교수 · 교학처장, 동국대학교 교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 행정실장 · 기획실장 · 부원장, 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 한국물리학회 회장, 물리학에 응용되는 군론(群論)에 관한 국제회의(ICGTMP) 상임이사, 소입자 및 원자핵 물리학 국제회의 자문위원,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부회장, 일본 대판(大阪) 대학 초빙교수, 미국 수학회 세계 수학논문평가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상북도 과학기술상 · 녹조소성(綠條素星) 훈장 ·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주요 저서 및 논문으로『대학물리학』·『양자론(量子論)의 물리학 원리』외 10 여권과 논문 다수가 있다.
조병화(趙秉華, 1815~187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관(穉觀), 호는 남원(楠原).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이며 조언인(趙彦仁)의 아들로 일월면 주목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술한『경의고증록(經義考證錄)』이 있다.
조병훈(趙秉薰, 1822~190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순가(舜可), 호는 죽하(竹下). 조시복(趙始復)의 손자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집안의 일로 서울에 오래 있을 때 대원군과 가깝게 지내 운현궁(雲峴宮)에 사정을 몰래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가 한 마음으로 섬기자, 1900년(고종 37년)에 패전(霈典)을 내렸다.
조병희(趙秉禧, 1855~191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정(子鼎), 호는 석농(石農). 조언교(趙彦敎)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6대조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원통하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리려는 상소를 올려 1899년(고종 36년)에 6대조를 신원하였다. 이 일로 그는 장릉 참봉(章陸參奉)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나 국운이 불행하여 1910년 합병 이후 그는 귀향하였다.
조봉규(趙奉圭, 1707~176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석경(錫卿), 호는 낭촌자(浪村子).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사고리(沙皐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품성이 아담하고 재예(才藝)가 뛰어나 세속을 떠나 금가(琴歌)를 스스로 터득하여 평생을 거문고와 노래로 생애를 보낸 독특한 삶이었다.
조사용(趙思容, 1831~189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빈(聖賓), 호는 일하(日下). 조병로(趙秉魯)(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향리에서 가난하고 굶주리는 걸인들에게 곡식과 밥을 제공하여 도왔으며, 경서(經書) 수천권을 소장 배치하여 책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향리 사람들은 모두 그를 독행군자(篤行君子)라 칭송하였다.
조상규(趙相圭, 1704~177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춘경(春卿), 호는 지헌(砥軒). 조시대(趙是大)의 아들로, 사고리(沙皐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문을 익혀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인근에 서숙(書塾)이 없어 학동들의 수학에 불편함을 알고 그가 주창하여 사고서당(沙皐書堂)을 창설하였다.
조상태(趙相泰, 1704~1774)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중호(重皥), 호는 계암(溪巖). 생육신 조려(趙旅)의 10세손으로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났는데, 중년에 영양군 석보면 옥계리로 이거하였다. 그는 행의(行義)가 고결하고 문학이 독실하였으며, 가선대부 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문집이 있다.
조석운(趙錫運, 1913~1971)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태일(泰一). 조유기(趙有基)(본 인물편 참조)의 외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났다. 영양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를 4년 수료하였다. 그후 한국역사와 고전학을 연찬하여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었다. 1949년 국립중앙도서관 고전과장, 조선서지학회 상무간사, 1961년 민선 초대 일월면장, 이듬해 민주공화당 제 14지구당(영양 · 울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9년 영양군지편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동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주간을 맡아『영양군지』를 처음으로 발간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성기(趙誠基, 1886~1939)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윤경(允敬), 호는 완산(碗山). 그는 약관에 김장락(金章洛) · 남건(南健) · 강복(姜복) · 김병종(金秉宗) 등으로부터 훈자(薰炙)를 받으며 촉망이 두터웠다. 그는 후진양성에 힘썼다. 유고집으로 『완산집(碗山集)』6권 3책이 있다. 김철희(金喆熙)가 찬(撰)한 묘갈이 있다.
조성길(趙星吉, 1920~1993) 본관은 한양(漢陽). 조석기(趙碩基)의 맏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성 중 · 고등학교를 거쳐 1943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해방후 그는 교통 부장관 비서관으로 발탁, 이어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 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문화예술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정의를 신념으로 강직한 공직자상을 확립하고 겸손한 자세로 생활한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다.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표창 · 문공부장관 표창 등을 수여받았다.
조성복(趙星復, 1772~183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규응(圭應), 호는 학파(鶴坡). 조거선(趙居善)(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으나, 과거에는 나가지 않고 경학(經學)에 진력했고, 문장에 더욱 매진하여 학덕을 고루 갖춘 선비였다. 만년에 일월면 섬촌리에 학파정(鶴坡亭)을 건립하여 유유자적하였으며 유집 10여권이 있다.
조성신(趙城臣, 1765~183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종진(宗鎭), 호는 염와(恬窩). 조시벽(趙是壁)(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이며 조상순(趙尙純)의 아들로 영양읍 사평리(沙坪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문하에서 수학했다. 1792년(정조 16년) 안동 도산에서 실시된 별시(別試 : 陶山科)에 장원을 차지하였으나, 그 뒤 인재등용 과거인 성시(省試)에 낙방했다. 그후 그는 관직에 더욱 유의하던 중 33세 때 우연히 안질에 걸려 실명하였으며, 곧 낙향하여 시문에 힘써 서정성 깊은 문장을 다수 남겼다. 많은 가사 중 <도산별곡(陶山別曲)>은 실명한 뒤 1792년 도산에서 별시에 응시했던 때 그 곳의 풍경을 평소의 기억을 되살려 노래한 작품으로 모두 120구로 되어 있다. 그의 시문집인『염와유고(恬窩遺稿)』2권 l책(석인본)이 있는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성영(趙性英, 1822~1903)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사언(士彦), 호는 율헌(栗軒). 석보면 소계리에서 태어났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事) 추증되었다. 향년 82세로 타계하였다.
조수빈(趙壽彬, 1655~173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빈(德彬). 조녕(趙(寧+頁))의 아들.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양 향교 창설에 간사로 선임되었다. 수직(壽職)으로 통덕랑(通德郞)에 추증되었다. 향년 81세로 타계하였다.
조수영(趙秀永. 1928~198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서(國瑞). 조종호(趙宗鎬)의 맏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남. 경복중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6 · 25 동란이 일어나자 그는 학도군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대위로 예편한 후 복교하여 1959년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국립중앙의료원 대외협력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의료계에서 한국의 의료기술진들이 활약하는 데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크게 공헌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보국훈장을 받고 정치에 입문하여 민주공화당 중앙당 조직부 차장, 민주공화당 영양 · 울진 지구당 사무국장, 중앙당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후 그는 청와대 대통령 정무비서관, 제1무임소장관, 보좌관을 역임하였다. 수교훈장 광화장 · 국민훈장 동백장 · 녹조근정훈장 ·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조술도(趙述道, 1729~180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소(聖紹), 호는 만곡(晩谷).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희당(喜堂)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와서 9세 때 할아버지인 조덕린이 당쟁에 희생되자, 이후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젊은 나이로 고장의 학도들에게 강학(講學)할 때 퇴계 선생의『성학십도(聖學十圖)』를 조목따라 논변(論辯)하니 원로 스승과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고 장차 영남의 큰 선비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1735년(영조 11년) 증광별시(增廣別試) 때에 어전(御前)에 나아가 강의하였다. 그는 한 때 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 등으로부터 수학했다. 그리고 그는 여러 유생들과 함께 향약을 지어 미풍양속을 가꾸어 이웃 마을과 우리 고장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1768년(영조 44년)에는 관동팔경을 유람하며 수려한 강산과 풍물을 시를 지어 읊으면서 수양하였다. 만년에 문인들이 일월면 주곡리 용봉(蓉峯) 아래 만곡정사(晩谷精舍)를 건축하고 원당리(元塘里)의 선유굴(仙遊窟) 위에 강정(江亭)을 지었는데, ‘뒤늦게서야 견문하고 옹졸하게 도를 닦았다’는 뜻인 바 이로부터 만곡(晩谷)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다. 1802년(순조 2년) 그는 강정을 주곡리로 옮겨 지어 미운당(媚雲堂)이라 하였다. 그는 뛰어난 재주와 고매한 덕행과 학문으로 향리의 선비의 사표(師表)였던 분이다. 그의 시문집인『만곡문집(晩谷文集)』17권 9책(목판본)이 있는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숭도(趙崇道, 1748~182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유(聖由), 호는 가암(佳嚴). 조정환(趙廷瓛)(본 인물편 참조)의 후손으로 일월면 가곡리에서 태어났다. 정종로(鄭宗魯) ·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 등과 친교하였고, 문망(文望)이 높았는데 가암집(佳嚴集) 2권이 있다.
조승기(趙承基, 1836~191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현(國賢). 호는 남주(南洲).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유주목(柳疇睦)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벼슬길을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 후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나라의 금령(禁令)이 있었으므로 해산시켰다. 1899년(광무 3년)에 스승 유주목의 문집『계당문집(溪堂文集)』을 교정하였다. 그의 시문집 8권 4책의『남주문집(南洲文集)』(석인본)이 있다. 이 문집의 잡저 가운데 <동유록(東遊錄)>은 기행문으로 그가 동지들과 함께 1899년 4월부터 6월까지 영양을 출발하여 청송의 주왕산(周王山)과 보경사(寶鏡寺)를 경유해서,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고적을 두루 보고 느낀 감회를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이 문집은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시강(趙是剛, 1660~173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중(德仲). 호는 환선(喚仙). 조시창(趙是昌)(본 인물편 참조)의 동생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났다. 만년에 연지반(蓮池畔)에 저택을 옮겨 지어 환선당(喚仙堂)이라 이름짓고 거처하였다.
조시광(趙是光. 1669~174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만(戒萬). 호는 주강(柱江). 조임의 손자인 조구(趙(求+頁)의 아들로 사구리(沙邱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현일(李玄逸)(인물편 참조)에게 사사하였다. 1712년(숙종 3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여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바쳤다. 그의 <정계 24측(庭戒二十四則)>은 효부모(孝父母) · 우형제(友兄弟) · 신언어(愼言語) · 숭례의(崇禮義) 등 24개 항목으로 후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만년에 주강정(柱江亭)을 세워 거처하였다. 그의 시문집『주강문집(柱江文集)』4권 2책(목판본)이 규장각 도서에 있다.
조시벽(趙是壁, 1670~175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봉이(奉以), 호는 삼암(三岩). 조책(趙頙)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났다. 1689년(숙종 15년) 20세 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의 뜻을 꺾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을 주로 읽었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조시용(趙蓍容. 1847~189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원(聖圓). 호는 취암(翠巖). 조덕순(趙德純)(본 인물편 참조)의 7세손이며 조병익(趙秉益)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종숙부 조임강(趙霖崗)으로부터 수학하였으며, 학덕과 문망(文望)이 높았다. 그의 유고 몇 권이 있다.
조시창(趙是昌, 1652~173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유(德裕). 호는 월오(月梧).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증손으로, 원당리(元塘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덕행과 문망(文望)이 출중하였다.
조신(趙祳, 1670~174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화보(華甫). 호는 사재(思齋).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났다.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李麟佐)가 삼남(三南)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의 재종숙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호소사(號召使)로 병사를 모집하기에 그는 두 아들을 인솔하고 의병(義兵)에 참가하였다.
조언국(趙彦國, 1793~187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필여(弼汝), 호는 노산(蘆山). 조성복(趙星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주서(注書)를 지냈다.
조언관(趙彦觀, 1805~187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용빈(用賓). 호는 하담(荷潭). 조남복(趙南復)의 아들로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났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포기하고, 주자서(朱子書)에 힘을 쏟았다. 김대진(金垈鎭) · 이만각(李晩慤) · 이수영(李秀榮)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시문집『하담문집(荷潭文集)』5권 2책(석인본)이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언방(趙彦邦, 1771~182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한경(翰卿). 조규(趙頍)(본 인물편 참조)의 6세손으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났다. 벼슬길을 포기하고 향리에서 시(詩)와 예(禮)를 열심히 공부하고 행하면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조언신(趙彦臣, 1767~183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언(士彦). 호는 연호(蓮湖). 조상복(趙尙復)의 아들이며,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났다. 문장이 출중하고 덕망이 높았다.
조언유(趙彦儒, 1767~184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진(景珍), 호는 심재(心齋). 조명복(趙明復)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813년(순조 1년)에 전시가 되었다. 문집(文集)이 10여책 전한다.
조언휘(趙彦彙, 1825~188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덕일(德一), 호는 치암(癡庵). 조연복(趙淵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다.
조언휴(趙彦休, 1773~184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휴(景休). 호는 야헌(冶軒). 명복(明復)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門人)으로 수학하였다. 문장이 뛰어났다.
조연복(趙淵復, 1790~186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안(穉顔), 호는 목간(木澗). 거간(居簡)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성호(李星湖) · 정다산(丁茶山)과 교유하였으며, 학문이 넓고 덕행이 높았다.
조영기(趙永基, 1845~191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국윤(國胤), 호는 남산(南山). 조태용(趙泰容)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둘째형 난고(蘭皐)와 같이 흥선군(興宣君) 복위(復位)를 소청(疏請)하다가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뒤 세상사를 잊고 맏형 · 둘째형과 함께 경서(經書) 강구(講究)에 몰두하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그의 저서로는『북천록(北遷錄)』이 있다.
조운도(趙運道, 1718~179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제(聖際), 호는 월하(月下). 조희당(趙喜堂)의 아들.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제에 해박하여 나라에 경제책(經濟策)을 소청하기도 하였다. 1737년(영조 1년) 조부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이 제주도로 유배될 때, 그가 곁에서 시종일관 주야로 보살폈다. 1765년(영조 41년)에 그가 주창하여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창립하고 다른 유지들과 더불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1788년(정조 12년) 조덕린의 신원(伸寃)을 연명으로 진언하여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1789년에 영양 현감 박도상(朴道翔)의 부탁으로 읍지(邑誌)의 개수(改修)를 담당하였다.
조유기(趙有基, 1881~192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우홍(禹洪), 호는 월기(月磯). 조시광(趙是光)(본 인물편 참조)의 8세손이며 진용(振容)(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장과 문체가 출중하여 큰 기대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타계하였다. 그의 시문집 여러 권이 전하고 있다.
조의(趙顗, 1638~169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정(汝靖).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서 영양읍 원당리에서 출생함. 영양군이 오랫동안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군민들이 복현(復縣)코자 인조조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재가를 얻지 못하였다. 그의 처종조부인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직으로 있을 때 그가 소수(疏首)로서 조정 요인들에게 교섭하여 계속 상소를 올려 1683년(숙종 9)에 마침내 영양현을 설치케 되었는데, 이는 그의 공로에 힘입은 바가 컸다.
조인석(趙寅錫, 1879~195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건초(建初), 호는 내은(乃隱). 승기(承基)(본 인물편 참조) 의 맏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주곡리에 있는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설치, 신학문 공부를 위해 서적을 구입하고 강사를 초빙하여 개화운동에 힘썼다. 또한, 그는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하여 허례(虛禮)와 폐속(弊俗)을 교정(矯正)하고, 폐단스러운 옛 것을 새롭게 쇄신하는 데 힘썼으므로 당시에 일월면 주곡리가 전국에서 제일의 문화론(개화론)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민족주의에 투철하여 일제 말기의 창씨개명(創氏改名)에 완강히 반대하여 끝내 창씨하지 않았으며, 이중과세(二重過歲)를 철폐하고 한학자(漢學者)이면서도 저술과 서찰에 국한문 혼용을 실시하고 권장하였다. 그는 영양 근대화의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그는 계몽하기 위해 쓴『농촌요람(農村要覽)』등 여러 책자를 남겼다.
조일도(趙一道, 1695~1755) 자는 능언(能彦), 호는 개암(皆岩).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문장과 필법이 흡사 중국 진대(晋代) 풍치와 같았다고 한다. 그는 벼슬길을 위해 준비하다가 포기하고, 향리에 정자를 세우고 학문과 자연을 벗삼았다. 당시 지사(知事) 홍성(洪晟)이 정자 앞을 지나다가 잠시 머물러 개암(皆岩)이라 이름지으니, 이로 인해 그의 호로 삼았다.
조일섭(趙逸燮, 1732~1832)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군택(君宅). 호는 소은(沼隱). 청송군 안덕(安德)에서 태어났으나, 15세 때 부친을 따라 영양군 석보면 소계리로 옮겨 살았다. 그는 자연의 풍치를 감상하고 시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수직(壽職)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조임(趙任, 1573~164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沙月). 조광인(趙光仁)(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김윤명(金允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조검 : 趙儉)(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용감히 싸웠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620년(광해군 12년)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이듬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27(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사재를 털어 군량미를 바쳤으며,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는 연로하여 종군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 만년에 비파담(琵琶潭)에 숙운정(宿雲亭)을 세우고 이준(李埈) · 홍우정(洪宇定) · 나만갑(羅萬甲) 등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술로 상종(相從)하고 도의(道義)로써 친교하였다. 그의 시문집『사월문집(沙月文集)』2권1책(목판본)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전(趙佺, 1576~163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수(汝壽), 호는 호은(壺隱). 조광의(趙光義)(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에서 군량미를 모을 때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만년에 일월면 주곡리로 이주하였다.
조정곤(趙廷棍, 1590~ ?)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미백(美伯), 호는 영은(靈隱). 조검(趙儉)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났다. 학업에 힘썼는데, 중년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경사(經史)로 위안하였다.
조정숙(趙廷琡, 1615~168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보(叔寶).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양현(英陽縣)의 복읍(復邑)을 주창하고, 효종 때에 여러 번 복군(復郡)할 것을 상소 진정하였다.
조정형(趙廷珩, 1597~165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명경(嗚卿).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 영양읍 상원리에서 태어났다. 1630년(인조 8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당쟁으로 혼미하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세상사를 잊고 향리에서 시를 읊으면서 지냈다.
조정환(趙廷瓛, 1612~1663)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헌경(獻卿), 호는 석문(石門).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상원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이시명(李時明)(본 인물편 참조)의 문인으로 이상일(李尙逸)(본 인물편 참조)과 함께 수학하였다. 향시(鄕試)를 몇차례 응시하였으나 병자호란(1936) 이후 공명(功名)에 대한 마음을 버리고 임천(臨川)으로 이주하였다. 만년에 다시 지평(芝坪, 현 감천 2리)으로 옮겨 살았다.
조정황(趙廷璜, 1603~167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위덕(渭德).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아들로서 영양읍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1672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나라에서 비용을 모을 때 그는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1651년(효종 2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빈(趙贇)과 의논하며 대동보(大同譜) 편찬을 주창하고『한양조씨 대동보(漢陽趙氏大同譜)』3책을 목판본으로 발간하였다.
조준영(趙俊泳, 1903~1961)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부(應夫).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이며, 조인석(趙寅錫)(본 인물편 참조)의 셋째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서울에 가서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시행위원(施行委員)에 선출되어 역사적인 환영 경축 행사를 주관하였다. 그 후 문경 경찰서장, 상주 · 대구경찰서장을 역임하였고, 1950년 1월 경북경찰국장에 취임하여 4월에 사퇴했다. 6 · 25 동란이 일어나자 조병옥(趙炳玉) 내무부 장관이 그의 치안 및 전투경찰의 역량을 높이 인정하여 8월 11일 다시 경북 경찰국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대구 사수와 수복 후인 경북의 치안을 확고히 한 취임 1년 만에 사직하고 재야 인사로 돌아갔다. 당시 자유당 독재부패정권의 부패와 악정으로 민주 조국이 도탄의 와중에 빠져드는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이상 참고 견딜 수 없어 제1야당인 민주당에 입당하여 1956년 9월 경북도당 부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0월에는 중앙위원에 피선되어 민권회복 투쟁에 헌신하였다. 1958년 10월 2일 대구시장 선거에 민주당 공천 입후자로서 총투표수의 2/3이상 절대 다수 득표로 압승 당선되었다. 그는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하고 적폐(積弊)에 병든 시정쇄신에 심혼을 기울였으나 집권당 자유당 고위층의 압력과 여당 시의원의 횡포, 그리고 홍연천(洪淵天) 의원의 매수당한 변절로 인해 1표차로 시장 불신임안이 통과되었다. 1960년 3 · 15 부정선거로 인한 4 · 19 학생혁명 후에 그는 경상북도 지사로 임명되어, 악정이 누적된 도정(道政)의 쇄신에 힘을 쏟기도 하였으나 얼마 뒤 신병으로 사퇴하였다.
조중복(趙重復, 1747~180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수초(修初). 호는 일면재(日勉齋). 조거경(趙居敬)의 아들로 가지리(嘉芝里)에서 태어났다. 일상의 법도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에 진력하여 학행(學行)으로 널리 명망이 높았다.
조진도(趙進道, 1724~1788)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여(聖輿). 호는 마암(磨岩). 조운도(趙運道)(본 인물편 참조) 의 동생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경야독(晝耕夜讀)하여 1759년(영조 35년)에 증광별시(增廣別試)에 급제하였다. 그 후 전시(殿試)에 선발되어 응시하니 음독(音讀)이 유창하여 전강(殿講)에 뽑혔다. 이듬해에 지평(持平) 이윤욱(李允旭)이 조정에 상서(上書)하고 이르기를, “조모(趙某)는 조덕린(趙德隣)(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그의 조부가 죄적(罪籍)에 있으니 어찌 과거 급제를 지나치게 탐하겠습니까.”라고 주청하였다. 당시 노론의 김상로(金尙魯) · 홍계희(洪啓禧) 등이 다시 영조에게 건의하여 끝내 과거 급제를 취소당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산촌에 숨어서 세상의 영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1778년(정조 2년)에 선정(先亭)인 사미정(四未亭)에 옮겨 지내면서 독서하고 시를 옳으면서 유유자적하였다. 그의 시문집으로 『마암문집(磨巖文集)』3권 1책(목판본)이 있는데, 규장각 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진용(趙鎭容, 1849~192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성거(聖居). 호는 소고(小皐). 조병탁(趙秉鐸)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종질인 조승기(趙承基)(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고 이만인(李晩寅)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여 다양하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홍승만(洪承萬) · 김세락(金世洛) · 김병식(金秉植) · 이수형(李壽馨) 등과 동문수학(同門受學) 하였으며, 도의(道義)로써 친교 하였다. 그의 문집 4권이 있다.
조책(趙頙, 1644~1695)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여직(汝直). 조임(趙任)(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영양읍 삼지 1리에서 태어났다. 군의 복현을 위해 조선 인조(仁祖) 때부터 상소 진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백씨인 조의(趙顗)를 도와서 1683년(숙종 9)에 완전히 영양현(英陽縣)으로 복현(復縣)하는 데 많은 협조를 하였으며 공이 컸다.
조춘영(趙春永, 1938~1996) 본관은 한양(漢陽). 조전(趙佺)(본 인물편 참조)의 13세손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LA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를 수료하였다. 한국감사협의회 부회장 ․ 국회의장 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조한철(趙漢喆, 1790~1861)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중길(重吉), 호는 도계(道溪). 조정신(趙楨臣)의 아들로서 사고리(沙皐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품성이 인자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만년에 부용산(芙蓉山) 아래에 도계정사(道溪精舍)를 건립하여 이 곳에서 세상의 영욕을 잊고 자적(自適)하였다.
조항복(趙恒復, 1825~1866)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천필(天必), 호는 주계(注溪). 거양(居陽)의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조술도(趙述道)(본 인물편 참조)에게 수학하다가, 다시 정입재(鄭立齋)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행의(行義)와 학문으로 존중받았다. 그의 문집이 몇 권 있다.
조행도(趙行道, 1749~1820)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평경(平卿), 호는 송운(松韻). 조희망(趙喜望)의 아들로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조헌기(趙獻基, 1887~1977)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문백(文伯), 호는 매서(梅墅). 조진용(趙鎭容)(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으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남. 1967년 유림의 추천에 의해 도산서원 원장이 되었다. 그의 유작으로 우의정 조연(趙涓) 묘갈명, 병참공(兵參公) 조련(趙憐) 묘갈명, 삼벽재기문(三碧齊記文) 등을 비롯하여 시 · 서 · 제문 등이 있다.
조헌영(趙憲泳, 1901~1985) 본관은 한양(漢陽). 일월면 주곡리(주실마을)에서 태어남. 1920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 졸업하였다. 1927년 그는 재일조선인학우회의 대표와 신간회 도쿄지회 초대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귀국하여 신간회가 해체된 1931년까지 신간회 본부의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신간회 해체 후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한의학과 국어학에 매진하여 1934년『통속한의학 원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조선일보에「한방의학(韓方醫學) 부흥문제 : 동서의학의 비교비판의 필요」·「음양설의 이론과 실제」·「장부론(購服論)의 신연구」·「한의학(韓醫學)으로 본 다산의학(茶山醫學)의 특색」등을 기고하여 한의학에 관한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해방직후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는데, 당시 우익세력들이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범우익세력을 단일화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민족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9월 1일「임정환국환영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고, 같은 달에 결성된 우익세력의 최대 정당인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당무부 및 지방부의 부장을 거쳐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그후 그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양에서 출마, 무투표로 당선되어 제헌의회 의원으로서 헌법 및 정부조직 기초위원회 위원, 상공분과 간사와 산업분과 위원, 대한정치공작대 조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고 결성한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는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양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재선되었으며 같은해 7월 재선의원으로서 의원활동을 행하기 전에 발발한 6 · 25 전쟁 중 납북되었다. 납북 후 그는 한의학에 관한 전문성을 살려 북한의 동의학연구소 연구사로 종사했고, 북한이 남한 출산 유병 인사들을 중심으로 만든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홍복(趙弘復, 1773~1841)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치중(穉重), 호는 망운(望雲). 조호신(趙虎臣)의 아들로, 영양읍 삼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 때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도산시회(陶山試會)에 응시해서 연 3일을 장원하여 여러 선비들의 주목을 받았다. 향시(鄕試)에 장원하였으며, 군수가 부임하여 그의 뛰어난 문장을 사랑하고 중히 여겨 성시(省試)에 같이 응시하여 글을 대신 지을 것을 강요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니 모략중상하여 몇년간 중화(中和)로 유배하였다. 1805년(순조 5년) 풀려났으며, 1806년(순조 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만년에 선영 아래에 망운정(望雲亭)을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시문집『망운집(望雲集)』(목판본) 4권 2책이 있다. 이 문집은 계명대학교 도서관 · 국립중앙도서관 ·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희용(趙禧容, 1896~198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극창(克昌). 영양 입향조 조원(趙源)의 12대손으로 일월면 가곡리 179번지에서 태어났다. 1915년 영양초등학교와 1919년 경기고등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1920년 일본 조도전(早稻田 : 와세다)대학 2년 중퇴하였다. 이어 도산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청도 문명학교 교사를 거쳐 1951부터 일월 · 석보 · 영양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제3대 교육감에 피임되었다. 대통령 면려포장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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