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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정말 편한 편승인생>의 줄거리:
로마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믿음의 속성 세가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위 이전의 일로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게 주는 것이라는 것이 그 첫째요. 믿음은 심장이식이라서 영적인 혈통 관계를 이룬다는 것이 둘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심장을 이식하게 될 때 인생길을 편승하여 가게 된다는 것이 세째입니다. 편승이란 편하게 올라탄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인생을 편하게 올라타고 가게 합니다.
정말 편한 편승(便乘) 인생
(롬4:18~25)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정말 편한 편승(便乘) 인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편승(便乘)이라는 말의 뜻을 다 아시지요, 다른 사람이 타고 가는 차편을 얻어 타는 것을 편승이라고 합니다.
또, 비유적으로 말할 때는 세태나 남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거두는 것을 뜻하는 그런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편승이라고 키워드를 잡게 된 이유는 편승과 연관 지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 때문에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키워드로 삼은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가는 사람이 내가 달려갈 수 있는 거리가 얼마인가를 계산하고 염려하는 법은 없습니다.
내가 1천 미터 달리기를 몇 분에 뛰었는가, 백 미터 달리기를 몇 초에 뛸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염려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얼마 만에 도착할 수 있는가를 계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단 몸을 비행기에 실으면 비행기가 날아갈 것입니다.
산책을 하는데, 길가에 차를 세워둘 곳이 아닌데 차 한 대가 서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까 아주 멋지게 생긴 스포츠 세단이에요, 그런데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기에 걸어가면서 한번 들여다보았더니 젊은이 둘이 창문을 열고 앉아서 옥수수를 먹고 있는 거예요.
일견 봤을 때는 운전석에도 여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조수석 아가씨도 몸집이 말랐는데 그 아가씨 팔뚝보다도 더 가는 팔을 가진 아주 빼빼 마른 총각인 거예요.
그 깡마른 팔로 옥수수를 들고 먹고 있습니다.
산택을 갔다가 되돌아오는데 마침 그 차가 부웅~ 하고 달려갑니다.
얼마나 파워풀한지 운전석 총각과 옆 좌석의 앙상할 정도로 마른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저 스포츠 세단의 발진할 때의 파워풀한 속도나 소리가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그 자동차에 올라타고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올라탄 사람 자체의 체격이나 능력이나 달리기 솜씨 같은 것은 전혀 상관이 없이 달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 인생을 이렇게 편승해서 산다면 파워풀한 스포츠 세단에 올라탄 것처럼 태평양을 횡단해서 쉬지 않고 열세 시간을 날아서 LA 공항까지 도착할 수 있는 비행기를 타고 가듯이 인생을 타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한 인생이 되겠는가?
바로 그것을 약속해주고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얘깁니다.
특별히 로마서에서 지금 사도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믿음이라는 거예요.
바로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모든 장이 다 그렇습니다마는, 이 로마서 4장에서 우리는 중요한 믿음의 속성, 우리가 평생 믿는다고 하면서 살고 있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어떤 성격과 특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그런 믿음의 속성에 대해서 세 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독교의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뼛속에 새겨져야 될 믿음의 의미라는 거예요.
이렇게 믿음의 속성 세 가지가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알기 쉽게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한번 복습하는 의미로 첫 번째 믿음의 속성이 뭐였습니까?
첫 번째 믿음의 속성은 ‘행위 이전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시면 우리 인생은 신경 쓸 게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여부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보시고 결정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마음에 들어 하실 때의 우리 마음의 포지션이 어딘가 하는 바로 그 점을 사도바울이 첫 번째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박 지성 선수의 포지션이 미드필더이고 손 흥민 선수의 포지션이 골게터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행위는 역시 마음으로 몸을 움직이는 겁니다, 마음이 결부됩니다.
근데 이 마음의 포지션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어요, 마음 자체로 있는 것이 있고, 마음이 어떤 대상을 향해 나가서 그 대상에게 붙어있는 그런 상태의 포지션이 있고, 마지막에 그런 상태에서 내 육신을 움직이는 행동이 가능해지는 포지션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중에서 마음이 어떤 대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이 영역에서, 하나님은 내 마음이 어떤 영역을 향해 가는가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하시느냐 안 들어 하시느냐 하는 걸 결정하신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한다면 행위로 마음에 들려 하지 말고 그런 행동 이전의 차원에 내 마음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을 향해 가고 있고, 가서 머물고 있는가를 확인하라는 얘깁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니까.
왜 우리가 어떤 대상에 마음을 보냅니까?
그 대상에 마음을 보내면 그 대상으로부터 내게 행복과 기쁨과 만족이 주어질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고, 하나님으로부터만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주어질 거라고 믿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얘깁니다.
믿음의 둘째 속성은 ‘심장이식’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게 될 때, 내 마음의 심장을 꺼내서 어떤 대상에게 주게 되면 이제 내 마음속에서 생기는 모든 만족과 불만과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의 감정들이 내가 마음을 꺼내준 그 대상으로부터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자식에게 마음의 심장을 꺼내주면 자식의 상황으로부터 내 마음의 기쁨과 행복이 결정되고, 돈에 내 마음의 심장을 꺼내 이식해 놓으면 경제 상태로부터 내 마음의 기쁨과 행복의 이유가 결정됩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인 피, 영적인 혈통을 이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으로서 육체적인 혈통상,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의 심장이 돈에 이식되어 있으면, 전혀 하나님을 모르면서 돈, 돈 하는 사람과 같은 혈통이라는 겁니다.
비록 이방인으로 태어났지만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에게 마음의 심장을 이식해서 기쁜 이유도 하나님 때문이고, 슬픈 이유도 하나님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우울해지고, 기쁨과 우울함의 모든 이유가 하나님 때문일 때에 드디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해준 것입니다.
오늘 얘기는 믿음의 속성 중에 세 번째의 속성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믿음은 편승(便乘)이라 이겁니다, 올라타는 겁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올라타게 되는데, 올라타게 될 때에 나타나는 일이 뭐냐 하면, 앞에서 말한 스포츠 세단에 올라탄 빼빼 마른 두 남녀가 자기들이 100미터를 몇 초에 달리는가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내 능력과 내 지혜와 나의 자질이 고려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얘깁니다.
비행기 타고 LA 가는 사람이 자기의 달리기 실력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얘기에요, 내 능력만큼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편승을 하는 삶이 이루어질 때.
내가 마음 심장을 이식한 후로는 내가 마음 심장을 이식한 그 대상의 능력과 그 대상의 한계만큼 나의 삶이 펼쳐지고 진행되고 제한된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심장이식을 해놓은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내 삶에서 일어나든지, 아니면 아브라함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겠다는 이 말씀이 아브라함 입장에서 내가 어떻게 복의 근원이 되느냐 마느냐 따질 이유가 없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심장을 하나님께 이식한 뒤로는 점보제트기와 같은 하나님께 편승한 것이고, 마음의 심장을 이식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이 땅에서 그 사람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대신 사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삶을 진행해 나가실 때 내 능력의 한계 따위는 고려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 내용이에요.
단지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 내 마음속에서부터 생겨난 소원과 계획을 따라서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당신의 작업장으로 삼으신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내 삶을 하나님께 대여해드리는 것처럼 돼버립니다.
그래서 대여된 내 삶의 현장에서 어떤 소원을 갖고 어떻게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얘깁니다.
내가 마음의 심장을 하나님께 이식한 뒤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만, 내가 이 땅 위에서 다른 소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계획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계획을 갖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야지’ 하면서 돈에 마음의 심장을 이식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소원이 생기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계획이 생기는 겁니다.
내 마음의 심장을 자식에게 이식했기 때문에 내 자식을 어떻게 키우려는 소원과 계획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하나님께 이식해놓고 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내 인생에서 이루고 싶으신 일들을 소원하고 계획하시고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에 내 소원과 계획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창세기를 12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끝나는 27장까지 쭉 훑어보면, 단 한 번도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자식을 주세요, 이 케케묵은 삶의 현장을 떠나서 새로운 땅,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게 해주세요!’라고 자기의 비전을 제시해본 적이 없습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오셔서 ‘내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 100세가 되면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 사라가 만민의 어머니가 되게 해주겠다, 너로부터 만왕의 왕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원해본 적이 없는 겁니다.
자발적인 인생구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하나님께 마음의 심장을 이식한 뒤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고 계시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시는 그 삶에 편승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편승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셨다’ 기억하세요,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었다’
그리고 19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18절의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랐다는 얘기와 같은 내용이지요.
20절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본문 자체를 오해를 합니다.
실제로 창세기 15장에는 언뜻 겉으로 보기에 아브라함은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그렇게 믿지를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100세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실 때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향하여 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어찌 100세가 된 남자가 아이를 가질까, 어찌 구십 세가 돼서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가 있을까?’ 하고 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낳게 해주신다고 하실 때 그렇게 단호하게 믿은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그러므로 지금 이 사도바울이 하는 얘기의 의미를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죽은 몸과 같은 곳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얘기는 무슨 말인가 하면 100세에도 아이를 갖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100세에 아이를 갖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일이 대단한 믿음이에요?
저는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제가 200세까지 살게 될 텐데, 200세가 되면 아내는 200세 하고도 5개월이 앞서 있게 되는데, 집사람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해도 저는 믿어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들을 낳게 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500세를 살게 하고 낳게 하신들 못 믿겠습니까?
또 저는 이것도 믿어요, 태평양을 홍해처럼 갈라서 내 자동차를 가지고 바닷길을 자동차로 달려서 LA에 도착하게 하신다고 해도 저는 믿어요, 하나님이 하시려고 그러면 못 하실 게 없습니다.
나는 진짜 믿어요, 그런 면에서는 아브라함보다 더 큰 것도 믿을 수가 있어요.
문제는 하나님이 나를 200세까지 살리시려고 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냐 하는 거죠.
하나님이 나를 200세까지 살려두시고 200세에 아들을 주실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문제인 거지,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면 못 믿을 게 무엇이겠어요?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100세 돼서 아들을 낳게 된다고 말씀하실 때, 사도바울이 보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뜻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 100세에는 아들을 못 낳는다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근데 아브라함이 창세기 본문에 가보면 흔들리지 않았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보잉747 점보제트기와 같은 하나님 안에 타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점보제트기가 13시간 만에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LA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을 할 때, 그냥 내버려 둔 거라는 얘기에요, 쉽게 말하면.
점보제트기가 그렇게 날아갈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타고 있는 내가 ‘나는 백 미터를 15초에 달릴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13시간 만에 인천에서 LA까지 도착을 하겠다는 거냐?’ 따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에요.
내가 올라타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 온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 올라타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하는 내용을 인간적인 상식과 계산을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니까 ‘할 수 있어!’라고 따로 그 내용에 대해서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시거나 만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거나, 뭘 하시든지 간에 내가 하나님께 올라탄 뒤로는 올라타고 있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계획과 소원을 따라서 자신의 능력대로 행하시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그러겠느냐 하는 편승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얘기에요.
계속해서 하나님께 올라타고 있었던 거지,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그 내용 하나하나에 대해서 ‘하나님이니까 할 수 있어, 하나님이니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며 믿었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여름이 돼서 아빠가 사랑스런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7살짜리 딸을 데리고 어떻게 여름을 멋지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결정을 합니다.
분당에 사는데, 분당에서 출발해서 영동고속도로로 강릉으로 옵니다, 강릉에서 설악산을 들렀다가 설악산에서 다시 남쪽으로 동해안고속도로를 따라서 내려가서 울진과 포항을 거쳐 부산으로 갑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놀다가 이제는 통영과 충무로 갑니다.
아름다운 광경을 보다가 남해로 해서 여수로 갑니다, 여수에서 태안반도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분당으로 돌아오는 계획을 세웁니다.
7살짜리 딸은 자기가 어떻게 강릉을 갈 것이며 어떻게 설악산으로 갈 것이며, 이런 걸 계산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아빠가 그렇게 간다고 하니까, ‘나는 아빠가 그렇게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아빠 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곱 살짜리 딸은 그냥 아빠만 보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빠가 부산을 간다고 그래도 통영에 간다고 해도 여수를 간다고 해도, 이 일곱 살짜리 딸은 ‘나는 통영에 갈 것을 믿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빠만 보고 있었다, 이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계속 아빠에게 편승되어 있는 것, 아빠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않는 것, 그러니 아빠가 통영을 가든 평양을 가든 그냥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다는 것이 아빠가 평양을 가겠다고 하는 말과 같은 말이지만, 이 일곱 살짜리 딸이 된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응, 하나님이 평양에 가시려고 하시는구나, 그러면 가시겠지’ 올라타고 있으니까.
이게 바로 믿음의 마지막 속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편승한 삶에서는 내가 소원하는 게 없습니다.
그냥 강릉에 아빠가 차를 몰고 왔으면, 경포 앞바다에서 ‘야, 멋지다!’ 하고 놀면 되는 거예요.
설악산에 올라가서 케이블카 태워주면, ‘아빠, 너무 좋아!’ 하면 된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마음의 심장을 꺼내서 하나님께 드렸으면 이제 이후로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삶의 내용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끌고 가실 것이니까, ‘된다, 안 된다’ 내 인생에서 내가 자기계발을 하네 마네, 점보제트기를 타고 있는 사람이 점보제트기 안에서 자전거를 타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라는 거예요.
내게 스펙이 필요해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에요.
이렇게 편승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마지막에 뭐라고 해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내어주신 바 되었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면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심겨질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게만 내 마음의 심장을 심는 일만 하고 있으면 정말 편한 편승의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믿음의 세 가지 속성, 행위 이전의 포지션에서 하나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심장의 이식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진정한 혈통이 되고, 정말로 편한 편승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는 이 믿음의 속성들이 오늘 하루 우리 안에서 활발하게 역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내안에 사시는 주님이 운전하고 주인답게 멋지도록 주님과 함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