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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성경본문 : 아가서 8: 6-14
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9. 그가 성벽일찐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찐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10.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12.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13.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14.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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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한 주간 동안 북한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에 6.25사변이후로 가장 큰 긴장감이 고조되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더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사랑에는 두 가지 욕망의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주고 싶다는 욕망이고,
둘째는 빼앗고 싶다는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주고 싶다는 사랑은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이지만 빼앗고 싶다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더더욱 중요한 사실은 주고 싶다는 사랑은 상대방의 영혼을 살리지만 빼앗고 싶다는 사랑은 상대방을 파괴하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주고 싶은 사랑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암논은 빼앗고 싶은 사랑으로 이복누이인 다말을 성폭행함으로 형제간에 무서운 칼부림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아가서를 통하여 사랑을 이루는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 설교를 떠올려본다면
첫째로 진정한 사랑은 조건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사랑은 닮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희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진정한 사랑은 함께 함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아가서를 통하여 사랑의 완성을 이루는 모습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세상에 사랑이 가물어 가는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생수가 되어서 사랑의 갈증들을 해결해 줄 때 우리 기독교에 다시 한 번 소망이 생기리라 기대하면서 본문 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1. 완성을 향하는 사랑은 친밀하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아가서가 보여주는 완성을 향하는 사랑의 모습은 친밀하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을 보면은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고 합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자신을 인 같이 마음에 두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부의 요구는 신랑과 함상 함께 있고 싶은 친밀함으로 욕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친밀함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집사람과 결혼하기 전에는 방금 전에 만나고 돌아왔는데 또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마음이 들어서 결혼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 집사람 가정에 찾아가서 아무 대책 없이 한달 후에 결혼한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돌아간 이후에 장모님과 집사람 오빠가 하는 소리를 듣고 집사람이 많이 속상했다고 합니다. 집사람이 잠든 척 하고 있는데 제들 사고처서 날짜 잡았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방 한 칸 얻어서 어렵게 결혼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집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친밀감이 지금까지 가정을 지키는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도 바로 함께하는 친밀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친밀감이 밀려올 때 예수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어서 말씀을 계속 보면은 6절과 7절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친밀한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랑을 죽음, 음부, 여호와의 불에 비교합니다. 죽음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자가 없고, 여호와의 불에 살라지지 않는 존재가 없습니다. 이보다도 더 강한 것이 예수님이 사랑인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과 39절을 보면은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추석 전 안타가운 죽음이 있었습니다. 어린 조카와 아들이 탄 차가 아파트 옹벽 낭떠러지를 앞둔 경사에서 미끄러지자 차 밖에 있던 엄마는 초인적인 힘으로 차를 막았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습니다. 모정은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엄마는 자신을 장벽으로 차를 막았습니다. 20초 안팎의 순간적인 일이라 주위에서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목격자는 “엄마에게 발리 피하라고 소리쳤지만 차에 깔려 죽어가는 순간까지 버텼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희생했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숭고한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 완성을 향하는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 아가서가 보여주는 두 번째의 완성을 향하는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8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은 결혼할 신부의 모습에 대하여 묘사를 하고 신부는 유방도 없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부는 준비된 모습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사랑을 통하여 결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 이대로 신랑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부는 신랑의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바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 자인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 신랑 되신 예수님과 영적으로 결혼한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의 신비는 무엇입니까? 처녀의 가슴에는 젖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엄마의 가슴에는 젖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모두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교회의 신부들입니다. 교회의 신부된 우리들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함으로 인하여 신령한 젖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신부된 교회에서 신령한 젖이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결혼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과 결혼한 교회가 신령한 젖이 나온다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김포한신교회가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 교회로서 신령한 젖이 나와서 생명을 살리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신령한 젖이 나오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김포한신교회를 통하여 영적인 생명들이 살아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예’ 라고 답변한다면 신령한 젖이 나와서 생명을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진정 예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건강한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어떤 조롱과 비방을 받는다 할지라도 교회는 세상의 희망입니다. 세상 그 어떤 곳도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곳은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인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며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제가 젖을 먹여서 나를 키워준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교회를 사랑합니다. “나의 어머니, 나의 교회여”라는 말은 동일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고 교회를 통하여 제 신앙이 성장하였습니다. 교회는 저를 신령한 젖으로 키워준 나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는 신령한 젖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살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의 어떤 조롱과 비방을 받을지라도 저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를 진심으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3. 완성을 향하는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완성을 향하는 사랑은 상대방을 위하여 인내함으로 자신의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9절에서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를 두르리라' 하였습니다. 성벽과 망대는 적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은망대란 일곱번 단련한 은으로 만든 망대라는 의미로 많은 연단과 인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신랑을 위하여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순결을 지키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마음보다도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더 강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영적인 신부들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영적인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절대적으로 우상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상을 섬기는 일들에 대하여 영적인 간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분을 위하여 죽을지언정 믿음의 절개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것은 '빛'과 '바다'와 '소금'이리고 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소금이 가장 순결한 것으로 인정을 받는데 왜냐하면 순수한 빛과 순수한 바다가 합쳐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소금처럼 순결하라' 고 하시지 않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소금 대신 '비둘기'를 말씀하셨을까요?
'비둘기'로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집비둘기'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집비둘기는 주인에게 아주 충성스럽습니다. 그래서 편지나 전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이 집비둘기를 훈련 시켜서 주인의 편지를 전달하게 했는데 그러한 비둘기를 '전서구'라 하였습니다. 수많은 비둘기가 무리를 지어 먼 거리를 날아도 주인이 있는 비둘기는 자기 주인이 보낸 곳에 정확히 찾아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은 '온순해라', '순진해라' '평화로워라' 하는 뜻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뒤섞여 살더라도 비둘기처럼 주인을 잃어버리지 말고, 오직 주님 한 분에게만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의 말하는 순결은 오직 주님 한 분만에게만 충성하는 영적인 순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에게 충성을 지키는 비둘기는 죽을지언정 결코 주인을 떠나지 않는 순결을 지킨다고 합니다. 우리도 비둘기처럼 예수님만을 섬기면 한평생 떠나지 않는 영적인 순결을 지킬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4. 완성을 향하는 사랑은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 완성된 사랑의 마지막은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나누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2절 말씀에서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신부된 여인이 순결한 믿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인내함으로 인하여 그녀와 함께 한자들도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신부의 순결한 믿음이 이웃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나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내 주변사람까지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할 마음은 나도 축복을 받고 내 이웃도 동일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우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정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사울의 아들로서 왕자였던 요나단은 자신보다도 다윗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가장 라이벌이었던 다윗을 향하여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자신은 그 다음이 되기를 바랐던 요나단의 마음은 지금도 찾아보기가 힘든 너무나 귀한 마음입니다. 이런 요나단의 마음을 알았던 다윗은 사울의 가문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을 왕의 식탁에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형제 사랑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형제애입니다.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생 베드로의 예수님에게 인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함께 생활할 때 언제나 앞서는 사람은 먼저 예수를 믿고 형이었던 안드레가 아니라 나중에 자신이 전도하여 예수를 믿었던 동생 베드로였습니다. 자신의 동생 베드로는 언제나 튀는 행동을 하였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수제자까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형인 안드레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동생 베드로에 대하여 질투나 비방이나 견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형인 안드레는 동생인 베드로가 더 잘할 수 있도록 든든히 후원하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나보다 더 늦게 믿는 사람이 교회에서 베드로처럼 튀는 행동을 하고 은사 받았네 하면서 앞서나갈 때 우리가 안드레나 요나단과 같은 선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안드레 입장이라면 더 이상 베드로 같은 인물이 교회에서 설치지 못하도록 질투, 비방, 견제 등을 통하여 그를 쓰러뜨렸을 찌도 모릅니다. 요나단과 안드레는 자신보다도 상대방을 더 크게 세웠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눈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성도님들이 요나단이나 안드레처럼 상대방을 나보다도 더 하나님 앞에 축복의 인물로 세우고 싶다면 하나님 나라가 여기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을 나눌 때 진정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국립묘지 옆에서 묘지를 찾는 이들에게 꽃다발을 파는 꽃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길거리에서 꽃다발을 팔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거지 노인이었습니다. 꽃가게 아들이 보니 자기 가게에서 판 꽃다발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국립묘지를 돌면서 묘지 앞에 놓여 있는 꽃다발들을 모아 파는 것이었습니다. 자본금 없이 장사하는 분이었습니다. 아들은 분개하여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노인을 고발해요? 그럴 수가 있어요? 남의 산소에 꽃다발을 갖다 파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눈이 많이 온 날이었습니다. 산소를 찾는 이도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수입이 없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산소로 가서 뿌려 놓고 왔습니다. 그 꽃다발을 주으러 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아버지는 웃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진심으로 나누는 사랑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여름에 한국에 왔던 릭 워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교회 성장을 위한 적절한 기후는 용납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결핍은 사람들을 쫓아 버리게 된답니다. 어떤 방법이나 행사나 기술도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대신 메울 수는 없다고 합니다. 사랑은 강력한 자석처럼 사람들을 끈다고 합니다.
오늘 아가서에서 완성을 향하는 사랑은 친밀하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자신을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갈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출처: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