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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날과 성도의 자세
전도서 7 : 11 - 18 (시편 50 : 15)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도서 3장 4절에도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형통한 날도 있고 곤고한 날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병행합니다. 그런데 형통할 때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어렵지 아니합니다.
문제는 곤고한 날, 환난의 날입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는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생로병사(生老炳死)의 사고(四苦)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는 것이 고통이요 늙는 것이 고통이요 병나는 것이 고통이요 죽는 것이 고통입니다.
환난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 귀천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리고 환난의 날은 예고 없이 갑자기 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병은 눈썹에서부터 떨어진다“고 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미신이지 기독교의 진리는 아닙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환난을 당합니다. 아마 예수 믿어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을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환난을 당합니다. 아마 예수 믿어서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예수 믿지 않을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 어떻습니까! 모든 환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 성경의 교훈은 그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마지막 절을 보세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6장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과 다름없이 환난을 당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병이 나서 입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사업에 실패해서 고생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사랑하는 식구를 갑자기 잃고 슬퍼합니다.
전에 요셉같은 청년을 보세요. 그는 본래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고이 자랐습니다. 부모의 많은 총애를 받으면서 커 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환난의 날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어린 소년의 몸으로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몸으로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유혹을 잘 이겼으나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고생할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청년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살아보려고 힘쓴 사람입니다. 그러나 원치 않는 환난을 당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도 환난을 당합니다. 곤고한 날이 있습니다.
욥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욥으로 말하면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면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자, 이만큼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신앙을 가진 욥에게 뜻하지 않은 곤고한 날이 닥쳐왔습니다.
욥의 그 많던 소유가 스바 사람에게 빼앗기게 되고 남은 것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다 살라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대아 사람이 달려들어 욥의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재산의 피해를 보게 됐다고 보고가 채 끝나기 전에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차리고 같이 화목하게 즐기던 십 남매의 자녀가 거친 들에서 태풍이 와서 집에 모퉁이를 쳐서 그 집에 깔려 죽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욥기에 기록된 말씀에서 욥의 자녀 십남매는 매우 사이가 좋은 화목하는 형제 자매였습니다. 아들들이 생일이 되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형제들과 누이 셋을 청해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욥은 그런 때는 특히 하나 하나의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왜요? 혹시 그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해서였습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바로 깨끗이 살아보려고 애쓰던 하나님의 사람 욥도 곤고한 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닙니다. 어느 민족 국가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가서 요셉이 사는 날 동안은 후한 대접을 받으며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세상을 떠나고 요셉의 은공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즉위한 후 갑자기 예고없이 곤고한 날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에 잡혀가서 7년동안 포로로서 핍박을 받을 때에도 환난의 날은 예고 없이 임하게 되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닙니다. 우리 한국 민족의 역사를 보아도 환난의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고구려 때 수양제가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침노해 온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난의 날이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몽고가 침략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조 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환난의 날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36년간이란 긴 세월을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1945년 8월 광복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38선이 생겼고 공산당이 북한을 침략해서 아직도 우리 동포 1천 6백만이 북한 철의 장막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곤고한 날입니다.
그뿐입니까? 그 동안 6.25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그 후에도 우리 남한만 하더라도 4.19학생 혁명이 생기고 여러 가지 곤고한 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물론 남한 땅 대한민국은 그래도 비교적 이런 자유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만 먼 앞날을 내다볼 때 38선으로 두 동강이가 나서 있는 이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사실 이것은 이 민족의 곤고한 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국가 민족적으로 곤고한 일을 당할 때 할 일이 무엇입니까?
먼저 안할 일이 있습니다.
가령 곤고한 날에 불평 불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본래 성품이 무엇이 잘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지마는 무엇이 좀 잘되지 않는 것 같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대개가 불평하고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나 사회를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곤고한 날에 잘못하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을 이탈하려고 합니다. 아주 절망 상태에 빠집니다. 자살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이처럼 세상을 비관하여서 이탈하려는 데서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또는, 곤고한 날에 반항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겐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아니하고 그저 될대로 되라고 내맡겨두는 태도, 포기 내지 반항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사는 길이 아니고 오히려 멸망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는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퍽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극적인 말씀이라고 봅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곤고한 일을 당하고 그런 날을 만나기 마련인데 이런 때에 불평 불만하고 낙심하거나 자포자기 한다든지 반항을 한다고 하면 솟아날 길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더 솟아나올 수 없는 깊은 구렁으로 더 들어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원치 않는 불행을 사실대로 즐거운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서 기자는 “생각하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한한 실망을 무한한 희망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숙명론자들이 그 숙명을 비통하게 맞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는 참으로 나의 병이라 내가 담당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곤고한 날이 이를 때 조금이라도 도피하거나 잊어버리려 하는 태도를 가지지 말고 “내가 이 고통을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가 주어진 가시를 면류관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세요.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어떤 귀신들린 여자를 불쌍해서 고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점쳐서 수입을 갖던 두목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끌고 관원에게 갖고 가서 무고해서 많은 매를 나중에는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이 곤고한 날에 억울하고 분한 생각 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 날 밤이 깊을 때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때 뜻밖에 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그날 밤에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 믿고 그 온 집에 구원을 얻게 되고 빌립보에 훌륭한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 뿐만 아닙니다. 그의 전 생애가 그랬습니다. 그는 온 세계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지만 그 뜻대로 되지 아니하고 오랜 세월을 감옥 안에서 지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 에베소에, 골로새에, 디모데에게, 디도에게,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들을 오늘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없어서 안될 요긴한 불후의 저서가 되었고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창조적인 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곤고한 날이 우리에게 임한다 하더라도 그날이 절대로 우리에게 손해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곤고한 날을 당할 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 하고 말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병 중에서 곤고한 날을 당하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왜 이런 어려운 병을 주실까?
내가 생각하고 꿈꾸던 대로 안되어 곤고한 날을 당하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내 꿈을 왜 안이뤄 주실까?
경영하던 사업이 큰 실패를 보아 곤고한 날을 만났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실패를 통해서 내게 무슨 유익을 주시려는가?
사랑하던 분을 멀리 보내는 곤고한 날이 닥쳤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이 실패를 통해서 내게 무슨 유익을 주시려는가?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곤고한 날이 임하는데 그때 걱정하라, 슬퍼하라, 염려하라, 생을 포기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적극적인 생활 태도입니까?
이런 사람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전에 싱거(Singer)라는 사람은 실직하고 부인의 삯바느질에 생활을 의존하고 있었는데 밤늦도록 손을 바느질하는 것을 보고서 “내가 저 아내를 어떻게 도울 수 없을까? 깊이 생각하는 중에 나중에 연구해 낸 것이 재봉틀(Singer)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곤고한 날에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하였습니다.
“부른다”고 하는 말은 “찾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큰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부르고 찾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중병에 걸려 고생할 때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환난의 날에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불러야 그를 만나고 살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라’를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곤고한 날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느혜미야가, 다니엘이, 에스겔이 사무엘이, 에스더가 백성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의 청년 사사로서 자기의 백성을 인도할 때 블레셋 원수 나라에서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람들이 얼마나 겁이 나서 그런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미스바의 모든 사람을 모아 놓고 어린 양으로 하나님이 앞에 번제를 드리며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큰 돌풍우가 일어나게 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대오가 혼란하게 되었고 이 기회를 타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타나서 습격할 때에 이 블레셋 사람들이 쫓겨서 멀리 국경 밖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거기에다 ‘에벤에셀’이라는 돌비석을 세웠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의 날에 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적은 옛날에만 있은 것은 아닙니다. 20세기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의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하면 이 환난이 변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곤고한 날이 임했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 환난의 날이 임하셨습니까?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하세요.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의 역사를 잘 아십니다. 그이는 큰 환난의 날에 산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불탈 때 자기 집도 불타고 부모도 다 피상 당했습니다. 이 외로움 젊은이는 외국으로 멀리 잡혀갔습니다. 외국 왕궁에서 살 수밖에 없던 다니엘이야말로 환난의 날에 살던 사람입니다.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고 낙심하려면 얼마든지 낙심할 수도 있고 악하게 되려면 얼마든지 악하게 될 수 있는 환경에 있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 다니엘은 환난의 날에 오직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외국 궁중에서 사는 몸이지만 금주를 하고, 우상의 제물로 쓴 고기를 먹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와 같은 청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을 받았습니까? 외국 궁중에서 살았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도 다니엘과 같은 청년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으세요. 그러면 반드시 건져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당하는 환난이 변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