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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강해-10 회개
(스 10:1-15)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또는 회심이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부산을 향해서 가던 사람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그 방향이 정 반대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인생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이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돌이킴을 보고 유리는 흔히 회개라고 말을 합니다. 또는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회심이 그 마음의 중심을 돌이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회개는 그 삶의 모습까지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세상에서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졌던 죄악들을 회개할 것입니다. 남을 미워했던 일,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했던 일... 등등을 회개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회개라기 보다는 자기 죄를 자백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9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그 잘못함을 빌면 분명히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를 비는 것이 단순히 입술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온전한 자백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던 삼십 팔년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후에 성전에서 다시 그를 만나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양심에 가책이 된 사람이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고 그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다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언제든지 죄를 지어도 용서함을 받을 수 있으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께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 이제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함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마음의 변화는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가 아니라, 이제는 죄를 범치 않겠다는 결심이 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일어난 부흥의 역사,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소망 없던 저들 가운데 일어난 이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저들 안에 있는 죄의 문제였습니다. 저들이 끊어 버리지 못한 그 죄의 문제가 부흥의 발목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흥을 가로막는 것이 우리의 환경이나, 우리를 핍박하며 대적하는 자들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힘든 시기, 핍박과 대적이 극심했던 시기에 오히려 교회는 더욱 순수해지고, 더욱 강력해지며 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때의 교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나라로부터 보호받고, 재정적으로 풍성해지고 세상적으로 그 힘이 강력해질 때, 오히려 교회는 연약해지기 시작했으며, 썩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교회는 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인 나태함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내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 저러한 문제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상황이 조금만 좋아지고, 몇 가지 문제들이 해결되면, 보다 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늘 우리가 스스로 속는 생각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개인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언제 가장 하나님 앞에 열심히 나아갔으며, 언제 하나님을 가장 찾고 의지하며 은혜 생활을 하셨습니까? 언제 그 믿음이 가장 좋았었습니까? 아마도 돌아보면, 상황이 좋았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참으로 힘든 시기에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에 그 믿음이 온전히 서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우리의 상황을 핑계하며, 내 앞에 있는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한다고, 충성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나를 더럽히는 것이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부흥의 최대 걸림돌은 재정적인 어려움도, 거리가 너무 먼 것도, 대적들이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죄의 문제였습니다. 이제 그 걸림돌 앞에서 저들은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그들의 죄 앞에서 에스라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보면서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탄식이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의 적이 바로 죄의 문제임을 깨닫고 그 죄 앞에서 내 마음을 찢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탄식이 그저 탄식에서 끊나 버린다면, 그것은 온전한 탄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그 죄로 인해서 마음을 찢었다면, 탄식했다면, 이제는 그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우리의 믿음을 말씀하면서, 참 믿음이란, 바로 그 삶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믿기 때문에 우리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고,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도 100년동안이나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직 그 길만이 살 길임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재물과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다 쏟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의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세상적으로 볼 때, 엄청나게 손해보는 일, 미련하게 보이는 일, 산에서 그 어마어마한 방주를 짓는 일, 그것은 바로 노동이 아니라,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과 지옥을 믿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귀한 분임을 믿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갑니까?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갑니까? 주님 오심으로 이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과연 이 믿음들이 있습니까? 분명히 증거되고 있습니까?
노아가 산위에서 방주를 짓는 것, 그의 모든 삶을 거기에 다 헌신하고 있는 것,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은 물로 심판 받을 것을 믿는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그 삶을 통해서 그 믿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증거들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 있습니다 내 말과 행동 속에 있으며, 내가 살아가는 모습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믿음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믿음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내 남편에게, 이웃에게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죄에 대한 탄식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일어났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들이 함께 심히 통곡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와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잡초가 참 잘 번식하고 자라는 것처럼 죄 역시 잘 번식하며 자라갑니다. 그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잘 합니다. 하지 말라고 막아도 잘 합니다. 마치 누룩처럼 금방 온 덩이에 퍼져 버립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 이 장면은 에스라의 죄에 대한 탄식이 온 백성으로 퍼지는 모습입니다. 회개의 운동이 번져가는 모습입니다. 믿음이 전염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저 집사 때문에 교회가 어려워, 저 집사 때문에 속이 상해 교회 못 다니겠어, 저 목사 때문에 저 장로 때문에 저 권사 때문에 내 남편 때문에 우리 아이들 때문에 내 이런 저런 문제들 때문에......] 라는 말들이 들어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 가슴을 치며, 탄식하며 마음을 찢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자기 죄악임을 고백하는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이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구체적인 저들의 회개의 역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그 죄를 버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참된 탄식은 그 죄를 버리는데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자기 잘못을 뉘우쳤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그 잘못을 고치느냐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 아버지의 회초리 앞에서 아무리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그가 그 의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말합니다. “................................”
자기들의 죄를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와 그 소생들을 다 내어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도울테니 에스라는 일어서서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는 참으로 지나친 처사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백성 가운데 있는 죄악을 참아 보지 못하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에스라가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 그 죄로 인해 근심하며 식음을 전폐하더니, 드디어 그 백성들에게 나타나 공포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일 안에 다 모일 것을 공포합니다. 오지 않는 자들은 재산을 빼앗고, 쫓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삼일 안에 모든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에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비로 인하여 모임이 연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중에 백성들을 모여서 그들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버리기로 작심하고자 했을 때, 꼭 방해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결국은 결단하지 못하고 그 시기를 넘기고 넘기고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버릴 때에는 단호해야 합니다. 그 일을 가로막는 일이 있으나 거기서 주저앉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비가 억수로 왔으나, 그 모임은 속개됩니다. 그 우중에 에스라가 일어나 모인 무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여러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처럼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탄식하며 근심하며 그로 인해 식음을 전폐하고 울며 기도할 정도로 가슴을 찢는 자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에 대해서 이처럼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온 성도들을 그 말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의 말을 듣고 무리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순간적인 감정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조직적으로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위해서 방백들을 세우고 조사하여 철저하게 할 것임을 말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반대하는 반대자가 있었습니다. 15절에 보면,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서 그 일을 반대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로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저희와 의견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그 일이 멈추어지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에 걸림이 있고, 반대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약 3개월간에 걸쳐서 그 조사를 다 마치고 저들이 맹세한대로 그 일을 실행합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제사장의 가족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들이 그 죄를 다 과감하게 버리게 합니다. 그 때 조사된 사람들의 명단이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이 죄를 버리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맨 마지막 절 44절에 보니까, 이 일은 자기 아내와 그 자녀들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이방 여인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자기 아내이고, 자기 자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죄에 탄식과 뉘우침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모습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그 무엇보다도 힘든 문제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 남편이나 아내하고 이혼하라는 말씀으로 적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는 아내의 정결한 행위를 통해서 남편을 구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우리의 단호해야 할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죄를 버리지 못하는데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는 이 모습은 우리의 모든 핑계하는 입들을 막는 놀라운 결단인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 속에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서의 부흥의 역사는 여기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됩니다. 느헤미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역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참 부흥, 참 회복의 역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에스라서를 마치면서, 바라건대, 우리 안에 부흥에 대한 갈망이 더욱 뜨거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참 부흥의 역사가 우리의 심령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불길이 한국 교회에 온 나라에 번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