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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3: 19 옥에 있는 영들에게 - 벧전 3: 22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벧전 3: 19 옥에 있는 영들에게 -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절의 말씀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 절도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1]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1)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타난 진리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6: 26).
(2) 루터교회는 본 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서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3) 또 다른 이들은 본 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 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옛날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이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면 기독교 교리는 엉터리가 돼버린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도 불신자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 또한 그 대상이 노아시대의 불신자들뿐인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는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다. 죽음 이후에는 그가 이 세상에서 뿌린 대로 거두는 일만 남았다. 사도 바울은 최후 심판 날에는 모두가 각자 행한 대로 최종 운명을 선고받게 될 뿐이라고 가르쳤다.
* 롬 2: 6-8 -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 갈 6: 7-8 -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고후 5: 10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처럼 성경은 죽음 이후의 회개와 구원의 기회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의 상태대로 심판을 받고 그에 따른 보응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추론할 수 있다.
2]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본문에 있는 영은 누구인가?
만약 영을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전파하셨는지, 아니면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파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다면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전파하셨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 '에녹의 영'이 음부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파했다(Nestle, Harris, Moffatt, Goodspeed).
Ⓑ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부활하기까지의 동안에 노아의 홍수 때 멸망하여 음부에 갇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파했다(Bigg, Hunter).
Ⓒ 그리스도가 성육신 전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당시의 패역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했다(Jerome, Augustine, Aquinas). 이 견해에 따르면 본 절의 '옥'은 이 세상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전도하신 것이다(Blum, Dalton, Kelly).
이러한 견해들 중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20절; 1: 10, 20. 벧후 2: 5).
벧전 3: 20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고 심판을 120년간 유보 하셨다.
* 창 6: 3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 동안 노아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
* 마 7: 13-14 –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비교적 적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적은 수에 들기를 원하며 감히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1]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1세기 때에 묵시 문학에서 노아의 홍수는 종말에 오는 심판의 예표로 종종 이용하였다.
* 마 24: 37-39 -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 벧후 3: 3-10 - ③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④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⑥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⑦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⑧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⑨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⑩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또한 신약 시대에 와서 노아 시대의 홍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로 비유된다(21절). 그래서 홍수 가운데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보존된 '의의 상징'이었다.
* 히 11: 7 -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반면에 홍수에 멸망당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로 그리되었다. 하나님은 '방주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 창 6: 3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방주에 들어갈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 롬 2: 4 -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 벧후 3: 9 -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서 '방주'는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Justin, Tertullian) 노아 시대에 120년을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죄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벧후 3: 9).
2]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 겨우 여덟 명이라.
'물로 말미암아'(디 휘다토스)는 '물을 통하여'라는 의미이다.
'방주에서'(에이스 헨)은 '방주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이 물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음을 시사한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지만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물이 안전하게 방주를 밀어 올림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한 구원을 상기시켜준다. '여덟 명'이란 숫자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불과 소수만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특히 고난을 받은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Kelly).
벧전 3: 21 너희를 구원하는 표 -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 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물로 받는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 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물은 세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세례의 형태에 참여한 것을 곧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참여하여 연합되어야 얻을 수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표시이다. 실제로 노아 홍수 때의 물은 세례시의 물의 '실체'(안티튀폰)이고 세례 때의 물은 '표상'(튀포스)이다(TDNT).
2]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본문은 세례의 중요성을 배제시키려고 함이 아니다. 단지 세례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로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육체의 더러운 것'에 나타난 소유격을 주격으로 보아서 '육체가 더러움을 제거함으로'라는 의미로 보나(Bengel) 세례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까닭에 심령의 죄를 씻어내는 것이다.
* 히 10: 22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벧전 3: 22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언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입증하는 바이다.
마가복음 16: 19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확증하였고,
사도행전 1: 9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또 로마서 8: 34에서도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라 했으며,
히브리서 1: 3은 '[그는]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8: 1은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히브리서 10: 12은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브리서 12: 2은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확증하셨다.
또한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1] 그는(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그리스도께서 고난 후에 승귀하여 영광의 자리에 계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오르사'(포류데이스)는 19절에서 사용되었던 분사로서 계속적인 승리의 전진을 나타낸다(Stibbs).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권세와 모든 피조물로부터 존귀를 받으시는 영광 중에 거하신다.
* 시 110: 1 -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 롬 8: 34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2]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저에게) 복종하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존재들 즉 '천사'와 '권세', 그리고 '능력'은 강력한 힘을 지닌,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의 구별 없이 영적 세력을 의미한다.
* 롬 8: 38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고전 15: 24 -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 엡 1: 21 -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이들은 영적 존재로서 일시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결국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자.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삼 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그는 왕 중의 왕이시다.
둘째, 이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자.
우리는 옛날의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오늘날 세상에서 세상의 불경건하고 음란한 풍조를 멀리하며 배격하자.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들같이 오직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며 순종하며 살아가자.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자가 되자.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자.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겪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세상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의 복음을 위해, 그의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