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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 시리즈 44
“주 안에서의 생활”
성경: 빌 4:4-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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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4복음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공관복음
과 요한복음으로 나누어 지는 것과 같이 옥중서신에도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의 세서신은 기록된 때도 같고 전달된 것도 두
기고를 통하여 전달이 되는 동시에 빌립보 교회에 전해집니다.
또한 세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교리 칙으
로서 에베소는 교회론이고 골로새서는 기독론이며 빌레몬서는 그리
스도의 화해와 용서론 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는 고리를 떠나서 성도의 실제 생활면을 말하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더구나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
대하여 끝까지 돕고 있는 일에 대한 감사장의 편지인 동시에 이 편
지 속에는 바울의 철학이 있고, 사랑이 있고, 기쁨이 포함도고 있
음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서 구속을 받았을 때 생활의 내
용을 보여준 성경인 것입니다.
사람은 언어의 구사법에 있어서 잘못을 올바르게 지도하고잠 하
는 권면의 말씀은 어딘지 모르게 권면하는 사람이, 권의를 가지고
권면 받는 사람에게 명령적 표현이 되겠지만 감사의 표현이란,사랑
과 기쁨이 있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마음가짐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의 애정의 서신인 동시에 옥중에 살고 있는 바울
의 생활철학적 서신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돔 만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면 바울이 감사
하면서 살아 간 아름다운 생활처럼 산 신앙이며, 참 믿음일 것입니
다.
어느 학자가 빌립보서 4장을 연구하다가 바울이 사용한 전치사를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안에서(In christ)는 구원을 뜻하는 것이고
둘째, 예수님을 통해서(Through christ)는 성격을 의미하며
셋째, 예수님을 위하여(For christ)는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넷째, 예수님과 더불어(With christ)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함
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생활속에서 나타나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러한 생활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1. 기쁨이란 관용 안에서 입니다.
본문 4절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
라"고 합니다. 이 기쁨의 성격은 두가지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는데
첫째, 주 안에서의 기쁨입니다(Rkejoice in the Lord).
시16편8-11절에 "내가 여호와를 향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
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주의 앞
에는 기삐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
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비교해서 말하기를 시편4편7졀에서 "주께서 내 마
음에 두신 기쁨을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
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구원받은 자의 기쁨이 주 안에서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항상 기뻐하라(Rejoice alway)입니다.
이것은 기쁨의 연속적인 계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란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희노애락이 있는
법인데 이토록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기쁨이란 주 안에서만 가
능한 것입니다.
살전5:16절에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기쁨이 갈5:22절에서는 "희락"이 성령의 열매로써 나타나고
있는데 결국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기쁨이란 뜻
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안에서의 이러한 기쁨이 있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
입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1) 관용적 태도입니다(Moderation)
관용이란 중용이요,온건하다는 뜻입니다. 온건주의를 Moderatism
이라고 하는데 이 원어는 에피에이케가스인데 이것은 에이코스라는
이성적인 의미에서 온 말입니다.
Macknight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관용이란,박해에 대한 온유성,중
상자에 대한 용서와,용의,사무처리의 공정성,남의 성격과 행동을
비판함의 공평성,성격의 친절성,그리고 감정의 전적인 절제등을 의
미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을 유지할 수 있지만 자기 생각대로
살고 용서를 하지 못하고 이해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없
는 사람의 심리는 언제나 불만과 비판과 원망으로 차있기 때문에
기쁨을 잃게 되어서 사람을 대할때는 자기에게 좋게하는 사람, 자
기보다 약한사람,연령적으로 낮은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만 여러사
람과 포괄적으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성령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딤전3장3절에서 교회의 감독자는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
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라고 하면서 그
인격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딛3장2절에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관용하는 마음에는 악의가 없습니다. 미움도 없습니다. 원망도 없
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태평양 같은 넓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는것입니다.
2) 주께서 가까우시니라(The Lord at hand)
이것은 초대교회의 구호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마라나타" 즉 "주께서 오신다"는 구호를 부르면
서 기쁘게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초역사적 사건
이기 때문에 지금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초월하는 것
입니다. 여기에 그 무엇도 핑게나 이유가 될 수 없고 주의 재림에
있어서 오직 주님을 맞이하느냐?맞이하지 못하느냐?의 실제적인 사
실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것,정신적인것,감정적인것,물질적인것,인간적
인것,가정적인것,개인적인것,모두가 무시되어야 하고 이러한 사실
을 초월하고 사는 사람이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 기쁨을 빼앗길 수
는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아뢰라(Made known unto God)
하나님께 우리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라는 것으로서 기
도로 우리의 요구를 구하는 생활은 염려를 잊고 기쁨으로 사는 방
법임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필요와 위험을 느낄때에 그것이 세상과
합하면 염려가 되고 하나님께로 향하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요14장1절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선언할때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무조건 근심말고
나를 믿으라고 막연하게 하심이 아니고 방법을 주셨는데 요14장6절
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것은 이길이 바
로 생명길이요 진리의 길인데 근본적으로는 근심과의 관계에 있어
서 근심을 하지 않고 기뻐해야 할 길을 의미했고 이 길의 방법을
말씀하실 때에 요14:13-14절에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
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
가 시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요14장16절에도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
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하여 성령을 주시고 이 성령
은 요한복음 14장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
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
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 안에서의 기쁨인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는 자는 이토록 주 안에서 항상 기쁘하는 생활을 하
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만족이란 능력 안에서 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전도서 1장8절에서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적인 것으로는 만족을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
다.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차 있으므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다가
파멸에 이르는 것이 인간역사의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아도 자신의 만족을 채우려고 인신매매,부녀자
납치, 가정파괴범, 살인사건,마약중독등등 이 세상은 더욱 더욱 깊
은 지옥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 육신의 소욕대로
만족하게 살려고 할때 죄악은 발생하고 더욱 더 허무감으로 인하여
허탈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실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빌4장11절에서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라고 합니다. 스스로 만
족함을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 만족은
첫째,비천에서의 자족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족(Contentment)이란 안으로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서 부족을 보충하심으로 만족해지는 것을
자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딤전6장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고 또한 딤전6장
8절에도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
라"고 했읍니다.
히13장5절에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
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둘째,풍부에서의 만족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으로는 우리의 욕망을 채울 수가 없읍니다.
잠언 30장7-9절에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
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 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
려워 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탐욕이 없는 만족입니다.
다윗은 시편17편15절에서"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합니다. 또 시편63편5절
에도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고 했고 시편90편14절에는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
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만족은 주의 형상으로 그의 영혼이 만족했고 주의 인자로
평생을 만족하게 살수 있었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살든 사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어럽든 사람이 축복을 받아 잘 살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있
어서는 안 되고 우리 심령의 만족이 환경과 여건의 변화에 따라 변
하는 것은 진정한 만족한 삶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의 만족입니다.
본문13절을 John A.kninght라는 사람은 "I am strong for all
things in the christ who empowers me(내게 능력 주시는자 그리스
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이 능하다)"라고 번역하면서 능력의 출처를
그리스도에게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상근 박사는 능력이란 두나미스로서 고전2장4절에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
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한 말씀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두나미스
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즉 인간적인 면에서 진정된 만족은 성령의 능력안에서만 가능하
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옥중 생활속에서 그토록 만족할 수 있었든 것은 성
령의 은혜로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능력을 받아서 우리
의 모든 여건속에서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은 만족
한 환경이 못되지만 만족하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한다고 보
는 것입니다.
3. 풍성이란 축복 안에서 입니다.
본문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것을 채우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이 나오기까지의 근거가 되는 말씀은 15-18절 입니다.
풍성이란 축복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축복을 받게 된 동기
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고 받는 일에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사역을 시작할 때에 즉 복음의 시초에서부터 지
금 로마 옥중에 있는 시간까지 계속적으로 물질로 바울을 도와주고
성도들은 바울에게서 엉적 은혜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고전 9장1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우리가(사도들)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물질적인 것)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 합니다.
또 갈6장6절에서 "가르침을 받는자는(성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하나님의 종들)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합니다. 이토록
주고 받는 일에서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2) 심는 대로 거두는 일입니다.
고후9장6절에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
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헌금관이란, 헌금을 받는자 보다는 바치는 성도에게 유익
한 과실이 번성하도록 함이라고 합니다.
본문17절에서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
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곰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헌
금에 대하여는 18절에서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의 헌금관과 축복관을 옳바르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
"영광가운데"는 축복을 받는 시기에 대한 것인데 "영광스럽게"로
번역하면 현세에의 받는 시기를 말하는 것이고 "내세의 영광스런
생명으로 보면 내세의 하늘나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주신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의 근원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말씀의 약속대로 지
켜질때에 그 약속이 이루어 지는 것이요 결과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주 안에서의 생활이란 제하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쁨의 생활은 주 안에서 누리면서 사는 것이요, 만족한 생활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이며 풍성한 생활은 축복 주시는 자 안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기쁨, 성령안에서의 기쁨,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
이것이 주 안에서 생활하는 자의 축복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설교전문학교 글쓴이: 임평구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