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마트로시카 불태우기
하나님이 우리를 주님과 하나가 되게 만드셨음에도
우리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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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죄인이 되려면 죄를 몇 개나 범해야 하나?
이 질문이 바로 내가 “순수한 복음”(Naked Gospel) 세미나 동안에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통 보는 것은 대부분의 청중이 입을 모아 하나라고 답하는 것이다. “하나만 범해도 죄인이 됩니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를 하나도 범하지 않아도 죄인이다. 즉, 제로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
당신의 생각을 알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속임수에 빠뜨리는 질문이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보통 사람들이 본성에 대하여 믿는 바를 보여준다. 인간의 본성 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죄인이 된다’는 생각을 수용하면, 우리는 다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 어떤 존재가 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한다.
● 어떤 존재가 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한다.
● 그래서, 죄인이 되거나 성자가 된 사람은 죄인이나 성자가 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성경적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 때문에 비그리스도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들이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는다. 그런 생각 때문에 신자가 거듭남을 통해서 자신들이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된 것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임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때서야 우리는 출생에 의해서 즉, 새로운 탄생에 의해서만 우리가 성자가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성자로
태어남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는 생각은, 세상은 죄인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성경의 조명을 받으면, 우리는 또한 죄인된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에도 수긍한다. 어쩌면 영적인 죽음은 낮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세상은 타락했다고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을 통하여 100%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는 문제에 이르면, 우리는 말을 더듬거린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신자들은 “출생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말을 세상에는 옳을지라도 우리들 자신에게는 동의하지 못한다.
천주교의 사상적 흐름 가운데서 보면, 성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적을 행하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성취한 사람들이다. 개신교의 사상적 흐름 가운데서 보면, 성자는 자주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우리들이 더 편안해 하는 말은, 신자, 그리스도인, 또는 구원 받은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물론, 우리는 여기에 재빠르게 은혜로 구원 받은 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성자라는 말은 (“거룩한 사람”이라는 의미거나,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고 따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 많은 사람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용어다.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를 묘사하기 위한 단어로 의롭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때로는 오만함의 전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설명하실 때 사용하는 바로 그 용어들이다. 우리의 허물과 약점을 다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단어를 편안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출생이 신분을 결정한다는 개념을 우리는 더 깊이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방식을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놀라운 것들을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렉터
가문과
팔리
가문
나의 성장기 때, 우리는 북부 버지니아에 있는 말 농장에서 살았다. 우리의 이웃으로는 단 한 가정, 렉터 가문이 있었다. 렉터네 집에는 사내 아이만 네 명이 있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우리는 말을 탔고, 낚시를 하러 다녔으며, 모든 탈 것을 이용하여 농장 주변을 달리는 경주를 하기도 했다.
렉터네 집 두 아이는 나보다 나이가 더 들었고, 나는 그들을 존경했다. 그들은 신사다웠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것을 나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렉터네 집 사람처럼 옷을 입었고, 그들처럼 헤어스타일도 바꾸었다. 심지어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도 그들을 따라 했다. 거의 매일, 나는 그들의 집에 갔고, 그들과 점심을 먹었으며, 그들의 개, 스키퍼와 놀았고, 뒤뜰에서 공놀이를 했다. 나는 마치 렉터 가문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이 개입되었다. 즉, 가족 모임이 있을 때가 있었다. 나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비록 나는 렉터네 집안 사람들처럼 꾸미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지만, 나는 렉터 가문 태생이 아니었다. 나의 출생증명서는 언제나 팔리 가문이라고 말한다. 비록 내가 어떻게 해서 렉터 집안 사람으로 입양된다 하더라도, 나는 렉터의 혈통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출생이 신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우리의 영적 신분과의 상관성을 어쩌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지구라는 행성에 나타났을 때, 우리의 출생증명서에는 아담의 가족이라고 씌어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옷장에 도전하는 가족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여기서 말하는 아담의 가족은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담의 혈통에서 자연적인 출생을 했으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본질상 죽은 상태였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그들이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과 다른 아이들을 낳기 전에 발생했다. 그래서 가인은 아빠의 코를 닮고 아벨은 엄마의 눈을 닮았으며, 그 아이들은 또한 영적인 유전형질을 물려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결과로 인류는 출생부터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었으며, 바로 처음 자손들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우리를 영적으로 살게 할 수 없다. 마치 내가 스스로를 렉터 가문의 일원으로 만들 수 없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는 행동을 개선할 수 있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우리를 아담의 영적인 혈통에서 우리를 옮겨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형상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아담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아담의 자녀들이 아담의 형상을 닮았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세기 5:1~3
그 대조는 여기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으나, 아담의 아들들은 아담 자신의 형상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에 기자는 반복한다: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것인가? 구원 받은 이후에는 그것이 맞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고 그의 형상으로 새롭게 됨을 입었다(골로새서 3:10). 그러나 원래, 우리는 아담, 즉 첫 사람의 자손들이다.
출생에 있어서, 우리는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어야 죄인이 되냐고 물었다. 대답은 제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의 죄다. 하지만, 그 하나의 죄는 우리가 지은 것이 아니다. 로마서 5장에서 말하기를 한 사람의 죄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12절)
● 많은 사람이 죽었다(15절)
●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았다(18절)
●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19절)
아담의 영적인 죽음은 그 자손들 모두를 영적으로 죽은 채로 태어나게 했다. 아담의 죄는 우리 모두를 정죄했다. 그리고 아담의 죄는 우리 각 자에게 죄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아담의 가문에서 온 것이지 우리 각자가 한 일에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렉터 가문을 흉내 낸 것처럼, 나는 남은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을 따라 살려고 아무리 엄격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주님의 영적 가문에 나를 넣지는 못할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출생으로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출생에 기인한 것이며 행위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비로소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이제 우리에게 종종 오용되고 남용되기까지 한 거듭난다(born again)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할 것이다. 이 구절은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출생으로 우리의 영적 혈통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왜 예수께서 그런 용어를 사용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각 사람의 진정한 필요는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 유대 지도자에게 새로운 생활로 바꾸라고 하시거나, 더 열심히 노력하라시거나, 삶의 방식을 더 발전시키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에, 주님은 일의 중심인 출생에 대해 언급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종교적인 옷을 차려 입은 행동 개선 프로그램으로 여기지만,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은 실제로 본성을 바꾸는 것이었다.
판결이
나다
우리의 문제가 가문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해답 또한 가문과 관련이 있다. 만약 우리가 아담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의 가문으로 들어가야 온전한 변화가 일어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리라”(고린도전서 15:22).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사람은 단지 어떤 교리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단순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만도 아니다. 바로 그 날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신뢰한 날에, 그 사람은 수술을 받게 된다. 그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알아챌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수술이 영적이기는 해도, 의학적 수술에 비해 덜 실제적이지도 않다.
구원 받을 때, 우리는 아담의 가문에서 들어올려져서 그리스도의 가문으로 옮겨진다. 우리의 영적으로 죽은 DNA는 기적적으로 추출되고, 새롭고 살아있는 DNA가 우리의 영혼에 이식된다. 우리는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성령 안에 있다.
이 수술이 담고 있는 모든 의미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해 계획되었으며, 우리의 인격 가장 깊은 곳에서 어떤 일이 성취되었는가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