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창포를 매립하면서 얻은 현재의 인천역 부근을 중심으로 북성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일본식으로 화방 1,2,3정목으로 고쳐져 인천부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에는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북성동으로 고쳤다.
북성동(현 대한제분지역)에는 예부터 어선이 많이 드나드는 북성포구가 있어 개항 당시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들던 외국지계 지역이 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난을 피해 인천으로 도망하면서 이곳에서 배를 빌려 월미도로 가서 월미도에서 인천 앞바다에서 물길을 못 찾아 헤매다가 인천 앞바다의 수로 측정을 끝내고 귀국하던 영국배 플라이 휘싱 호에 구조되었는데 일본으로 탈출했던 곳이라 하여 화방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만석동에서 분리 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 옛날 성의 북쪽에 있던 북성이라 하여 북성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천해관 세무사의 관사터가 북성동 3가 8로 밝혀져
북성동이라는 이름의 북성의 유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인천군의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 호가 있어 수어(守禦)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인천부 서쪽 19리에 제물량영(濟物梁營)이 있다.’ ‘제물진은 인천부 서쪽 18리에 있는데 성 주위가 250보’라는 기록이 있다.
성의 북쪽에 있었기에 월미도로 가는 길인 대한제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매립되기 전 북성곶(北城串)이라 불렀고, 그 발음이 변해 ‘북성구지’라고도 했다. 그러나 효종 때 북벌정책이 강화되면서 이 성에 주둔했던 군대가 강화도로 옮겨가자 성은 그 기능을 잃게 되었고 이 일대도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병인양요 이후에는 외국의 침략에 대비해 화도진을 축조하여 북성 주변 바닷가에 북성포대를 세우기도 했지만 인천항이 개항하자 이것도 필요 없게 돼 결국 없어지고 말았다.
북성동이 최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현재의 인천이 전 세계와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되는 근대적인 조약 1호인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장소로 월미도 앞에 정박해 있는 스와트라호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 천막을 치고 슈펠트 제독과 신헌과의 사이에 조인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장소가 인천해관장 관사라는 이야기는 여러 경로로 알려졌으나 장소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표기한 지도가 없었다. 구한말 외교관으로 활동한 미국인 알렌(H. N. Allen)도 1901년 4월 발표한 한국 연대표에서 ‘조미통사수호조약 체결 장소는 인천해관 세무사의 관사터’라고 적고 있었지만 기존 ‘제물포각국조계지도’는 건물명 등의 표시 없이 단순히 필지번호 D39로만 기록하고 있어 그동안 아무도 이곳이 세무사관사 터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화도진이나 현 파라다이스호텔 부근으로만 추정했었는데 김성수님이 중앙도서관지하에서 발견한 해관문서에서 제물포 지도가 발견되면서 북성동 3가 8의 자리가 조미통상수호조약의 장소로 확정되었다. 발견된 제물포지도에는 좌측 화상지계(청국지계)와 일본지계 경계면 상단 부근에 정사각형 모양의 부지에 ‘D lot No 39'라는 고유지번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한자로 ‘세무사공관(稅務士公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영문으로 ‘Commissioner's present residence'라고 병기하고 있으며 면적은 가로 53m, 세로 58m로 2천865㎡(약 868평)에 이른다.슈펠트제독의 회상이다. “6개월의 지루한 협의 끝에 조선국이 독립국이라는 기반 위에서 조약문 초안이 만들어졌으며, 조선대표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는 스와트라호(Swataragh)로 1882년 5월 제물포에 상륙했고, 무력시위 없이 인천부의 관아로 가서 3명의 조선대표와 협의를 마쳤습니다. 조선대표들에게는 조약문 초안을 미리 보낸 바 있었습니다. 며칠 후 조선 측에서는 제물포에 천막을 준비했고, 슈펠트는 휘하 장교들과 호위병들을 대동하고 상륙했으며, 천마 전면에는 미국기가 게양되었고, Yankee Doodle이 울려 퍼지는 분위기에서 은둔국과 서구열강 사이의 첫 번째 조약문서에 서명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서명장소는 스와트라호(Swataragh) 함장 필립 쿠퍼(Philip Cooper)가 1887년 당시의 해관 영빈관이라고 말했다고 적어놓고 있다.
▲ 언던 위 영빈관
1962년 영빈관이 사라진 자리에 극동방송국이 건물을 새로 짓고 입주하면서 윤학원 선생님이 극동방송국에서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인천시립합창단을 창단하였다. 합창연습을 위해 내리교회에서 이곳까지 동무들과 겨울에는 눈에 미끄러져가며 언덕을 오르내리던 추억을 그분들은 아직도 즐겁게 회상하고 있다.
▲ 극동방송
젊은 남녀의 로맨틱 장소였던 응봉산 존스톤 별장
1905년 북성동 3가 1 응봉산 마루에 붉은 지붕에 하얀 벽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상해의 사업가 존스톤씨의 별장이 들어섰다. 아래 언덕에 서양인들의 사교클럽 제물포클럽이 있고, 테니스 코트도 있었던 응봉산은 젊은 남녀가 사랑하기 좋은 로맨틱한 장소였다.
존스톤은 무더운 상해의 여름을 피해 딸과 함께 머물렀던 이 별장에 머물렀다. 그의 딸은 응봉산 맞은편 언덕에 있던 세창양행 사옥에서 살던 독일인 칼 볼터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이들이 사랑을 나누던 존스톤 별장은 일본인에게 매각되었고, 1936년 인천부청이 인수하여 인천각이라는 고급여관 및 요리점으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미국장교들의 독신 기숙사로 사용된다.
▲ D lot No 39자리 조미통상수호조약 체결장소
인천각 시절 이곳을 드나드는 아름다운 기생들의 모습에 매혹되어 매일 응봉산에 올라 빨리 어른이 되어 돈을 벌어 기생들과 놀아야지 하는 꿈을 키우던 남성들도 적지 않았다.
향토조사자료에서는 관측소의 앞, 수리개봉산 중앙에 있는 빌딩, 영국식 건물로서 경치를 조망하기에 아주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철마가 달리는 경인철도의 시작은 미국인 모오스에 의해서였지만 준공은 일본인이 하였다. 초기 설계도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토지 매입이 어려워 미국인 모오스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인수한 일본인들도 독일인들의 협조를 얻어 1899년 노량진까지의 노선이 개통이 되지만 외국인 지계에 속해 있었고, 역 주변의 땅이 스트링플링의 소유로 사용이 쉽지 않게 되자 현재의 인천역 주변을 매립하여 일본인 자본에 의한 산업들을 유치하게 된다.
▲ 존스톤 별장
▲ 테니스코트
경인선은 일본인들이 경제적으로 조선을 침탈해 가는 과정이었기에 조선인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역은 러시아식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역으로서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장내에는 공작장 여러 동과 차고 등이 있다. 경인선의 종점이기에 기관차 회전대, 기중기 등이 있어 유감스러운 점이 없다.’ 라고 향토조사자료에는 기록되어있다.
경인선을 주요섭(1902~1972)은 장편 소설 ‘구름을 잡으려고’(1935)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제물포-그것은 조선이 열어놓은 출입문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위험한 출입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으로 부산, 원산에 이어 개항을 하게 되는 인천 제물포는 외국문물이 유입되는 관문, 근대화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경인철도가 부설되면서 이 위험한 출입문은 바퀴까지 달게 되었다. “앞에다 깃대를 세우고 괴상한 기계로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다시 자로 여기저기 재어보고는 또 쇠막대를 한 토막씩 매일매일 서울을 향해 놓아간다.” 침목을 설치하고 레일을 깔면서 조금씩 서울을 향해 다가왔던 철도 부설 장면묘사는 대한제국의 숨통을 조금씩 조여 오는 것 같은 위압감을 준다. 결국 대한제국은 경인선을 필두로 철도 부설의 대가로 공간에 대한 지배권을 일제에 넘겨주고 역사에서 사라진다.
경인선 부설권을 둘러싸고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와 일본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가 각축을 벌이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모스는 고종 28년 명예직인 통정대부에 오르고 조선상무위원에 위촉되어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어 기공식을 하지만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않았고 토지 매입도 쉽지 않아 결국 시부사와가 주도한 ‘경인철도 인수합병조합’에 부설권을 넘기게 된다.
▲ 경인철도 개통식
▲ 변경 전과 변경 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경인철도 설계도
▲1960년대 인천역
▲ 현재의 인천역 모습
북성동 2가 일대엔 소금판매업, 양조장, 정미소 등 들어서
경인선이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은 1900년 6월 한강철교가 완공된 이후였고 11월 12일 서대문역에서 전통식(全通式)을 거행함으로써 완성된다.
일본 금융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자와 에이이치는 그 이름대로 일본 근대 건설의 장자, 곧 일본 자본주의의 대부였다. 일본의 선진 금융업의 도입이 절실했던 시기 프랑스에서 공부한 프랑스식 금융업을 일본에 도입한 시부사와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도 제일은행과 58은행으로 조선을 일본 경제의 영향권 하에 두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는 이후 조선의 은행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이토히로부미와 의견 대립을 보이게 된다.
시부사와는 경부선을 러·일전쟁에 대비하고 군사적 효용과 비용 등을 고려하여 협궤로 부설하자는 막강한 군부의 압력에 맞서 경부철도는 대륙철도와 연결해야 하는 국제적 간선이란 주장을 관철시켜낼 정도로 뚝심과 안목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의 고집으로 경부선은 일명 스티븐슨 게이지(Stephenson Gauge)라고 하는 75파운드 1천 435mm 국제 표준궤를 채택하고 전격적으로 미국 카네기사(사)의 선로를 수입하고 곧바로 공사에 착수, 1905년 1월1일 경부선 개통식을 갖게 되니 경인선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철도는 대륙공략과 경제수탈이라는 목표아래 동-서 축보다는 남-북의 축을 강조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안고 출발하게 되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경인선을 비롯한 한국철도를 군사용으로만 검토했던 순진한 일본 합동참모본부에 비하면 시부사와는 훨씬 더 영악하고 위험한 합리주의자였던 셈이다.
인천역의 구내에 포함되는 전용선은 다음과 같다.
북해안 본선 : 1910년 이후(일자 불명)에 화수동의 부두로 가는 노선으로 개통하였다. 2006년에 폐지되었다. 호남정유선, 수차선, 사료선, 흥국선, 제2동국선, 제1동국선, 인천제철선으로 일본 제국의 대륙침략을 위해 인천항과 군수산업시설을 연계하는 지선 철로였다.
역 남동쪽으로 가는 선로 축항구내 : 축항조차장으로도 불린다. 강원연탄선
제3부두선, 석탄부두선 : 인천항 석탄부두로 이어지는 철도이다. 이 선로로 열차를 운행하려면 남부구내까지 열차를 보낸 후 기관차의 방향을 바꾸어 진입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2012년 12월 13일에 남부구내를 지나지 않도록 노선이 변경되었다. 옛 석탄부두선은 2015년경에 철거되었다.
남부구내 : 흔히 남부역으로 불렸으며, 수인선의 남인천역과는 다른 곳이었다. 1990년대 중, 후반까지 주인선의 종착역이기도 하였다. 2012년 12월 13일 폐지되었다. 남부구내는 폐지 이후 한동안 주차장 및 수인선 복선전철화 공사장 자재 보관용으로 사용되다가, 2015년경에 옛 석탄부두선과 함께 아파트단지 공사 관계로 완전 철거되었다. 기회선, 유공선, 동양화학선 등이다.
해안을 매립해 얻은 북성동 1가에는 세관장 관저와 철도국 인천역 등 철도 경영에 필요한 시설이 들어섰고, 인천역 구내에는 장난감, 토산품류를 판매하는 매점이 있었고, 낚시 유선 도구를 대여하는 가게들이 인천역 일대에 들어섰다.
신선한 해산물의 공급을 위한 얼음공장 부지로 북성곶 일대가 매립되어 (주)하야가네상점 인천출장소인 얼음공장이 들어서 가공얼음 제조와 판매 및 생선도매를 하였고, 경기도 어업조합연합회, 일본제분주식회사 인천공장이 들어섰다.
▲1930년대 북성동일대의 공장과 월미도 정차장
현재의 하인천 파출소 주변으로는 철도국 경리과 인천창고, 화방정 우편소와 철도국 기관차 인천기관구 등이 있었다.
북성동 2가에는 소금판매업을 이치가와 상점과 도요타 양조장, 한국인 송운학이 경영하던 천일양조장이 있었고, 인천역이 자리 잡았던 선광아파트 자리에는 츠치가와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송월동의 애경비누와 함께 이 일대의 산업군을 형성했다.
인천역 앞에는 이나다 가즈비코가 세운 이나다 여관을 1903년 한국으로 건너와 이나다조합의 경부선 공사에 종사하면서 운송업을 경영하던 미시마 시게요시가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8부두 맞은 편 고가가 내려오는 곳에 있었던 염부두에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제 강점기 배를 닦는 수부로 강제 징병된 김 할아버지는 말을 잘해 기관실의 기계들을 닦으면서 틈틈이 어깨너머로 배를 운전하는 기계 조작을 배웠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배는 있었지만 배를 운전할 수 있는 기관장은 드물었다. 김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해방 후 인천으로 돌아와 기관장으로 염부두에서 중국인 밀수선인 정크선을 탔다. 배의 기관장을 필요로 해 한국인을 고용은 했지만 언제 살해당할지 알 수 없는 위험성이 있었기에 친구와 함께 타기로 하고 중국 상해까지 무사히 도착을 해 임금은 받았지만 중국 밀수 단속반에 걸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임금은 금괴 조각으로 받았다고 한다.
1949년 남북협상 차 북한으로 간 김구선생을 맞이하러 가는 배에 염부두에서 기관장으로 탔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자 자신만 남기고 배는 사라져 한동안 헤매다가 돌아왔다고 하는데 그 사실 관계는 증명할 수가 없었고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3년 전 사망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를 하고 한때 이곳 염부두에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빈대들 등쌀에 잠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궁리 끝에 물을 담은 통 위에서 자리를 잡고 잠이 드는데 과연 빈대가 덤비지를 않아 이제는 되었다며 쾌재를 불렀다.
며칠 후 다시 빈대가 덤벼들어 원인을 살펴보니 빈대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붙을 궁리를 하다가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가 천정에서 자신의 몸으로 떨어지더라는 일화도 전해진다.
▲염부두에서 월미도 뚝방길이 시작되는 북성포구로 가던 길
1930년 인천수산업은 일본인들이 쥐락펴락
인천부사에 의하면 개항한 그해인 1883년에 이미 일인은 348명에 달했고 10년 후인 1893년에는 일인이 2천5백명, 한국인이 5천명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생선 없이는 못사는 일본인이 늘었으니 생선이 모자라게 되었다. 이제 어촌 제물포로는 어물을 사들이는 항구로 둔갑했다. 근해 도서에서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영세 어민이 공급하는 물량에 부족을 겪게 된 일본인은 이것을 기회로 해서 자신들이 마음대로 고기잡이를 하고자 1897년에 남양(南陽)에서 강화에 이르는 어류가 풍부한 인천근해에서 어선 15척의 어로권과 인천에서의 판매권을 따냈다. 그 후 1895년에 15척이 추가되어 30척의 일본 어선이 인천 앞바다를 휩쓸게 되었고 인천항에는 나날이 늘어나는 주민을 상대로 재래식 한국어선과 근대식 일본 어선이 집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어물의 유통구조가 정비되지 않아 많은 불편을 느끼고 있던 형편에 착안하여 1890년대 말까지 내리(내동)에 상점을 차려놓고 근해 어업자의 어획물을 매입, 독점 판매하던 한양 정흥택(鄭興澤)형제가 선창가였던 신포마켓 자리에 한옥으로 어물시장을 짓고 도매시장을 개설했다.
한국인의 취향에 맞는 생선은 지게장수로부터 통째로 사는 것이 통례였고 일본사람들은 주부가 대부분이었는데 필요한 만큼 횟감을 뜨거나 토막을 쳐서 사 가지고 갔다. 이곳이 후일에 유명해진 인천 생선전의 시초였던 것이다. 1930년대부터 인천수산업계에도 일본자본이 진출하여 한국 상인은 생선전을 중심으로 하는 소매상으로 위축되고 정씨 일문의 위세도 노령 탓도 있었으나 퇴락하고 말았다. 즉 하야시가네(林兼). 하마다(濱田). 무라타니(村谷)상점 등 일본인 거상들이 수산시장을 독점하다시피 쥐고 놀았던 것이다. 특히 하야시가네(林兼)상점은 일산(日産) 15톤 규모의 어업용 제빙공장을 대한제분공장 건너편 위치에 설립하여 한강 천연빙이 공급되기 전까지 어선과 시중에 얼음을 공급했다.
해안 일대의 매립공사가 준공되어 어선 선창이 멀어지며 도매시장은 하인천 북성동으로 옮겨갔으나 생선전은 그 자리에서 지속됐다. 1929년 북성동으로 이사한 어시장은 전쟁 말기에는 군량을 담당하는 병참기지처럼 되어 버리기도 하였으며 1976년 12월 항동7가 27번지로 이전하여 현 ‘인천종합어시장’으로서 활기를 띠고 있다. (인천학 총서. 인천이야기)
제재염을 생산하던 인천제염소와 하야시가네의 얼음공장 등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면서 1929년 북성동으로 이사한 어시장은 해방이 되고 전후가 되면서 어선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새우와 꽃게 등을 실은 소형어선들이 들어오면 바로 그 자리에서 판매가 이루어지는 어시장을 형성하자 경매를 부르는 공동어판장을 짓게 되고 북성포구도 변화하게 된다.
▲선상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 북성포구 현재의 모습
▲공판장에서 경매를 부르는 모습
1974년 연안부두로 어협 공판장이 옮겨 가기 전까지가 북성포구의 황금기였다. 만선으로 들어온 배들이 잡은 생선을 판매하는 동안 선원들은 가족들을 보러 집으로 가기 전에 술 한 잔으로 회포를 풀어야만 했는데 이 술 한잔이 화근이었다. 뱀골목에서 다정한 아가씨들과 술잔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배를 타고 조업을 나가야하는 약속의 날이 되었다.
결국 인천역 철로 길을 넘지를 못해 집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망망한 바다로 다시 떠나 가족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이후 연안부두로 공판장이 옮겨간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조업을 하다가 만선의 배로 연안부두에 정박하면 그 후의 판매는 회사 몫이다. 선원들은 흩어져 각자 자기 집으로 가야하는데 가족들은 거의 토지금고에 거주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기 전 한 잔술은 엘로우 하우스에서였다. 이곳에서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 길 건너 토지금고에 있는 가족들은 만나지도 못하고 다시 배를 타러 나가야 하는데 선장들은 선원들이 모자라면 엘로우 하우스로 찾으러 와 그때까지 술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 자기 배 선원들을 업어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선원이 제대로 차지 않아 배를 띄우지 못하고 며칠 씩 애를 태우는 배들도 많았다.
1990년대 목재공장 들어오면서 부두는 한산해져
1974년 어협공판장과 어시장이 연안부두로 옮겨가고 8부두가 들어선 이후에는 큰 배들은 연안부두에서 판매를 했지만 작은 고기잡이배들은 대한제분 맞은편의 북성포구에 닻을 내렸다. 꽃게철이 되면 서울에서 꽃게를 사러, 새우철에는 새우를 사러 물때를 맞추어 통을 들고 인천역을 내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북성포구가 한산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월미도 일대 옛 용궁각 일대를 매립하면서 대성목재 등 목재 공장이 들어서 원목이 이 부두를 통해 들어오면서부터다.
▲어선이 들어오던 흔적이 남아있다.
3년 전 만석동 쪽방촌을 찾았다. 따뜻한 햇볕 아래서 할머니들이 모여서 마늘을 까고 계셨다. 언제부터 이곳에서 거주하시느냐고 질문을 하니, “이북에서 내려와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장사를 했지. 어시장이 이곳에 있을 때는 정말 경기가 좋았어”
“가게에서 장사를 했나요?” “아니 빵을 쪄서 노상에서 팔았지”
부두노동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고 하신다. 지금은 소일거리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마늘을 까서 시장상인들에게 납품을 하는 부업을 한다. 1975년 울진에서 무작정 인천으로 온 남사장도 염부두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이에게 돌아오는 노동의 대가는 담배 값과 식사대 정도였다. 점심으로는 주로 짜장면을 먹었는데 북성포구에 있던 중국집 대성장은 짜장 보통이 90원, 간짜장이 120원이었는데 배고픈 젊은이들을 위해 특별히 양을 많이 줘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염부두를 떠나고 몇 년 후 다시 대승원을 찾았는데 그 사이에 짜장면 값은 두 배로 올랐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는 남사장님은 요즈음도 가끔 대승원 짜장면을 찾아 북성포구를 찾는다. 월미도 가는 길이 확장되면서 길가에 자리 잡았던 가게들은 새우젓 골목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승원도 북성포구에서 8부두 건너편 새우젓 골목 쪽으로 이전해 현재는 동생이 운영하고 있다.
▲ 할머니들이 모여서 마늘을 까던 마당
오래 전부터 북성포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북성포구는 혼란스럽다. 북성포구라는 용어를 제대로 정립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구 선생이 탈출할 때 하룻밤을 자기 위해 꾸며 대었던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오던 중 배가 파선되어 간신히 북성고지에 닿았다고 했을 때의 북성곶은 아래의 그림과 같이 현재의 남경아파트 옆을 말한다.
74년 이전 공판장이 있었을 때의 북성포구는 월미도 들어가는 입구, 현재의 8부두와 그 일대를 말하고 있으며, 1974년 이후 8부두가 들어선 후 고깃배들이 들어오던 북성포구는 대한제분 앞을 말한다. 염부두는 대한제분 뒤 고가도로에서 내려오는 쪽을 의미한다.
현재 선상회집들이 있는 곳은 부두가 없었고, 통칭 똥마당으로 불리던 곳이다. 각각 북성포구에 갖고 있는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수상 선상회집을 북성포구라 부르면 추억을 가진 사람들은 혼동할 수밖에 없다. 용어의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