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의 삼장사 경상우병사 최경회
촉석루의 삼장사, 남강에 몸을 던지다
촉석루의 세 장사는(矗石樓中三壯士)
한잔 술로 웃으며 긴 강물을 가리키노라(一盃笑指長江水)
강물은 도도히 흘러가고(長江之水流滔滔)
저 물결 흐르는 한 혼도 죽지 않으리(波不渴兮魂不死)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의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이 함락당한다.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 등은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이때 최경회가 지은 시이다. 이름하여 ‘촉석루의 삼장사’이다.
촉석루의 삼장사가 누구인지 의견은 다양하다. 경상도 초유사였던 김성일이 조종도, 이로와 함께 올라 읊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2차 진주성 전투를 이끌었던 핵심 인물들은 김천일을 비롯하여 최경회, 고종후, 황진, 장윤 등 호남 의병장이었다. 일반적으로 촉석루의 3장사는 김천일, 최경회, 황진을 가리킨다. 황진 대신 고종후를 일컫기도 한다. 황진은 28일 왜적의 총탄에 희생되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 이는 고종후였기 때문이다.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몸을 던진 일휴당 최경회(崔慶會, 1532~1593)는 화순 능주에서 태어났다. 양응정과 기대승 문하에서 수학 한 후 명종 22년(1567)에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 무장 현감, 영암 군수, 호조 정랑을 거쳐 1587년 담양 부사를 역임한다. 담양 부사로 재직 중이던 선조 24년(1591) 모친상을 당하여 화순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먼저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문홍헌이 최경회에게 달려와 호남 의병을 수습하여 거의할 것을 간청하였다.
1592년 8월 전라우의병장으로 추대된 최경회는 두 형인 경운, 경장과 함께 의병청을 설치하고 수천의 의병을 일으켜 남원을 거쳐 장수로 진출하였다. 당시 전황은 이순신의 해전 승리와 각처의 의병 활동으로 왜군이 영남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때 영남 의병장인 경상우도 병마사 김면과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호남의 의병장들에게 구원 요청을 해왔다. 일부 의병장들은 “지금 적세가 사방에 뻗쳐 있는데 어찌 호남을 버리고 멀리 있는 영남을 구원하겠는가?”라는 이유로 영남의 구원 요청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최경회는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이다. 의병장이 되어 어찌 멀고 가까움을 가려 영남을 구원하지 않겠는가?”라며 영남 출병을 결정하였다.
최경회 부대는 10월 초 영남으로 진군하여 제1차 진주성 전투를 외곽에서 지원하고 성주, 김천 지역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조정은 최경회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호남 일도와 영남우도 지방이 보존된 것은 다 그의 힘”이라고 격찬하였다. 경상우병사 김면이 병으로 죽자 후임으로 경상우병사에 제수되었으며, 김천일, 고종후 등과 함께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순절하고 말았다.
영조 29년(1753)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리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진주의 창렬사, 능주의 포충사와 삼충각에 배향되었다. 2003년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화순군 동면 백용리에 충의사가 건립되었다.
진주 촉석루 바로 옆에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세워져 있다. 의기는 의로운 기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후실이다. 최경회가 장수현감으로 갔을 때 논개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후실로 맞이하였다. 최경회가 가 진주성에서 순절하자, 논개는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장수군에는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義巖祠)를 건립하였고, 화순 충의사 경내에도 의암영각을 세워 그녀를 기리고 있다.
최경회와 최후까지 함께한 화순의 의병장들
문홍헌(文弘獻, 1551~1593)은 호는 경암으로, 충숙공 문익점의 후손이다.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선조 15년(158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구희, 박혁기, 노희상 등과 함께 담양에서 회동하여 고경명을 맹주로 추대하였다. 의병 3백여 명을 모아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가,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화순 동복에 이르렀을 때 고경명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던 최경회를 찾아가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문홍헌은 최경회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큰아들 문정과 김천일, 최경회 등의 여러 장수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4배를 올린 후 남강에 투신하였다. 숙종 1년(1675)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구희(具喜, 1552~1593)는 능성현(화순 능주) 출생으로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경명이 의병을 모집하자 군량미로 쌀을 100여 석 내놓고 문홍헌 등과 고경명 부대에 가담하여 금산에서 싸웠다. 고경명이 전사한 후에 최경회 의병장을 보좌하여 진주성에 합류하였다. 진주성에서 일본군에 맞섰으나, 6월 29일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문홍헌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박혁기(朴爀紀, ?~1593)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같은 고향 출신인 문홍헌, 구희, 오방한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금산전투 이후에는 화순에서 최경회를 중심으로 의병들을 모집하여 1차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등 전공을 세웠다. 성주성 수복 전투에서도 활약이 컸다. 1593년의 2차 진주성 싸움에도 참여하여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의 뒤를 이어 문홍헌, 구희, 오방한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보성 오씨인 오방한(吳邦翰, ?~1593)은 죽천 박광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23년(1590)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귀향 중이었다. 같은 고향 출신의 문홍헌, 박혁기, 구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침입해오는 일본군을 참살하고 6월 29일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능성현(화순 능주) 출신 김인갑(金仁甲, 1564~1593)은 선조 12년(1579)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김의갑(金義甲, 1566~1593)은 선조 23년(1590)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형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에 시묘살이를 마치자 곧 인근의 유생들과 창의하여 곧장 진주로 달려갔다. 하동, 곤양(경남 사천) 부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1593년 6월 13일, 진주성 외곽에 도달했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야산으로 적을 유인하여 격파하였지만, 동생 김의갑은 화살을 맞고 순절하였다. 진주성 입성에 성공한 김인갑은 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김인갑은 병조판서에, 김의갑은 주부에 추증되었다. 화순 이양면 쌍봉리의 충신각에 모셔져 있다.
◈ 2차 진주성 전투의 핵심 충청병사 황진
황진(黃進, 1550~1593)은 남원 출신으로 157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1년 황윤길과 김성일을 수행하여 군관으로 따라갔다. 동복현감으로 재임 중 일본의 침략을 확신하여 재산을 털어 말을 사고 밤낮으로 무예를 익히면서 이에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을 따라 용인까지 북상하였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동복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군대를 일으켜 참전하였다. 진안에 침입한 일본의 선봉부대를 전멸시켰고, 안덕원에서도 일본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여 훈련원 판관에 임명되었다.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으나 오히려 승리하였다. 이때 부상을 입어 치료를 하던 중에 훈련원 부정으로 승진하였다. 전라도체찰사로 내려온 정철이 그의 명성을 듣고 추천하여 익산군수 겸 전라도조방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전라도 절도사 선거이를 따라 북상하여 수원에 주둔하면서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그동안 세운 전공으로 정3품 절충장군이 되고 충청도조방장에 임명되었다. 159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안성으로 진을 옮기고 군사를 재정비하였다. 적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안산을 점령하고자 죽산성에서 나오자, 이들을 물리치고 죽산성을 점령하였다. 또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상주까지 이르렀다.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추진되면서 일본군은 경상도에 집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점령하고자 진주성을 다시 공략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일본군 병력은 거의 10만에 육박하였다. 하지만 진주성은 일본군을 막을 병력이 없었다. 조정뿐만 아니라 명나라 군대와 곽재우 등 대부분의 의병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전라도로 들어가는 관문인 진주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창의사 김천일이 가장 먼저 진주성에 들어갔다. 김해 부사 이종인 역시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였다. 뒤를 이어 최경회, 고종후, 김준민 등 전라도와 경상도 의병장들도 자발적으로 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황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주목사 서예원을 대신하여 창의사 김천일이 도절제가 되어 총지휘를 맡았다. 황진은 순성장을 맡아 김해부사 이종인과 함께 전투계획을 세웠다. 6월 21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2차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수성군이 점차 불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전투 중 큰비가 내려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이에 황진은 군사들과 함께 직접 돌과 흙을 날라 밤을 새워 성벽을 다시 쌓았다. 6월 28일 새벽에 일본군이 진주성의 북쪽과 동쪽을 공략하였지만, 김해부사 이종인과 황진의 독려로 물리쳤다. 전투 후 황진은 성 밖 상황을 살펴보다가 잠복해있던 적병의 총에 이마를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황진에 대해서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황진은 체격이 장대하고 수염이 아름다워 그 모습이 매우 특이하고 훌륭하였다. 사람됨이 엄격하고 진중하며 기개와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고, 어깨의 힘도 남보다 셌다. 젊어서 민첩하기가 마치 비호같아서 각종 무술 시합에서 항상 이종인과 1, 2등을 다투며 나란히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친한 벗이 되어 생사를 같이하기로 약속하였다. 두 사람은 무과에 급제하여 이종인은 김해부사로, 황진은 충청도병마사로 진주성 싸움에 자원하여 참가하였다. 그러나 8일째 전투가 끝나고 순찰을 하던 황진은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친구 이종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황진이 죽었을 때는 아직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이어서, 이종인은 그의 시신을 성안의 한구석에 묻었다.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한 약속처럼 이종인도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의 두 아들이 그 시신을 찾아서 남원의 선영에 안장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광해 3년(1611) 장군의 충절과 전공을 기려 ‘무민(武愍)’이란 시호와 함께 정려가, 정조 때에는 부조묘가 내려졌다. 진주의 창렬사와 남원의 정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현재 남원에는 무민공황진장군기념관이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