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눈앞에 최고급 스테이크가 놓여 있다. 인간은 눈으로 플레이팅을 보고, 코로 불향을 맡고, 입으로 육즙을 즐긴다. 그리고 말한다. “음, 역시 최고급은 달라.” 인간은 스테이크 외에도 다른 것들을 요구한다. 레스토랑의 호화로운 분위기나, 셰프의 멋들어진 설명 말이다. 인간은 이 모든 요소의 조화를 통해 스테이크의 맛 이상의 ‘즐거움’을 느낀다. 반면, AI의 눈앞에 최고급 스테이크가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AI는 스테이크의 맛을 느끼기 위해 재료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이 요리를 만든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조리했는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 스테이크는 최고급 스테이크다’ 데이터 조각들을 늘어놓아 내린 결론이다.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새로운 요소는 등장하지 않는다. 데이터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고 그냥 함께 존재만 하는 ‘취합’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미 가지치기를 하지 못하는 AI는 인간의 사고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인간이 사고를 할 때는 기본적으로 조화가 중요하다. AI는 인간의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데이터를 확보하려 한다.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가지는지’가 세밀한 결론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AI는 착각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데이터의 조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취합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구글의 이미지 생성 AI인 제미나이는 ‘흑인 아인슈타인’과 같은 괴상한 존재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 ‘인간, 아인슈타인, 인종’이라는 3요소를 놓고 ‘인간은 다양한 인종을 가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이다’, ‘그렇기에 아인슈타인은 흑인일 수 있다’고 데이터를 취합하여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똑같은 3요소를 주었을 때, 인간은 ‘아인슈타인은 백인이다’라는 명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인종의 다양성’과 같은 요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배치한다. 이렇게 인간은 조화로움을 위해 선택과 집중을 할 줄 안다.
AI는 요소의 확장성도 고려하지 못하기에 통찰력도 떨어진다. 즉, 취합을 중시하기 때문에 여러 요소를 바탕으로 새로운 하나의 요소를 뽑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앞선 상황에서 인간이 스테이크를 먹을 때, 인간은 여러 요소의 조화를 통해 ‘즐거움’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뽑아내었고 또 즐거움에서 순식간에 생각을 가지치기해 나간다. 결국 ‘스테이크=하와이’와 같은 엉뚱해 보이는 결론도 내릴 수 있다. 반면, AI는 정보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은 것들은 쳐낸다. AI의 입장에서 스테이크와 하와이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추론을 할 수 있는 생성형 AI가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생성형 AI라도 인간의 자세하고 반복적인 명령이 필요한 이유는 ‘AI의 추론’에서 확장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스테이크’와 ‘하와이’ 사이에 ‘즐거움’이라는 안 보이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AI는 알지 못한다.
이제 사람들은 AI가 감정도 이해할 수 있을지 기대한다. 그러나, 감정을 이루는 가장 큰 두 요소는 ‘확장성’과 ‘조화’다. 따라서 AI가 이 두 요소를 내팽개치고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취합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수준에만 머문다면, AI는 인간을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 개별적인 요소 각각의 의미와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의 의미, 그리고 이러한 의미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의미. 결국, ‘의미 가지치기’를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인간의 능력이다. ‘창의성은 규칙을 깨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AI가 규칙을 깨지 못한다면, 결국 AI는 AI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