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2024년 11월 16일(토)
장소: 강진 일원( 무위사-백운동 원림- 다산박물관 - 다산초당- 강진만 갈대(애절양)-사의재)
참여인원: 42명
무위사(無爲寺)에서 답사를 시작하다...
무위사는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고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하나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창건된 진평왕 39년(617년)은 원효가 태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무위사의 역사는 선각대사 형미스님이 중창한 1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위사는 고려 초에는 선종사찰로 유명하였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죽은 영혼을 달래주는 수륙재(水陸齋)를 행하였던 사찰인 수륙사(水陸寺)로서 유명하였다. 세종 12년(1430)에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극락보전이 지어지고 성종 7년(1476)에 극락전 안에 아미타삼존도, 아미타여래내영도를 비롯한 벽화가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무위사에서는 죽어서 제 갈 길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을 불력으로 거두는 수륙재를 자주 지냈을 것이고, 아미타불은 서방정토를 주관하는 부처이기 때문이다. 극락보전 앞 좌우에 벌여 선 괘불 걸이는 수륙재 야단법석을 펼 때 괘불을 걸었던 자취이다. 중심 건물은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보전(국보131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극락보전으로 우리나라 조선 시대 불교 건축물 중에서도 초기 형태에 속한다. 눈여겨 볼 것은 맞배지붕과 주심포 양식으로 지어진 극락보전의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이다. 특히 극락보전 측면의 기둥과 보가 만나 이루는 공간 분할의 절제된 마음다움도 놓쳐서는 안 될 감상 포인트이다. 또한 단정하고 검소한 극락보전의 겉모습과 달리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묘사한 건물 내부는 물론, 조선 초기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불상과 불화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무위사 극락보전(국보13호)
고려 시대 건물인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많이 닮은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 집인데, 1983년에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명문에 따르면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매우 단정한 모습의 건물에서 풍겨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절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고 효령대군이 공사에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극락보전의 건축미와 연혁을 설명하는 노성태 원장
극락보전내 아미타삼존상과 아미타삼존도
법당의 중심인 아미타삼존상을 보면, 가운데 아미타불이 있고 그 오른쪽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이 있으며 왼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이 있는 전형적인 아미타삼존상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각각 바깥쪽 다리를 늘어뜨린 자세를 취했다. 금물이 올려져 있지만 원래 목조상인데 다들 얼굴 선이 부드럽고 단아하며 기품이 있다. 얼굴이나 옷자락의 표현 등에서 무르익은 조각 솜씨가 엿보인다. 이 아미타삼존상은 뒤편 벽에 그려진 아미타삼존도와 거의 같은 양식을 보이므로 그림과 같은 때나 조금 앞서서 만들어졌으리라고 추정되는데, 법당을 지을 때 먼저 부처를 모시고 세월이 얼마간 지나 목재나 벽체의 수분이 빠진 후에 벽화나 단청을 올리는 통례로 보아 그림보다 먼저, 아마도 법당이 지어진 세종 재위 기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 후기 불상의 영향이 엿보이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불상 뒤의 아미타삼존도는 부드러운 붉은색과 녹색 계통을 주조로 한 채색, 화려하고 섬세한 묘사 등이 고려 불화와 많이 닮았다. 그러나 두 협시보살의 키가 부처의 어깨쯤까지 올라와 있고 또 화면 위쪽 좌우에 세 명씩, 여섯 나한의 얼굴이 그려진 점은 고려 불화와 다른 모습이다. 이는 모든 보살이 부처의 무릎 아래에 배치되는 엄격한 상하 구도의 고려 불화와, 보살과 나한 등이 부처를 빙 둘러 화면 가득히 배치되는 16세기 이후의 불화와도 다른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이다.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는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조선전기(1476년경)의 관음보살도 벽화이다. 1476년에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후불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보물 1314호로 지정되었다. 이 벽화는 토벽에 황토색을 칠한 후 유려하고 간결한 필치로 그렸다.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수월관음도이다. 얼굴과 목, 어깨가 건장한 남성적인 인상의 관음보살이 버들가지와 정병을 들고 연잎 모양의 대좌 위에 서서 아래쪽의 선재동자를 내려다본다. 이 그림의 선재동자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좀 다른데 승복을 입은 늙은 비구로 보인다. 관음보살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모두 보름달처럼 둥그렇고 주변에는 물결이 표현되어 바다 위에 떠 있음을 나타냈다. 흰 너울과 옷자락이 칼칼하면서도 율동감 있게 휘날린다.(국가유산청)
백운동 원림 (白雲洞 園林) 은 담양 소쇄원, 완도 부용동정원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중년에 조성하였고, 만년에 데리고 들어와 살기 시작한 둘째 손자 이언길(李彦吉)에게 유언으로 ‘평천장(平泉莊)’의 경계를 남겨 후손들에게 전함으로써 지금까지 12대에 걸쳐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생활공간이다. 2019년 3월에 국가지정문화재 115호로 지정되어 역사유적으로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내원과 외원으로 나뉘어져 내원은 연지와 곡수로, 돌화단, 건물 등을 자연에 순응하여 배치하였다. 층암절벽의 험준한 지형과 울창한 계곡수림의 음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한 가운데에 탁 트인 너른 공간을 조성하고 건물들을 배치하여 햇볕을 머물게 함으로써 안온함이 극치를 이룬다. 외원은 계곡과 암석들이 다양한 수목들과 함께 자연 그대로 어우러져 있다. 마당의 안팎에는 백운동 12경이라 하여 하나씩 표지판을 세워 놓았다. 이 12경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중에 제자들과 이곳을 들러 아름다움에 취해, 나중에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다산이 쓴 백운첩(白雲帖)에 그 기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외원의 계류를 수로와 연지를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내원에 흘러보내 여러 굽이로 휘돌아 다시 담장 밖 계곡으로 흘러나가게 한 제5경 유상곡수(流觴曲水)는 뒤로 물러남이 곧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곡절 많은 인생도 이와 같다는 처사의 도가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백운동 12경에 하나인 제5경 유상곡수(流觴曲水宴)에 대한 노원장 설명에 집중하는 회원들
六曲穿牆水 담장 뚫고 여섯 굽이 흐르는 물이
回頭復出墻 고개 돌려 담장 밖을 다시 나간다
偶來三兩客 어쩌다 온 두 세 분 손님이 있어
閒坐共流觴 편히 앉아 술잔을 함께 띄우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 그는 우리 역사상 최대의 천재다. 국사 교과서에만 그의 이름이 10번도 넘게 등장한다. ‘움직이는 국보’를 자칭했던 국문학자이자 영문학자였던 양주동 박사에게 우리 역사 최고의 천재가 누구냐고 묻자, 주저 없이 ‘다산일세’, ‘어느 정도의 크기이십니까?’ 라는 질문에는 ‘나보다 10배는 될 걸세’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천재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그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정조 13년(1789)인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승정원 동부승지, 곡산 부사, 형조 참의 등을 지낸다. 정조가 죽자 정권을 장악한 정순왕후가 남인을 내치기 위해 일으킨 신유년(1801)의 천주교 박해(신유박해)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된 후 곧이어 터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유배지가 강진으로 바뀐다. 다산이 우리고장 강진과 인연을 맺은 이유다.
다산의 가계도에서 다산이 이고장과 인연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윤선도의 손자로 유명한 자화상(국보 240호)을 그린 공재 윤두서의 손녀딸이 다산의 어머니다. 이런 연유로 해남 녹우당의 서적을 모두 섭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배가 풀린 1818년까지 10여 년 동안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500여 권의 실학서를 저술한다. 해남 윤씨가의 도움만이 다산을 실학의 대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18년간 껴안고 살았던 남도 땅 농민들의 처참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끊임없는 고민과 번뇌가 오늘의 다산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다산이 농민들의 고통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유배지 강진에서 지은 ‘애절양(哀絶陽)’ 한편만으로도 족하다.
다산이 ‘애절양’을 지은 동기가『목민심서』에 나온다. “이 시는 1803년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노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군적에 올라 있어 이정(里正, 지방 행정의 말단인 리의 책임자)이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가니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액(困厄)을 받는구나’ 하였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 다산의 ‘애절양’은 200년 전 이 땅의 농민이 울부짖었던 절규다. 그 절규가 시가 되고, 그 시는 역사가 되어 다시 오늘 농민의 현실을 되묻고 있다.
다산은 처음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거처를 ‘다산초당’으로 정한다. 다산초당은 윤단(尹慱, 1744~1821)의 산정(山亭)인 귤동의 초당이었던 곳으로, 다산을 초당으로 초빙한 이는 윤단(尹慱, 1744~1821)의 아들 윤규로(尹奎魯, 1769~1837)였다. 윤규로는 자신의 네 아들과 조카 둘을 다산에게 배우게 했다. 다산이 윤단의 산정으로 오게 된 것은 어머니가 해남 윤씨였기 때문이다. 외가 쪽 친척의 소유였던 산정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산의 외가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가문이다. 다산초당의 원래 주인인 윤단은 윤복의 6대손이고, 윤복의 형인 윤형의 5대손이 인물화에 탁월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기도 한데, 공재의 셋째 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니, 공재의 손녀이다. 결국 산정의 주인인 윤단은 다산에게 먼 외가 친척인 셈이다. 유배가 풀린 1818년까지 10여 년 동안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500여 권의 실학서를 저술한다. 따라서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의 다산 초당은 실학의 산실이며 성지다. 정약용이 가장 즐겨 썼던 호 다산(茶山)은 초당이 있는 귤동 뒷산 이름이다.
추사가 쓴 보정산방 현판 글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쓴 글로 알려져 있다. 다산 정약용의 제자 윤종진이 추사를 찾아가 추사에게 당호하나 지어주십사 부탁한다. 윤종진은 정약용이 강진에서 18년 간 유배생활을 했을 때 만난 제자이다. 추사는 그에게 예서체로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고 써주었다. 보정산방의 보정이란 말은 중국 옹방강이 소동파를 좋아해서 보소(寶蘇)라 당호를 썼듯이 추사가 ‘정약용을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 전한다.
사의재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4년간(1801~1804)거처하였던 집터이다. 이전까지는 강진 고을에서 술을 마시는 이들이 들리는 말 그대로 보통 주막이었지만, 다산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주고 이 곳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도움을 주었던 주인 노파의 성의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주막의 이름을 직접 지어줬다. 주막임에도 이름에 재(齋)를 붙였고, 사의(四宜)란 용모, 말씨, 성품, 행동을 말한다.
* 이번 답사에 많은 사진 올려 주신 회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게시판 용량이 제한되어 있어 많은 사진을 게시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세요.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