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조헌주(曺操獻酒) 조형물
조금 더 걸으니 길 한가운데 조조헌주(曺操獻酒)란 조형물도 보인다. 조조가 자기 고향의 술을 헌제에게 바치는 장면인데 조조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농업기술서로서 6세기 전반 북위(北魏)의 북양태수(北陽太守)였던 가사협(賈思勰)이 저술한 <제민요술(齊民要術)>의 기술에 따르면 동한(東漢) 건안(建安) 연간(196년)에 조조는 자기 고향 박주에서 만든 구온춘주(九醞春酒)란 술을 헌제(獻帝) 유협(劉協)에게 바치며 이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아뢰는 ‘구온주법을 올립니다.(上九醞酒法奏)’라는 글에서 그가 말하길 “신의 고향은 남양곽지(南陽郭芝, 현재 보저우)입니다. 거기에 구온춘주란 술이 있는데 만들 때 누룩 20근을 흐르는 물 5섬에 씁니다. 섣달 2일에 누룩을 담그고 정월에 해동합니다. 좋은 쌀을 쓰며 누룩 찌꺼기를 잘 걸러냅니다. 3일에 한 번씩 술밥을 넣으며 아홉 번이 되면 그칩니다. 신이 이 방법으로 술을 빚어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맑으며 술의 지게미 또한 먹을 만합니다. 만약 이 방법으로도 술 맛이 없으면 열 번까지 늘이면 됩니다. 이 술은 달고 마시기 쉬우며 술 병(病)이 나질 않습니다. 삼가 올립니다.” 이후 이 술은 역대 황실의 공품(貢品)이 되었으며 특히 명청(明淸) 양대에 걸쳐 더욱 빈번히 진상되었다. 고정주란 이름에 ‘공(貢)’자가 보태진 연유도 여기에 있으며 술 회사는 1959년부터 오늘과 같은 고정공주란 술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기우제를 지내는 탕왕(湯王)
조금 더 내려 오면 상나라를 건국한 탕왕이 기우제를 지내는 탕왕기우(湯王祈雨)란 동상이 보인다.
중국 상나라 탕왕 때 7년 넘게 가뭄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 무속인에게 점을 치게 했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삼아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는 점괘가 나오자 탕왕은 "백성을 위해 기우제를 지내는데 백성을 죽일 수가 없다. 백성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상복을 입고 기우제를 올렸다. 탕왕은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남에게 미루거나 회피하지 않고 천재지변인 가뭄까지 자신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지도자의 최고 덕목은 책임지는 자세인데 요즘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어떤가? 공은 자신의 것이요, 책임은 남의 것이라 미루는 작태가 한심스럽다.
▶ 박주광가(亳州光街) 석패방
4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석패방도 보인다. 석패방엔 박주광가(亳州光街)라 써 있는데 아마 내가 지나 온 이 거리가 보저우의 관광거리인 모양이다.
▶ 화조암 입구(www.kimyto.co.kr에서 퍼옴)
보저우 성문을 지나 화핑루(和平路)를 거쳐 신화난루(新華南路)로 걸어가며 좌측을 아무리 살펴도 화조암(華祖庵)이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상인에게 물으니 한 블록 더 올라가 우측 비포장도로로 들어가란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따라가니 화조암이 보인다.
▶ 중국 한말(漢末)의 전설적 명의 화타
화조암은 중국 한말(漢末)의 전설적 명의 화타를 위해 지어진 사당으로 해마다 화타를 기리는 제사가 이곳에서 진행된다. 화타는 보저우 시민뿐만 아니라 전 중국인이 사랑하는 인물이다.진수의 역사서 삼국지 중 화타전(華陀傳)과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치풍질신의신사, 전유명간우수종(治風疾神醫身死, 傳遺命奸雄壽終 풍을 고치는 신의가 죽고 간웅의 수명이 다하다)’를 보면 화타와 관우, 화타와 조조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비롯해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머리에 병이든 조조<그림,내용:삼국지,박종화,어문각>
화조암이 지어진 유래는 다음과 같다. 평소 두통이 심했다는 조조는 아무리 좋다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었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이 죽고 난 뒤에는 심리적 불안까지 겹치며 두통이 더욱 악화된다. 이 때 신하 중 한 명이 그에게 민간 명의 화타의 의술에 대해 설명했고 조조는 곧 화타를 불러들인다. 조조를 알현한 화타는 왕의 머리가 아픈 것은 머리에 풍질(風疾)이 생겼기 때문으로 약을 처방하고 침을 놓아 일시적으로 통증을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 근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근본 해결책을 묻는 조조에게 마비산(麻沸散)을 사용해 정신을 혼미하게 한 뒤 도끼로 머리를 가르고 병의 뿌리를 제거하면 두통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관우를 죽게 한 자신을 화타가 해하려 한다고 믿고 수술 대신 언제든 처방을 내릴 수 있도록 자신의 곁에 남아 어의(御醫)가 될 것을 명하지만 평소 자신의 의술을 누구 한 사람이 아닌 백성을 위해 사용하고 싶었던 화타는 조조의 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자 화타는 고향에 있는 부인이 위독하다는 거짓을 고하고 조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화타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조조는 군사를 불러 화타의 “화타의 말이 사실이거든 살려두고 거짓이거든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라.”라며 화타의 고향으로 보낸다. 결국 화타의 고향을 찾은 조조의 병사에 의해 화타의 거짓말은 탄로가 났고 화타는 그 길로 체포된다. 조조가 있는 쉬창으로 향하는 길에 오른 화타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고 조조의 처형이 내려지기 전 향수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죽는다. 조조가 화타를 직접 처형한 것은 아니지만 화타는 조조 때문에 죽은 것이다. 화타가 죽은 뒤 조조는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며 화타의 고향에 그를 기리는 사당을 지은 것이 바로 화조암이다. 화타가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이 고향을 등진 뒤에도 백성의 아픔을 돌보고자 했던 화타를 기리는 후대의 마음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어진다. 당(唐)나라 초 화타가 살 던 옛 집 앞에 사당이 들어섰고 청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 공사가 이뤄졌으며 이후 1962년 보저우 지방 정부가 화타 사당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뒤 화타의 업적을 기록한 화타기념관을 증축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화조암 한글 안내문
회색 빛 벽돌 벽을 지나 매표소로 들어서는데 왼쪽 벽에 한글로 된 안내문이 있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글 번역이 너무 엉터리다. 내가 새로 번역해 줄까?
▶ 정전 내 화타 입상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앞에 정전이 보인다. 정전 안에는 진지한 표정의 화타 상이 서 있다. 마른 몸에 깊게 패인 주름에서 더 많은 환자를 돌봐주지 못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 중국사회과학원장 곽말약이 쓴 글씨
▶ 화타기념관 입구의 편액
▶ 화타기념관 내 화타 좌상
정전을 둘러본 뒤에는 오른 쪽 낮은 담 사이로 난 입구를 통해 기념관으로 들어간다. 기념관 입구에는 창생대의(蒼生大醫, 세상 모든사람을 위한 큰 의사)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기념관 정중앙엔 환자를 위해 고민하는 듯한 화타가 수심에 가득찬 얼굴로 앉아 있다. 기념관 벽엔 화타의 생전 모습을 담은 그림과 그의 업적 등이 전시되어 있다.
▶ 마비산을 연구하는 화타
▶ 오금희를 연구하는 화타
마비산을 연구하는 모습, 산 속에서 5가지 동물의 움직임을 따라 만들었다는 ‘오금희(五禽戱)’의 동작을 연구하는 화타의 모습을 벽화로 만들어 놓았는데 화타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인다.
▶ 화타기석(奇石)
기념관에는 또 거대한 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보저우에서 발견된 것으로 돌의 형상이 마치 화타와 닮았다 하여 ‘화타기석(奇石)’이라고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 이 돌을 발견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하다. 조금 떨어져 바라보니 생각에 잠겨 몸을 기울인 것 같기도 하다.
▶ 화타가 약을 조제하는 모습
▶ 화타의 제자들이 연구하는 모습
▶ 오금희 체조를 하는 모습의 동상
▶ 오금희 수련법 설명도
또, 기념관 2층에는 중국의 의학발전에 기여한 편작, 화타 등등의 인물에 대한 소개와 화타가 약을 조제하는 모습의 동상, 오금희 수련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 보저우의 특산품인 구징궁주(古井貢酒)(좌로부터 16년산, 10년산, 5년산)
전시관 마지막에는 다양한 한약재들과 보저우의 특산품인 구징궁주(古井貢酒)등 이 진열되어 있다. 약재∙약초는 화타와 같은 명의에 있어 천하의 어떤 보물보다 소중한 물품이었을 것이다. 천하의 명의를 배출한 보저우는 중국 4대 약재 시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술 음식 등 많은 먹거리에도 몸에 좋다는 약재가 사용되고 있었다. 지역 특산인 약재를 대하고 보니 보저우에 들어섰을 때 코 끝을 찔렀던 쌉싸름한 냄새의 정체가 밝혀지는 듯 했다.
▶ 원화초당(元化草堂)
▶ 원화초당(元化草堂) 내 화타 좌상
기념관 밖으로 나오자 화타의 휴식공간인 '원화초당(元化草堂)'이 있다.
▶ 환자를 진찰하던 익수헌
▶ 익수헌 내 환자를 진찰하는 벽화
▶ 약을 조제하는 존진재
▶ 약을 조제하는 모습의 벽화
▶ 약포
▶ 화타가 약초를 가꾸던 고약원은 연못과 정자로 변신
그 좌우에 환자를 진료했다는 익수헌(益壽軒)과 약을 조재했다는 존진재(存珍齋)가 있다. 화타가 약초를 가꾸던 공간은 오늘날 작은 연못과 정자가 어우러진 고약원(古葯園)으로 변해 있다. 이곳에 심어진 식물들은 약효가 뛰어난 약초라고 한다.
▶ 화타가 후진을 양성하던 곳
▶ 화타의 공적을 기리는 비림(碑林)
창궐하는 역병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고자 우물에 약초를 뿌렸다는 화타. 왕이 내린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며 만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화타는 중국인에게 있어 명의 이상의 존재다. 미천한 신분의 화타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神醫)가 되어 19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회자되며 백성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