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최초의 향약 시행처, 칠석동 부용정
남구 칠석동은 정월 대보름날 행해지는 고싸움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칠석동 고싸움은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시연되어 전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고싸움의 마을 칠석동에 고려 말 조선 초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뒤 전라도수군도절제사와 황해 감사를 지낸 김문발(1359~1418)이 낙향하여 세운 부용정이란 정자가 있다. 이 부용정이 우리나라 최초로 향약을 실행한 남구 칠석동 일대의 향약 시행처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자의 이름을 부용이라 한 것은 김문발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지만,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했던 북송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취하고 있다. 주돈이의 꽃 품평에 따르면 국화는 은자, 모란은 부자, 연꽃은 군자에 속한다. 주돈이는 “연꽃은 유독 진흙에서 나왔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다. 속은 비었으되 겉은 곧으며 넝쿨지지도 않고 가지를 치지도 않는다. 멀어질수록 향기는 더욱 청아해지며 우뚝하니 깨끗하게 서 있는 것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다가가 희롱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 현재 정자 안에는 양응정·고경명·이안눌 등의 시를 새긴 현판이 걸려 있고, 정자 주변에는 칠석마을 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 35호) 전수관과 부용 선생이 심었다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가 서 있다.
태종 11년(1411), 김문발은 병환으로 충청도수군도절제사를 사직하고 잠시 고향으로 내려와 여씨향약과 주자의 백록동 규약을 참조하여 향약의 규약을 만들고 이를 실행한다. 부용정 인근 칠석동 일대에서 실행된 이 광주향약은 전국 향약의 효시가 된다. 김문발이 전국 최초로 향약을 실시했음은 광주읍지 재학편에 “황해감사를 지낸 부용 김문발이 광주에서 최초로 향약을 설치하여 행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덕업상권, 과실상규, 환난상휼, 예속상교 등으로 잘 알려진 향촌 사회의 자치 규약인 향약은 중국 송나라의 남전여씨향약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여씨 향약은 중국 섬서성 남전현에 살던 여씨 4형제가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향리 전체를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만든 규약이었다. 이 여씨형제들에 의해 실시된 향약을 주자가 가감하여 발전시킨 것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이다.
조선의 향약은 주자향약에서 비롯된다. 주자향약은 주자대전에 실려 고려 말에 전래되지만 곧바로 시행되지 못하고, 100여 년이 지난 중종 12년(1517)에 조광조 등 사림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이미 살핀 것처럼 광주에서는 이보다 100여년 앞선 태종대에 김문발에 의해 남구 칠석동 일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김문발에 의해 시작된 광주향약은 널리 행해지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광주향약은 태종대에 김문발의 주도로 향약이 입조되어 시행됐으나 널리 퍼지지 못한 것을 뒤에 이선제가 다시 주도해 향적을 작성하고 향약을 시행하기 시작했다.”는 수암원지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문발에 의해 시작된 광주 향약을 계승한 사람은 문종 1년(1451) 예문관 제학을 지내고 고려사를 개찬한 필문 이선제와 광주 현감 안철석이었다. 이선제는 칠석동의 이웃 마을인 남구 원산동 출신으로 젊은 시절 김문발의 칠석동 향약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이선제에 의해 실시된 광주 향약의 내용이 그의 문집 수암원지에 실려 있다. 수암원지에 실린 광주향약은 3장과 부칙 등 총 24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제 1장은 주로 가족 및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끼리 서로 싸우는 자, 가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 고을의 연장자를 능멸한 자 등에 대해서는 가장 엄한 상등의 죄로 논하고 집강이 관청에 품의하여 법률에 의해 죄 값을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형제가 서로 싸울 때의 처벌이 재미있다. 형이 잘못하고 아우가 잘했을 때는 같은 벌을 주며, 형이 잘하고 아우가 잘못했을 때는 아우만 벌하고, 잘잘못이 서로 같을 때에는 형은 가볍게 아우는 무겁게 벌한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2장은 향촌민들이 지켜야 할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정부인을 박대한 자, 친구끼리 서로 싸운 자, 염치가 없는 자, 힘을 믿고 약자를 구휼하지 않는 자, 국가의 각종 세금 및 역을 행하지 않는 자 등은 중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 3장은 회의시의 불참자나 문란자에 대한 내용으로 하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부칙을 두어 하급관리들이 향촌 사회에서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국가의 공금을 탐할 경우 관에 고발하여 농민을 보호하고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도 규정하고 있다.
김문발에 의해 시작된 후 이선제와 현감 안철석에 의해 시행된 광주향약은 가족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는 상등의 벌로, 향촌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는 중등의 벌로, 향약을 운영하기 위한 회의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하등의 벌로 규정하고 있다. 상 · 중 · 하등의 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는 가장 엄한 벌을 받고 있음을 통해 당시 가정의 질서 유지가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칙을 통해 향리 등 관청의 하급관리가 민폐를 끼치는 행위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양반이 중심이 된 향약에 농민이 가입한 이유이기도 했다.
필문 이선제가 죽고 난 후 광주향약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홍치연간(1488~1505)인 15세기 말 16세기 초에 만들어져 100여 동안 실시된 양과동 동약을 분석해보면 거의 필문이 실시했던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이는 필문이 실시했던 광주향약이 양과동 동약으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고싸움의 마을 남구 칠석동은 전국 최초로 향약이 실시된, 오늘날로 말하면 향촌민의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 자치가 가장 먼저 실시된 매우 의미 깊은 마을이 아닐 수 없다.
광주향약의 계승지, 양과동정(良苽洞亭)
남구 양과동 마을 입구 도로변 언덕에 광주향약을 계승하여 양과동 동약을 실시하던 유서 깊은 정자가 있다. 양과동정이란 정자가 그것이다. 정자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자의 현판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정자의 역사는 더 깊다. 이는 15세기 양과동 출신인 최형한(?~1504)이 지은 ‘간원대의 제목을 붙여 시를 읊는다’ 라는 시의 제목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간원대는 양과동정의 별칭인데, 이곳을 드나들던 선비들이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인 간관으로 많이 진출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시 가운데 “선배들의 풍류를 누가 다시 계승할까?”라는 구절은, 양과동정이 최형한이 살았던 15세기 후반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자임을 말해준다.
정자 이름을, 마을 이름을 넣어 동정이라 한 것으로 보아 정자의 용도가 개인이 아닌 마을 공동으로 사용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양과동정은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였을 뿐 아니라 마을의 동적을 작성하고 향약 등의 업무를 시행하는 본부였다. 또 이 고장 출신들이 모여 조정에 상소할 것을 논의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그래서 양과동정은 다른 정자와는 달리 양과동적입의서, 양과동정향약서와 간원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특히, 이 정자에는 조선 초 황해 감사를 지낸 이웃 칠석동 출신인 부용 김문발이 전국 최초로 제정한 광주향약의 영향을 받아 홍치연간에 제정된 양과동 동약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홍치 연간에 시작된 양과동 동약은 100여 년 간 실시되다 임진왜란으로 한때 중단되지만, 1604년 유사경이 양과동적입의서를 짓고 향약을 재정비하여 다시 실행한다.
광해군의 폭정에 맞섰던 최형한이 이곳 양과동 출신이며, 김문발과 함께 광주향약의 좌목을 발의한 이선제(1389~1454)와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의병장도 이웃 마을인 원산동과 이장동 출신이다. 이들이 나라 위한 큰 꿈을 키웠던 장소도 이곳 양과동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