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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분노의 포도』 Ⅰ. 서론(序論)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 황진지대(Dust Bowl)로 변해버린 오클라호마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조드 가족과 수많은 이주 농민들의 비극적인 여정을 그린 대작입니다. (존 스타인벡 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강을 따라 이동하며 새로운 경계를 탐색하는 이야기라면, 『분노의 포도』는 66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횡단하며 삶의 굴곡과 기존 경계의 해체를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특정 시기의 역사적 비극을 넘어, 자본주의 구조의 냉혹함과 그로 인한 인간 관계의 파괴, 그리고 극한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대규모 자본에 의해 토지에서 내몰리고 낯선 땅에서 적대적인 시선과 맞닥뜨리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여정을 통해, 스타인벡은 '소유'의 문제를 넘어선 인간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글에서는 『분노의 포도』에 나타난 자본주의 비판과 관계의 상실,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짐 케이시를 중심으로 제시되는 사상적 메시지에 대해 논하고자 합니다. Ⅱ. 본론(본론) 『분노의 포도』는 자본의 폭력에 의해 파괴되는 삶과 그 속에서 인간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첫째, 자본 구조의 재편과 관계의 훼손. 『분노의 포도』는 대규모 자본에 의해 토지가 재구획되면서 소작농들이 삶의 터전에서 무참히 내몰리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트랙터가 농가를 허무는 장면은 생명력 넘치던 예전 세계와 대비되며 거대한 곤충 괴물이 대지를 약탈하는 듯 묘사됩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속에서 대지와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치명적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강력한 비판입니다. 토지 소유주, 은행, 심지어 트랙터 운전사까지 모두 시스템의 일부로서 '어쩔 수 없음'을 호소하는 상황은 갈등의 원인이 개인이 아닌 통제 불가능한 자본 구조 자체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둘째, 고통스러운 여정과 공동체의 맹아.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까지 66번 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이주민들의 여정은 극한의 고통과 결핍으로 점철됩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굶주리고, 먼저 온 캘리포니아인들의 경멸적인 시선과 착취적인 대우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이러한 절대적 절망 속에서도 인간적인 연대와 나눔의 맹아가 피어납니다. 길에서 만난 윌슨 부부와 조드 가족이 서로 돕는 모습, 열 가족 스무 가족이 하나가 되어 등을 맞대고 잠드는 천막촌의 밤은 '하나의 꿈'으로서 협소한 '나'의 굴레를 벗어나 '우리'의 유대를 만들어가는 작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위드패치 캠프와 같은 자치 공동체의 경험은 이러한 가능성이 구체화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셋째, 짐 케이시의 메시지와 '소유'에 대한 비판. 설교를 접고 방랑하던 짐 케이시는 '모든 인간은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공유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는 이주 노동자들의 단합과 투쟁을 이끌다 죽임을 당하며, '너희는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케이시의 사상은 계급 투쟁을 넘어 인간 본연의 관계와 연대에 대한 종교적 울림을 지닙니다. 작가는 케이시의 시선을 통해 자본과 은행의 탐욕뿐 아니라, 법적 권리로 정당화된 서부 개척사 이면의 탐욕, 그리고 이윤만을 좇아 지력을 쇠하게 만든 농민 자신의 책임까지 비판하며 '소유'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으로 나아갑니다. '소유는 너를 '나'로 응결시켜 '우리'로부터 영원히 차단한다'는 메시지는 소유에 기반한 인간 존재의 취약성을 역설합니다. Ⅲ. 결론(結論)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미국 농민들의 참혹한 현실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인간성과 '소유'라는 가치의 허점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작품입니다. 삶의 터전에서 내몰린 조드 가족과 이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여정은 파괴된 인간 관계와 극한의 절망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적인 연대와 공동체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짐 케이시의 사상은 이러한 연대의 중요성과 '소유'를 넘어선 '우리'의 가치를 역설하며 작품에 깊은 울림을 더합니다. 비록 이주민들 스스로도 과거에는 다른 이의 땅을 빼앗는 '탐욕'의 주체였으며, 그들의 농사 방식도 비극의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하며 역사적 아이러니와 인간 본성의 복잡성을 놓치지 않습니다. 『분노의 포도』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 기록을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과 소외 문제, 그리고 인간 존엄성과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걸작입니다. Ⅳ. 감상(感想) 및 해석(解釋) 『분노의 포도』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감상(感想)은 자본이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관계를 송두리째 파괴하는지에 대한 무력감과 분노입니다. 트랙터가 농가를 밀어버리는 장면이나,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은, 착취의 주체가 특정한 악인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임을 섬뜩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특히 '소유'가 인간을 '나'에 가두고 '우리'로부터 단절시킨다는 짐 케이시의 철학은 충격적이면서도 깊이 공감됩니다. 소유를 지키려는 욕망이 오히려 인간적인 연대를 가로막고 서로를 적대하게 만드는 현실(캘리포니아인들이 오키를 혐오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 위에서 서로를 돕고 '하나의 꿈'을 꾸는 이주민들의 모습, 그리고 위드패치 캠프와 같은 공동체의 시도는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인간적인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빛으로 해석됩니다. 케이시와 톰의 관계 변화 또한 개인적인 유대를 넘어 사회적 각성과 연대로 나아가는 의미심장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소유'가 아닌 '존재'와 '관계'의 가치를 역설하며,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질문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
<줄거리> '소유'를 넘어서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The Adventures of Huckle berry Finn)이 불량스럽지만 순수한 백인소년 헉핀과 도망노예 짐이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미대륙을 종단하는 이야기라면, 『분노의 포도』는 자기 땅에서 내몰린 농부들이 남아 있는 모든 삶을 챙겨 마치 상처입은 짐승처럼 거친 숨을 토해 내는 낡은 트럭에 위태하게 싣고 오클라호마에서 캘리포니아까지 66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미대륙을 횡단하는 이야기이다. (p.121) |
한편으로는 경계들을 이루면서 이와 동시에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새로운 경계를 탐색한 것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면, 도로를 따라 흐르는 삶의 굴곡을 통해 기존의 경계를 벗어난 탐색을 보여 주는 것이 『분노의 포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움직임을 강제한 것이 강퍅한 백인사회의 편협한 규범과 노예제의 비인간성이었다면, 후자는 서부 개척의 처절한 싸움 속에서 씌어진 공동체와 개인의 크고 작은 역사의 흔적을 말끔히 지운 뒤 그 토지를 대규모 단위로 새로 구획하는 자본구조의 재편성이다. 소작인들의 터로 트랙터가 곧장 밀고 들어가 그 안의 농가를 허물고 들판을 갈아 젖히며 작업하는 장면은 마치 엄청나게 큰 곤충 괴물이 대지를 침략하여 약탈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며, 이와 대조적으로 말과 함께 숨 쉬고, 땀 흘리며 일하던 예전의 상황은 따뜻한 생명력이 유동하던 세계로 묘사된다. 이제는 워낭소리처럼 사라져 가는 세계에 대한 서정성이 넘치는 묘사가 단순히 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되는 이유는 각 요소가 분리되고 파편화된 채 이제 남은 것은 효율성뿐인 세계에서 대지와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이 치명적으로 훼손되고 있다는 판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p.122) |
이 작품이 단순히 '저항'과 '사회고발'을 넘어선 경지를 획득한 것은 이처럼 대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모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드 가족을 가족을 비롯하여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이주민들은 이 '관계'를 상실한 채 새로 고향을 찾아 방랑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 이 세계에서 집을 헐리는 농부가 맞닥뜨리며 적대하는 트랙터 운전사는 사실 굶주린 자기 가족을 위해 일하는 서로 알 만한 이웃의 아들일 뿐이다. 이런 폭압의 한 축인 은행이 하는 일을 거기에서 일하는 이들 역시도 중요하다는 언급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은행은 비록 인간이 만들었을지 모르나 인간이 통제할 수 없게 된 괴물이 되어 있다. 저마다 처한 위치에서 호소하는 '어쩔 수 없음'에는 각자의 탐욕에 대한 자기변명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삶터로부터 내몰리는 농부들이 누구 하나를 지목하여 총질하는 것으로는 풀 수 없게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세계에서 갈등의 진정한 원인은 모든 길목마다 인간들을 대리로 반목시켜 놓으면서 본 모습을 감추고 있다. 오클라호마 이주민들을 '오케(Okie)' 라고 경멸적으로 부르며 악의에 찬 시선으로 적대하는 캘리포니아인들 역시 이런 반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설교를 접고 방랑하던 짐 케이시(Jim Casy)는 이런 상황에 대해 '지금까지 악마가 적인 줄 알고 싸워 왔는데 이제는 악마보다 더 한 것이 나라를 사로잡고 있다'라고 말한다. 케이시는 톰 대신 들어간 감옥에서 낱낱의 인간의 힘이 모여 큰 힘이 된다는 점을 깨달은 뒤 파업 지도자로 나섰다가 죽임을 당할 때 살인자들을 향해 너희는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인간들의 피비린내 나는 반목 이면에 자리 잡은 깊은 원인에 대한 응시가 담겨 있다. 기성종교에 대한 그의 비판이 이제는 더 이상 기도가 소용없게 된 세상이라는 말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나는 동시에 짐 케이시라는 그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와 앞 글자를 같이 하며 12명의 조드 가족들과 캘리포니아까지 함께한다는 점 때문에 계급투쟁에서 민중의 단합된 힘을 믿는 케이시의 행동과 죽음, 그리고 마지막 말은 종교적으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p.123) |
작가는 대지주, 은행, 자본으로 대표되는 '탐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조드 가족으로 대표되는 기층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강조하고 이들이 기존 삶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 열어가는 삶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이들을 이상화하고 있지는 않다. 캘리포니아인들이 멕시코인들에게서 강제로 땅을 빼앗았듯이, 그 양상과 규모가 달랐을 뿐 오클라호마인들 역시 선점이주자(sooner)라는 별칭처럼 서부 영토 개방 이전에 앞질러 가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은 셈이었다. 총을 들고 인디언들로부터 이 땅을 어떻게 지켰는지 아느냐고 입만 열면 말하곤 하는 선대의 자부심의 이면에는 법적 권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온 탐욕의 서부 개척사가 깔려 있다. 또 이들이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빚을 갚지 못해 소유권을 빼앗긴 뒤 자기 땅에서 소작하는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기계화에 밀려 완전히 내몰리는 데이는 지주, 은행, 관련 회사들의 냉혹한 이윤추구 탓도 있지만 순환경작을 하기보다는 이윤을 좇아 면화 재배로 일관함으로써 지력이 쇠한 데다가 가뭄까지 계속되면서 황진지대(Dust Bowl)가 되고 만 탓도 없지 않았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케이시가 던진 의미를 다시 생각할 때, 작가의 시선은 착취계급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소유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소유의 특성들로 인해 당신은 영원히 '나'로 응결되어 버려 '우리'로부터 영원히 차단된다"라고 적고 있다. (p.124) |
이들이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런 약속도 없는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가 소유에 기반을 둔 '나'의 존재가 공고한 것이기보다는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비록 굶주림을 해결하려는 욕망, 안녕과 기쁨을 찾고자 하는 개인들의 원초적 욕망들이 십만, 백만으로 수없이 증폭되는 가운데에서도, 협소한 '나'의 굴레를 깨고 나오는 과정은, 예컨대 하나뿐인 아끼는 담요를 건네주며 추위에 떠는 이웃의 아이를 위해 따뜻함을 나누는 것과 같이, 작지만 큰 일들로부터 시작된다. 초드 가족이 길에서 만난 윌슨(Wilson) 부부의 도움으로 그램의 마지막을 수습하고 또 윌슨 부부는 조드 가족의 도움으로 그동안 묶여 있던 여정을 다시 시작하듯 66번 도로에서는 절대적 결핍과 고통 속에서도 서로 나누는 과정이 시작된다. 딱정벌레처럼 줄지어 길을 가다가 저물녘 하나둘씩 모여 들어 열 가족 스무가족이 하나의 가족이 되고 아이들은 모두의 아이들이 되며 서로의 등을 대고 잠드는 밤이면 모두 '하나의 꿈'을 꾸는 것이다. 물론 이 세계는 이튿날 아침이면 허물어지고 말며 당장의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현실적 욕구가 이내 찾아들기 때문에 이 '하나의 꿈'은 아직은 자그마한 가능성일 뿐 온전히 '나'의 굴레를 벗고 곧바로 '우리'의 유대로 연결되는 현실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꿈이 작게나마 의미심장하게 확장되는 계기는 케이시와 톰의 관계에서 마련된다. 조드 가족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어느 마을 변두리나 물가마다 인접해 생겨난 일명 후버빌(Hooverville)로 불리는 천막촌에 첫 짐을 푼 뒤 먼저 도착한 이주민들로부터 듣게 되는 이야기는 매우 절망적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비참하게 굶주리다 끝내 발길을 돌려 고향으로 되돌아 가던 사람들이 들려준 절망적인 이야기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전에, 이들은 자신들이 대농장주와 자본, 경찰력 등이 체계적으로 옭죄는 탄압 속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대농장주와 자본, 경찰력 등은 값싼 임금계약을 맺지 않는 한 이주민들이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도록 내몰고 다니면서 이주민들이 조직화되는 것을 막는가 하면, 지도자로 나서는 이들은 금방 잡혀서 감옥에 가거나 저항하면 죽임을 당하고 '죽은 채 발견된 부랑자' 정도로 처리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톰과 케이시가 후버빌 도착 당일에 곧바로 겪게 되는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p.125) |
싼 값에 노동인력을 모으려고 온 거간꾼에게 정확히 얼마를 받기될지, 몇명이 필요한지를 한 이주민이 따져 묻자 거간꾼이 끼고 온 경찰이 나서서 빨갱이'라며 잡아가려는 과정에서 폭력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이 헤어진 후 다시 만날 때까지, 한편으로 케이시가 감옥의 경험을 거치고 이주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는 동안 톰이 겪는 중요한 경험은 당시 작가가 직접 방문하여 관찰한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위드패치캠프에서 마련된다. 공동소유, 책임분담, 민주적으로 선출된 위원회를 통한 의사 결정, 주말의 축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점에서 이 캠프는 일종의 자치구였으며 비록 유토피아적인 면을 띠고 있되 개인적. 가족적 이기주의를 다스리는 비교적 실현가능한 대안적 사회이기도 했다. 그런 한편, 폭력과 착취의 바깥 세계와 대조를 이루며 구성된 이 세계는 어디까지나 정부의 극히 한정적인 구호지원에만 기대고 있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한시적인 공동체였다. 위드패치에서의 공동체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파업을 이끌고 있던 케이시를 다시 만난 톰이 이주 노동자들의 단합의 필요를 역설하는 그의 말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파업파괴자들의 곤봉에 맞아 죽는 그를 보고 어둠 속에서 반사적으로 정당 방어하듯 폭력적인 행동에 나선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의 유대는 오랜 여정을 함께하며 쌓인 개인적인 친연성을 넘어서서 한층 더 커다란 사회적·역사적 맥락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케이시가 계급간의 적대적인 상황에서 탄압받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나서긴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이 지닌 종교적 울림에서 보듯, 그의 시선이 계급적인 대립상황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종교적 활동을 접고 방랑하면서 그가 얻은 깨달음이 '모든 인간은 하나의 커다란 영혼을 공유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한 부분들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숨어 지내던 톰이 '사람은 혼자만의 로는 아무 소용이 없어서 하나 둘 더해질 때마다 더 견고한 힘이 된다는 너무도 간명하고 상식적이나 그것을 진정 현실로 살기는 너무나 어려운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곰삭히던 것도 위와 같은 케이시의 말이었다. (Jefferson), 레닌(Lenin) 등의 사상가나 혁명가의 영향 못지않게 인간과 인간의 관 이런 점 때문에, '분노의 포도』에는 페인(Paine), 마르크스(Marx), 제퍼슨계를 포함하여 범우주적 합일을 노래한 에머슨(Emerson)이나 휘트먼(Whitman)과 같은 문인들의 영향이 크게 자리한다고 보기도 한다. (p.126) |
이는 작가 자신이 정의, 정치적 억압의 철폐, 임금인상 등과 같은 문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이것들이 협소하고 이기적인 '나'와의 더 근본적인 투쟁과 진전에서 최종 목적이 아닌 하나의 계기이자 그 도상의 성취라고 여긴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총 가지고 설쳐대는 경찰은 없어도 더 나은 질서가 유지되던 워드패치 캠프를 떠올리며 존재의 존엄을 찾기 위한 길에 나설 때, 톰은 마에게 '모두가 하나의 커다란 영혼의 일부이므로 마가 바라보는 어디에나, 굶주린 이들의 싸움터 어디에나, 삶을 꾸려가는 어디에나 자신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간단없는 흐름으로 보는 인식을 마와 공유한다고 볼 수 있는 톰이 밝히는 자신의 진정한 거처는 케이시가 먼저 합류한, 소유에 기반을 둔 협소한 개인인 '나'를 넘어서는 장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분노의 포도』가 소유에 기반을 둔 협소한 '나' 중심의 '미국의 꿈'이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여전히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의미심장한 문제의식과 과제를 안겨 준다고 할 수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소유를 넘어선 '우리'의 차원에서 진정 새롭게 성취되어야 할 꿈이 비단 미국의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터이다. (p.127) |
첫댓글
동서양문학고전산책(3-1)
<과제명>
교재와 강의 8~15장을 공부한 후, 여기에서 소개된 작품들 중 자유롭게 두 편을 골라 정독합니다.
이후 각 작품의 줄거리 요약(A4지 1쪽), 본인의 감상과 해석(A4지 1쪽)으로 과제물을 작성합니다.
(분량 A4지 총 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