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 '
농담 한 송이
'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이 가을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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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 '
포도나무를 태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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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거장에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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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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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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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기다린 제 기척이 너무 시끄러웠지요?
제가 너무 살아 있는 척했지요?
이 봄, 핀 꽃이 너무나 오랫동안
당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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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도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같다 그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 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
'그러나 '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
지난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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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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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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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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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가,라고 했는데 꼭 잘 자,라고 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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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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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지면서 보낸 편지를 읽고 있어요
짧네요 편지, 그래서 섭섭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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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요?
예, 여적 그러고 있어요
목련, 가네요 '
우연한 감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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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망설임은 당신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폭력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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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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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도시 사람들은 동쪽을 바라보며 희망은 맨 마지막에 죽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너무나 뜨거워 잡을 수가 없을 때 희망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희망을 신뢰한 적은 없었으나 흠모하며 희망의 관광객으로걸은 적은 있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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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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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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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독약을 먹으며 시간을 완성할지 곰곰히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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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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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에서 빛이 가장 많은 곳에
가장 차가운 햇빛은 떨어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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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좋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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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내 여름의 신발은 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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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과 아주 조금만 헤어졌다 떨리던 여름은 고요한 몸이 되어 멀리 있는 당신을 안았다 '
빙하기의 역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내 속의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
내 속의 아주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
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
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
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
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
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
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
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
병원 뜰 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
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모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
' 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이 더 많대요 ' 뼈만 남은 손을 감싸며 ' 흐느끼던 손 '요
왜 나는 너에게 그 사이에 아무 기별을 넣지 못했을까?
인간이란 언제나 기별의 기척일 뿐이라서
누구에게든
누구를 위해서든
하지만
무언가, 언젠가, 있던 자리라는 건, '정말 고요한 연 같구나 '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어주니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너, 없이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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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한 잔을 마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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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의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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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의 간격이라는
원초 비극을 바라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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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러했듯 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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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의 가장 시끄러운 곳 속에서
떨어진 노래를 줍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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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메기
잘 가, 잘 자 두 단어가 바뀐 기분이 더 큰 요즘
- 잘 자,라고 했는데 꼭 잘 가,라고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