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주님의 은혜로운 부름(主의恩召)
요한복음 6:29-40, 제는 37절
1931. 6.
今世多召, 人人應召而往, 由此而組成各社會, 召有各樣, 或以金召, 或以權召, 或以學問召, 或以主義召, 桃李不言下自成蹊, 市中有求人皆歸之, 然今之社會炎凉而已也. 某大臣之家, 車馬盈門, 今則冷落如掃, 某富豪之賓客如雲, 今則秋風生焉. 世人之召皆不可信也. 變幻如泡沫風燈, 今看聖書, 主召甚鄭重, 示亦甚鄭重, 不如世人之變幻也. 來主者人不能自來, 神導之以來, 來則主不棄云. 此約束堅如金石, 天地變動, 主言不變. 慰我安我甚大矣. 孔子曰我無棄人, 孔子亦聖人, 必有不棄之人, 然亦不可信, 然主曰來我, 我不棄云. 信如金石, 自古來主者, 受何等大福也? 熱心愛國者, 莫如摩西而始來主然後, 引導己民而至曠野. 詩學莫如大衛, 而始來主然後, 其詩甚美麗矣. 知慧莫如所羅門, 而始來主然後, 爲知慧之王. 將略莫如約西亞, 而始來主然後, 能克迦南. 然世人之召, 人易聽之, 人易惑之, 而惟主召則人不能聽之也. 노아一百二十年間召人, 而人不能聽之, 田中藏寶, 市上珍珠, 皆不能易知也. 故安得召, 빌입曰 但來見也. 主於經中, 有幾次召人, 順次如左,
一.馬太十一章二十八節. 負重者來我, 人以此句皆謂罪負也. 非但罪負也, 事業如負, 人皆有業, 遊惰者不必信主也. 流汗而勞者必信主, 以上列擧來主之, 聖人皆有重負, 而來主者也. 人曰事繁而不能信主云甚非也. 不信之事業, 必有缺陷, 來主之時, 必嚬蹙不安者也. 自己勞力而成事者, 來主之時有感謝, 尤有不忘之心也. 가인은矜己而納主故主不悅, 아벨은抑己而納主故主悅納, 吾之萬事萬物, 皆由主而來, 刻骨難忘, 況不奉主乎? 今人考其信之原由則皆有信由, 而我爲職分而信, 其信必與事業而俱亡矣. 彼得意欲以錢賣聖神之膳物, 爾與錢俱亡云, 使徒八章二十節. 吾等之信單純也, 非主無論某事皆不能成功. 요한十五章五節. 故欲成事者, 當依主力而成, 依賴不搖可也. 如此之人皆來主, 主必輕爾負, 使之安心成事耳.
二, 渴則來我云, 요한七章三七節. 此云渴者何也? 主曰慕義如渴, 世上無義, 人皆自以爲義, 然主視之無一完全, 長夜沈沈, 螢焰翩翩, 而星月皎潔, 亦非眞光, 旭日仍時上天, 旭日之下, 百怪皆退, 主之正義如雲中之虹, 隱而不見故世上無義, 世人渴於義也. 世之人稱義甚多, 孝父爲義, 守節爲義, 忠良爲義, 主視之皆不完全也. 故主曰先求義國, 諸物皆備矣. 主謂아부라함曰 義, 義由信而得也. 아부라함之義, 千古罕見, 阿伯初則如渴慕之, 主以其義, 充滿生活及事業之中, 幷見其義綽綽有餘, 故阿伯之求, 最先求者神之義也. 故當渴於義者來我, 我以義充滿之. 其次世人渴於生, 但知肉生, 不知靈生也, 來主之靑年, 幷行法律, 以世人觀之一無不足, 其心常常不安, 不知永生故也. 人皆渴於生而尤渴於永生也. 知靈生而後可知肉生也. 但知肉生故渴於財而或至自殺, 渴於愛而投水, 渴於學而投水者, 皆由肉生而致之矣. 故先求者靈生, 永生之上帝, 在我內可永生矣.
三, 路可十四章十七節. 曰百物俱備來矣. 此婚宴請客之比也, 主爲新郞, 敎會爲新婦, 百物云者供客之飮食, 延客之筵席, 飮食卽聖經也. 筵席卽敎堂也, 主謂 셰가리아曰, 食此卷甘如蜜.
지금의 세상에는 부르는 일이 많아서 사람마다 부름을 받고 가서 각각의 사회를 조성합니다. 부름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혹은 돈을 벌기 위한 부름이고, 혹은 권력을 얻기 위한 부름이고, 혹은 학문을 위한 부름이고, 혹은 사상적인 주의(主義)를 위한 부름입니다.
옛말에 ‘복숭아나 자두가 사람들을 오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 꽃나무 밑에는 감상자들이 모여 저절로 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자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건을 구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더위와 추위가 있을 뿐입니다.
어느 대신(大臣) 집에는 찾아오는 수레와 말들이 늘 문에 가득 차더니 지금은 비로 쓸어 없앤 듯이 쓸쓸해 졌습니다. 어느 부호의 집에는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들더니 지금은 가을바람에 낙엽 떨어진 듯이 을씨년스러울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부름은 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헛되이 변해지는 것이 마치 물거품 같고 바람 앞의 등불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부르심이 매우 정중하여 세상 사람들이 변하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주님 앞에 오는 자는 사람이 스스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오는 것입니다. 오는 자를 주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 약속은 쇠나 돌과 같이 단단하여 천지가 변하여도 주의 말씀은 변하지 않아 우리를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매우 큽니다.
공자가 ‘나는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공자도 성인이어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고는 하였으나 이 또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에게 오라. 나는 버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믿음은 금석처럼 단단하여 예로부터 주님에게 온 자는 누구나 매우 큰 복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애국한 자 중에 모세만한 이가 없는데 모세는 자기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시학(詩學)에서도 다윗만 한 이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온 뒤에 그의 시는 매우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지혜에는 솔로몬만한 이가 없습니다. 그는 주님께 나아 온 뒤에 지혜의 왕이 되었습니다. 장군으로서 지략은 여호수아만한 이가 없습니다. 그가 주님께 나아 온 뒤로 가나안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의 부름은 사람들이 쉽게 듣고 쉽게 유혹을 받지만 오직 주님께서 부르심은 사람들이 들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는 120년 간 사람을 불렀으나 사람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밭 가운데 보배를 숨겼다든지 저자거리의 진주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부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빌립이 ‘와 보라’ 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 가운데 여러 번 사람을 부르셨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마태복음 11:28. ‘무거운 짐을 진 자 나에게 오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다 죄를 진 것이라고 이릅니다. 비단 죄만 짐일 뿐 아니라 사업도 짐과 같습니다. 사람마다 사업으로 할 일이 있으나 놀고 게으른 자는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땀 흘려 노력하는 자만이 반드시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앞에서 열거한 것은 주님에게 온 성인(聖人)들로서 다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에게 온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이 번잡하여 주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입니다. 믿을 수 없는 사업은 반드시 결함이 있어서 주님에게 올 때 반드시 찡그리고 비판할까봐 불안한 것입니다. 자기가 노력하여 일을 이룬 것은 주께로 나아 왔을 때 감사함이 있고, 더욱이 주님을 잊지 못하는 마음까지 있게 됩니다.
가인은 자신을 뽐내며 주님에게 드렸으므로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았고, 아벨은 자신을 절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드렸으므로 주께서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만사와 만물이 다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뼛속까지 새기어 잊을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주님에게 바치는 물건이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의 원인을 따져보면 다 믿음에 까닭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직분을 위하여 믿게 되면 그 신앙은 사업과 함께 망합니다. 베드로가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팔려고 하였다면 너는 돈과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8:20). 우리들의 신앙은 단순합니다. 주님이 아니면 어떤 일을 막론하고 다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요한복음 15:5). 그러므로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의뢰하여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 주께로 나아옵니다. 그러면 주님은 너희 짐을 가볍게 하고, 안심하고 이루게 할 것입니다.
둘째, ‘목마른 자는 내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7:37).
여기서 목마르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이르기를 ‘의(義)를 사모하기를 목마른 것과 같이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의가 없는데 사람들은 다 ‘스스로 의를 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볼 때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긴 밤 어둠에 싸였을 때, 반딧불이가 펄펄 날고, 별과 달이 비취어도 이 역시 참된 빛은 아닙니다. 밝은 해가 때맞춰 하늘에 올라오면 그 밝은 햇살 아래서 백 가지 괴이한 일들이 다 물러갑니다.
주의 정의(正義)는 구름 가운데 무지개와 같습니다. 숨어서 보이지 않으므로 세상에는 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은 의에 목마릅니다.
세상에는 의로 일컫어지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을 의라고 하고, 절개를 지키는 것도 의라고 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양심을 가지는 것도 의라고 하나, 주께서 보실 때에는 다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먼저 의로운 나라를 구하라.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느니라’하였습니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롭다 하셨는데, 의는 믿음에서 얻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목마른 것처럼 사모하게 되니 주님께서 그 의로 생활과 사업에 충만하게 해 주어, 그 의가 넉넉하여 남음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구한 것은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그리하여 ‘의에 목마른 자는 마땅히 나에게 오라. 나는 의로써 가득 차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세상 사람들이 삶에 목마른 것은 다만 육신의 생이고, 영적인 생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을 찾아 온 청년은 율법을 행하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볼 때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불안하였습니다. 영생(永生)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 생을 목마르게 바라지만 영생에 더욱 목말라 합니다. 영의 삶을 안 뒤에 육신의 삶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만 육신의 삶만 알기 때문에 재물에 목말라 자살을 하는데 이릅니다. 사랑에 목말라 물에 몸을 던져 죽습니다. 또 학문에 목말라 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습니다. 이는 다 육신의 삶만 아는데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구할 것은 영의 삶입니다. 그러면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내 안에서 영생할 수 있습니다.
셋째, 누가복음 14:17에 ‘오소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나이다.’ 하였는데 이는 혼인 잔치에 손님을 청한 비유입니다. 주님은 신랑이고 교회는 신부이며, 온갖 물건으로 손님에게 제공할 음식과 손님을 맞이할 자리인데, 여기서 음식은 <성경>이고, 앉을 자리는 교회당입니다. 주님께서 스가랴에게 이르기를 ‘이 책을 먹어라, 꿀처럼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