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전진(前進)
누가복음 9:51
夫前有生命, 後有死亡. 故人欲生而前者, 曰 人生行路也. 此行路, 人不可得免, 自王公至乞人, 皆入此路, 人之進路各異也, 士農工商, 其外百工技藝, 各有其路, 而主曰 我卽路也云, 此何意也? 主爲各人之引導者. 某都市設大博物館, 館之外數里有一橋, 橋上掛耶蘇聖眞, 各人拜而過之, 農曰我師, 商亦曰我師, 工士亦曰我師, 各人皆曰我師, 忠州端月川上, 有林慶業肖像, 人皆願見, 無不敬服, 曰 林將軍也. 主像如此, 主爲各人之引導, 則卽爲各人之路也. 欲得生命而進者, 捨예수而不能進, 又不能得也. 故主曰 我卽路也. 然人生行路之上, 有一大障碍, 拿巴倫遠征伊太利, 越알푸山, 拿翁之越알푸, 卽千古壯擧. 何也? 越一大障碍也. 孔明深入南方, 五月瀘水亦大障碍也. 能渡而擒孟獲, 亦壯擧也. 今主之예루살넴, 亦拿翁之알푸, 孔明之瀘水也. 而主邁往不休, 亦英雄的氣分也. 彼庸志弱行之靑年輩及一般敎友, 仰吾主之聖像而學焉, 人之前進, 盲進甚多也. 盲者未知前道之危險, 故不爲豫備而往, 往往落望失魄也. 故阮籍哭於窮道, 墨子迷於亡羊, 皆此意也. 如有確執無疑者, 則雖死無悔也. 善竹橋鄭夢周過之而死, 文天祥過燕獄而死, 皆死而無悔者, 確有進路, 雖死不悔也. 不知而往, 僥倖而生, 不幸而死, 如船過大海, 猝遇暗礁, 或免破碎, 或不免破碎, 成則王, 敗則逆, 皆中世怪雄之事也. 非大聖大雄之事也. 大聖前定不惑, 怪雄無前定而惑, 故項羽之敗, 發虞兮之嘆, 韓信之死, 發烹狗之悲, 張巡許遠之死, 罵敵不休, 提上之死, 少不變節, 由此觀之, 惑不惑之間, 可知其人也. 今觀主之邁進, 有人不可及者, 猶大之賣主, 羅兵之暴橫, 祭祀之强壓, 無不知之, 其眼光已見十字架, 又見골고다, 死期迫在目前, 主已灼知, 而猶爲邁往者, 眞大勇也. 自古人生行路, 一未見如此之險巇, 眞悲絶慘絶也. 獻身云犧牲云者, 人物甚多, 而有爲義人而死, 有爲邦國而死, 名垂竹帛也. 然有爲罪人而死, 吾未聞其人也, 亦未見其人也. 爲罪人而死, 有何榮光乎? 古者 國逆甚多, 與之同謀而死者亦多, 然幷與國逆同視, 遺臭萬年耳. 然則主爲罪人而死, 人雖棄之, 神則悅納也. 故主之犧牲, 異乎世人之犧牲也. 主之前進, 爲罪人而往, 是所難也. 盲進而取禍, 不足可論, 已知有禍而進者, 非主不能. 將與敵戰, 知某所必敗, 則必不往. 金元述之事 是矣. 神知以色列人與猶人戰則必敗, 故命不入者, 知人心故也. 主不似以色列人, 知大勇無敗, 故以大事托之, 向聖京而進, 使立祭祀之前, 又使立監司之前, 心無二事, 口無異言, 可謂神之信任者, 非主則不可也. 人之冒險有爲得而取也, 金剛僧侶, 採石茸者, 經何等危險而取云, 世之冒險, 皆如是, 而主之冒險, 非徒無所取也, 徒死而已. 何人能冒往也? 是所難也. 今吾朝鮮事業, 取上二者, 而反之可也. 古者猶人以落伍者, 指爲忍人, 吾人與世人視之, 眞落伍者也. 誰爲落伍者而勇敢也? 惟主而已也. 信者當學之不爲我而冒險, 爲罪人而冒險, 僉位念之. 吾人之前途有大難, 當已前知可也. 前道平安不可望, 可望僉位如主知有禍而進, 雖當國難, 幸勿落心, 進進不已可也. 主前有예루살넴, 朝鮮之前亦有예루살넴, 此예루살넴, 今非樂園, 後必爲天國. 古者猶人生活, 甚抵牾不合, 不入希律黨, 則無榮光, 不入稅吏黨則無金錢, 不入書記黨則無學問, 不入法利賽則無宗敎, 此猶人之階級, 而參此階級者, 果幾人乎? 自聖京至撒馬利亞, 加利理所居之人, 皆落伍而爲罪人, 甚至以犬類排之, 悲哉猶人也! 「八月十二日 体府」
대체로 앞에 생명이 있고 뒤에 사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살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면서 ‘인생행로(人生行路)라’고 말합니다. 이 행로는 면할 수 없는 길입니다. 위로 왕공과 같은 귀족에서부터 천인인 거지까지 다 이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는 진로(進路)는 각각 다릅니다. 사농상공(士農工商)과 그 밖에 백 가지 직업 및 기술들이 각기 다른 길을 갖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각 사람의 인도자입니다. 어느 도시에 큰 박물관을 열었는데 박물관 밖의 두어 마장[수리數里] 거리에 다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다리 위에 예수의 사진을 걸어 놓았더니 지나는 사람들이 절을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중에 농사꾼은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이다’라고 하였고, 장사꾼도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이다’라고 하였으며, 공장의 장인도 역시 ‘우리 스승이다’라고 하여 모두들 자기네 스승이라고 하였답니다.
충주 단월천(端月川) 위에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초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보고 싶어 하여 가보고 마음으로 존경하여 이르기를 ‘우리 임장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초상화도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주님이 각 사람을 인도하게 되니 주님이 바로 인생의 길이십니다.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는 자는 예수를 버리고 갈 수도 없으며 또 생명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바로 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인생행로에는 누구나 큰 장애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멀리 이태리를 치러 가는데 알프스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 것은 천고의 장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큰 장애물을 넘어 갔기 때문입니다. 제갈공명이 남방 나라를 깊이 들어가서 큰 장애물인 노수(瀘水)를, 그것도 그 더운 5월에 건너가서 맹획(孟獲)을 사로잡았으니 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것도 역시 나폴레옹의 알프스요, 제갈공명의 노수입니다. 주님이 쉬지 않고 애써 가신 것도 역시 영웅적인 기운이었습니다. 저 용렬한 뜻과 연약한 행동을 가진 청년들이나 일반 교우들은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초상을 우러러 보며 배워야 합니다.
전진하는 사람 중에는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앞길에 위험이 있는 줄을 모르므로 예비함이 없이 가다가 때때로 낙망하고 정신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동진 때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은 막다른 길에 닿자 울었고, 전국시대 묵자(墨子)는 양을 잃고 어느 길을 가야 할지 몰라 슬퍼하였으니, 그들이 만일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곧 선죽교를 지나다가 죽은 고려 말 충신 정몽주(鄭夢周)와 연옥(燕獄)에 갇혔다 죽은 송(宋)나라 말기의 재상 문천상(文天祥)은 모두 죽어도 후회 없는 사람들입니다. 진로가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죽는다고 하여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다가 요행히 살았거나 불행히 죽는 것은 배가 큰 바다를 건너다가 갑자기 암초를 만났을 때 혹은 파선은 면할 수도 있고, 혹은 파선이 되기도 하니, 이게 다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중세(中世)의 괴이한 영웅들의 일이고 큰 성인이나 영웅의 일은 아닙니다.
큰 성인은 앞날을 결정해 놓고 의혹을 가지지 않지만 괴이한 영웅은 앞날이 불안정하여 의혹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초패왕 항우(項羽)는 전쟁에 실패할 때 사랑하는 우희(虞姬)와 이별하며 ‘우미인이여! 어떻게 할까?’하는 탄식을 하였고, 한(漢)나라 개국공신 한신(韓信)은 ‘도망가는 짐승이 다 없어지니 따라가던 사냥개를 삶긴다.’라는 슬픔을 노래했습니다. 그와 반대로 당(唐)나라 안록산의 난리에 적을 막다 장렬하게 죽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끝까지 적을 욕하였고,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提上)은 일본 왕에게 절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확신과 의혹의 사이에서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볼 때 거기에까지 못 갈 것이라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에서 주님을 판 일과, 로마 병정의 횡포와, 제사장의 강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 눈빛은 이미 십자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또 골고다를 보고 죽음의 시기가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신 것은 참으로 큰 용기입니다. 예로부터 인생행로에 이처럼 험난한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비통하고 참담합니다. 헌신한다든지, 희생한다든지 하는 자는 매우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든지,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든지 하면 그 이름은 역사[죽백竹帛]에 길이 남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위하여 죽었다는 사람은 나는 일찍이 듣지 못하였으며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죽으면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옛날에 나라에는 역적이 매우 많아서 함께 모의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나라의 역적과 똑같이 보았으므로 그 불미스러운 이름은 만년 동안 내려갑니다. 그런즉 주님은 죄인을 위하여 죽었으니 사람들이 비록 버렸어도 하나님은 즐겁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희생은 일반 세상 사람의 희생과 다릅니다.
주님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죄인을 위하여 가는 것이니 이것이 어려운 바입니다. 맹목적으로 나아가다가 화를 입는 것과는 족히 경중을 논할 수가 없습니다.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나아간 사람은 주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장차 적과 전쟁을 할 때 어디에 가면 꼭 패한다고 알면 반드시 가지 않아야 합니다. 신라의 장군 김원술(金元述)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이 반드시 패할 줄을 아셨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 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인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사람과는 달리 큰 용맹을 가지고 실패하지 않을 줄 아셨기 때문에 큰일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聖京)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서 제사장 앞에 서게 하고, 또 감사(監司)의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없고 입으로 딴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가히 하나님이 신임하는 이로 주님이 아니면 불가하였습니다.
사람은 얻기 위하여 모험을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강산의 승려 중에 석이(石茸)버섯을 따오는 사람은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따온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험은 다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험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능히 그 위험을 무릅쓰고 가겠습니까? 이것이 어려운 바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에서 해야 할 사업은 위에 든 두 가지를 취하기 위하여 반성하는 것이 옳습니다. 옛날 유대인은 낙오자를 가리켜 인인(忍人)으로 지적하였는데, 우리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냥 낙오자일 뿐입니다. 누가 낙오자를 위하여 용감하게 나아가겠습니까? 오직 주님만이 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자는 마땅히 나를 위하여 모험할 것이 아니고 죄인을 위하여 모험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앞길에 큰 어려움이 있으니 마땅히 미리 알아 두는 것이 옳습니다. 앞길이 평안한 것은 바랄 수 없습니다. 가히 바랄 것은 여러분께서 주님과 마찬가지로 앞길에 화가 있을 줄 알면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비록 나라에 어려움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말고 나아가고 나아가기를 그치지 말기 바랍니다. 주님의 앞에는 예루살렘이 있고 조선의 앞에도 역시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지금은 낙원이 아니지만, 후일에 반드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의 생활은 매우 모순되어 합리적이지 못하였습니다. 헤롯당에 들어가지 않으면 영광이 없으며, 세리에 들지 못하면 금전이 없고, 서기관 파에 들어가지 않으면 학문이 없으며, 바리새인에 들지 못하면 종교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계급입니다. 그러나 이 계급에 참가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었겠습니까?
예루살렘[성경聖京]으로부터 사마리아까지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낙오자로 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개와 같은 무리로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슬프다, 유대인이여!
「8월 12일 체부(体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