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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易有聖人之道 四焉하니 以言者는 尙其辭하고 以動者는 尙其變하고 以制器者는 尙其象하고 以卜筮者는 尙其占하나니
역은 성인의 도가 넷이 있으니, 써 말하는 자는 그 말을 높이고, 써 움직이는 자는 그 변함을 높이고, 써 그릇을 만드는 자는 그 상을 높이고, 써 점치는 자는 그 점을 높이나니,
[程子] 曰易有聖人之道四焉부터 止非天下之至精其孰能與於此라 ○言은 所以述理니 以言者尙其辭는 謂其言은 求理者니 則存意於辭也요 以動者尙其變은 動則變也니 順變而動은 乃合道也요 制器作事는 當體乎象이오 卜筮吉凶은 當考乎占하니라 受命如響하여 遂知來物은 非神乎아 曰感而通은 求而得精之至也라
[정자] 말하기를, ‘易有聖人之道四焉’부터 ‘非天下之至精其孰能與於此’까지라. ○말은 써 이치를 서술하는 바이니, ‘以言者尙其辭’는 그 말은 이치를 구하는 것이 곧 말에 뜻을 보존함을 이르고, ‘以動者尙其變’은 움직이면 변하니 변함에 순하여 움직임은 이에 도에 합함이고, 그릇을 만들고 일을 지음은 마땅히 상을 체로 하고, 복서의 길흉은 마땅히 점을 살펴야 하니라. 명을 받음이 울리는 듯하여 드디어 오는 물건을 앎은 신이 아닌가? 느껴서 통한다고 함은 구함에 정미함의 지극함을 얻음이라.
[本義] 四者는 皆變化之道니 神之所爲者也라 ○問以言以動以制器以卜筮에 這以字는 是指以易而言잇가 否잇가 曰然이라 又問辭占은 是一類요 變象은 是一類인대 所以下文至精合辭占說하니 至變合變象說잇가 曰然이라 占與辭是一類者는 曉得辭라야 方能知得占하고 若與人說話면 曉得他言語하여 方見他胷中底蘊이라 變은 是事之始요 象은 是事之已形者라 故로 亦是一類也라
[본의] 넷이란 것은 다 변화의 도이니, 신이 하는 바이라. ○묻기를, “‘以言’ ‘以動’ ‘以制器’ ‘以卜筮’에 저 ‘以’는 이에 ‘以易’을 가리켜 말했습니까? 아닙니까?” 말하기를, “그러하니라(以易이니라).” 또 묻기를, “辭와 占은 이 한 종류이고, 變과 象은 이 한 종류인데, 써 아래 문장에 지극히 정미함이 辭와 占에 합하는 바라고 설명했으니, 지극한 변함은 變과 象에 합한다는 설명입니까?” 말하기를, “그러하니라. 占과 辭는 이 한 종류라는 것은 깨달아 辭를 얻어야 바야흐로 능히 占을 얻어 알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한다면 저 언어를 깨달아 얻어 바야흐로 저 가슴속에 이르러 쌓임을 볼지니라. 變은 이 일의 시작이고, 象은 이 일이 이미 드러난 것이라. 그러므로 또한 이 한 종류라.
是以君子 將有爲也하며 將有行也에 問焉而以言하거든 其受命也 如嚮하여 无有遠近幽深히 遂知來物하나니 非天下之至精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
이로써 군자가 장차 위함이 있으며, 장차 행함이 있음에 물음에 써 말하려 하거든 그 명을 받음이 울리는 것 같아 멀고 가까우며 그윽하고 깊음이 있음이 없이 드디어 오는 물건을 아나니, 천하의 지극한 정미함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에 더불어 하리오.
程子曰卜筮之能應과 祭祀之能享은 亦只是一理니 蓍龜雖无情이나 然이나 所以爲卦而卦有吉凶이니 莫非有此理니라 以其有是理也라 故로 以是問焉이어든 其應也如響하며 若以私心으로 及錯卦象而問之면 便不應하니 蓋沒此理일새라 今日之理與前日已定之理는 只是一個理故로 應也라 不容祭祀之享亦同하니 鬼神之理는 在彼我하여 以此理向之故로 享也라 不容은 有二三이니 只是一理也라
정자 말하기를, 복서의 능히 응함과 제사의 능히 흠향함은 또한 다만 이 하나 이치니, 시초와 거북은 비록 정은 없으나 써 괘가 되는 바이고 괘에는 길흉이 있으니 이런 이치가 있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써 그 이런 이치가 있으므로, 써 이에 묻거든 그 응함이 울리는 것 같으며, 만약에 써 사사로운 마음이 괘상에 이르러 두고 물으면 문득 응하지 아니하니, 대개가 이런 이치가 없기 때문이라. 오늘의 이치와 어제 이미 정해진 이치는 다만 이 한 개의 이치라. 그러므로 응함이라. 제사의 흠향을 받아들이지 않음 또한 같으니, 귀신의 이치는 저와 나에게 있어서 이런 이치로 향함이라. 그러므로 흠향이라. 받아들이지 않음은 둘 셋이 있으니 다만 이 하나의 이치라.
[本義] 此는 尙辭尙占之事라 言人以蓍問易하여 求其卦爻之辭而以之發言處事면 則易受人之命而有以告之如嚮之應聲하여 以決其未來之吉凶也라 以言은 與以言者 尙其辭之以言으로 義同이라 命則將筮而告蓍之語니 冠禮筮日에 宰自右贊命是也라
[본의] 이는 말을 높이고 점을 높이는 일이라. 사람이 시초로써 역에게 물어서 그 괘효의 말을 구함에 써 말을 내어 일에 처하면, 역이 사람의 명을 받아서 써 메아리가 소리로 응하는 것처럼 고하여 그 미래의 길흉을 결단함이라. ‘以言’은 ‘以言者 尙其辭’의 ‘以言’과 뜻이 같으니라. 명은 곧 장차 점을 침에 시초에게 고하는 말이니, (『儀禮』) 관례에 (좋은) 날을 점침에 주관자가 오른쪽에서 명을 돕는다는 것이 이것이라.
參伍以變하며 錯綜其數하여 通其變하여 遂成天地之文하며 極其數하여 遂定天下之象하니 非天下之至變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
참여하여 대오를 지어서 변하며, 그 수를 섞고 종합하여 그 변함을 통하여 드디어 천지의 문채를 이루며, 그 수를 다하여 드디어 천하의 상을 정하니, 천하의 지극한 변함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에 더불어 하리오.
[참고] 『正義』나 『傳義大傳』 모두 參은 七南反(참), 錯은 七各反(착)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다. 『增韻』에서는 “干與也는 參錯也라(간여함이 참착이라)”하고, 『韻會』에서는 “三相參爲參이오 五相伍爲伍라 (셋이 서로 참여함이 參이 되고, 다섯이 서로 대오를 이룸이 伍가 되니라)”고 했다. 우리말의 ‘삼삼오오(三三五五)’도 ‘參伍’에서 나온 의미이다. 따라서 ‘參伍’를 ‘삼오’로 읽어도 무방하나, 『중용』의 “唯天下至誠이라야 (중략) 可以與天地參矣니라”하고, 地天泰괘의 大象傳에서 “財成天地之道하고 輔相天地之宜라” 했듯이 사람으로서 천지의 일에 참여한다는 ‘역’의 의미상 여기서 ‘참오’로 읽어야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本義] 此는 尙象之事라 變則象之未定者也요 參者는 三數之也요 伍者는 五數之也니 旣參以變하고 又伍以變하니 一先一後에 更相考覈하여 以審其多寡之實也라 錯者는 交而互之一左一右之謂也요 綜者는 總而挈之一低一昂之謂也니 此亦皆謂揲蓍求卦之事라 蓋通三揲兩手之䇿하여 以成陰陽老少之畫하고 究七八九六之數하여 以定卦爻動靜之象也니라 參伍錯綜은 皆古語而參伍는 尤難曉니 按荀子云窺敵制變欲伍以參이라하고 韓非曰省同異之言하여 以知朋黨之分하고 偶參伍之驗하여 以責陳言之實이라하며 又曰參之以比物하고 伍之以合虛이라하고 史記曰必參而伍之라하며 又曰參伍不失이라하고 漢書曰參伍其賈하여 以類相準이라하니 此足以相發明矣리라
[본의] 이는 상을 높이는 일이라. 변함은 곧 상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고. 參(참)이란 것은 삼(3)으로 세고, 伍(오)라는 것은 다섯(5)으로 세니, 이미 참여하여 써 변하고 또 대오를 이뤄 변하니 한 번은 먼저 하고 한 번 나중함에 다시 서로 살펴서 밝혀 써 그 많고 적음의 실제를 살피니라. 錯(착)이란 것은 사귀면서 서로 함에 한 번 왼쪽하고 한 번 오른쪽 함을 이르고, 綜(종)이란 것은 총괄하여 거느림에 한 번은 내리고 한 번은 올림을 이르니, 이 또한 시초를 세어 괘를 구하는 일이라. 대개가 오가며 세 번 양 손의 책을 세어 써 음양노소의 획을 이루고, 7 8 9 6의 수를 구하여 써 괘효의 동정의 상을 정하니라. 參伍錯綜은 다 옛말이면서 參伍는 더욱 밝히기가 어려우니, 살펴보건대, 『순자』(「議兵」편)에 “첩자를 침투시켜 적의 변동을 엿보게 함에 대오에 섞이게 했다(원문은 “窺敵觀變, 欲潛以深, 欲伍以參”).”하고, 『한비자』(「備內」편)에서는 “같고 다른 말을 살펴서 써 붕당의 나뉨을 알고, 둘씩 대오에 침투하여 써 진법의 실제를 구해오게 했다.”고 하며, 또 “(『주역전의대전』의 “參之以此物, 伍之以合參”의 誤字를 바로잡아 고쳐 해석한다.) 셋 함은 이로써 물건을 도움이고, 다섯 함은 허에 합함이라(이 문장에 앞서 『한비자』 「揚權」편에서는 “虛靜無爲는 道之情也요 參伍比物은 事之形也라”고 했다).”고 했으며, 『사기』(「蒙恬列傳」)에서는 “반드시 셋 하여 대오를 짓는다.”라 하고, (「太史公自序」에서 名家와 관련해) “참착(參錯)하여 서로 비교하여야 잃지 않느니라(관련된 원문은 “若夫控名責實에 參伍不失이라” 곧 이름을 끌어 실지를 구함에 여러 가지를 참작하여야 사정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뜻).” 했고, 『한서』(「趙尹韓張兩王傳」)에서는 “(廣漢이란 사람이 제대로 된 말 값을 알기 위해 먼저 개 값을 묻고, 양 값을 묻고, 소 가격을 물은 뒤에 말 가격을 물었으니) 그 값을 비교하여 무리로써 서로를 기준했다.”고 하니, 이런 정도면 족히 써 서로 분명해지리라.
○問錯綜之義니이다 曰錯은 是往來底요 綜은 是上下底니 古人下這字極子細하니라 又曰錯是彺來交錯之義요 綜은 是織底綜하여 一個上去하고 一個下來하니 陽上去做陰이오 陰下來做陽이라 又曰錯綜其數에 便只是七九八六이니 六對九七對八이오 便是東西相錯은 六上生七爲陽이오 九下生八爲陰이니 便是上下爲綜이라 ○錯綜은 是兩様이니 錯者는 雜而互之也요 綜者는 條而理之也라 參伍錯綜은 又各自是一事니 參伍는 所以通之其治之也니 簡而疏하고 錯綜은 所以極之其治之也니 繁而密이라
○착종(錯綜)의 뜻을 묻나이다. 말하기를, 錯은 왕래하여 이르고, 綜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르니, 옛 사람들이 저 글자를 지극히 자세히 했음이라. 또 말하기를, 錯은 왕래하며 교착(사귀어 섞임)한다는 뜻이고, 綜은 실을 짬에 잉아에 이르러 한 개는 위로 가고 한 개는 내려오니, 양이 올라가서 음을 만들고, 음이 내려와서 양을 만드느니라. 또 말하기를, 그 수를 착종함에 문득 다만 7 9 8 6이니 6은 9를 상대하고, 7은 8을 상대하고, 문득 동서가 서로 섞임은 6이 올라가 7을 낳아 양이 되고, 9가 내려와 8을 낳아 음이 되니(「洪範」의 五行인 水火木金土의 克而生의 이치), 문득 이 올라가고 내려옴이 綜이 되니라. ○착종은 두 모양이니, 錯이란 것은 섞여서 서로하게 하고, 綜이란 것은 가지하면서도 다스려짐이라. 參伍와 錯綜은 또한 각각 스스로 하나의 일이니, 참오는 써 통하게 하여 그 다스리는 바이니 간략하면서 성기고, 착종은 써 다하여 그 다스리는 바이니 복잡하면서 치밀함이라.
○漢上朱氏曰參伍以變者는 縱横十五요 天地五十有五之數也니 錯之爲六七八九요 綜之爲三百六十이라 通六七八九之變하면 則剛柔相易하여 遂成天地之文하고 極五十有五之數하면 則剛柔有體하여 遂定天下之象하니 非成文이면 不足以成物이오 非定象이면 不足以制器하니 變之하고 又變은 謂之至變이라 ○南軒張氏曰三五는 天也요 參而伍之는 人也라
○한상주씨 가로대, ‘參伍以變’이란 것은 종횡으로 15(洛書九宮數理의 五用十作)이고, 천지 55의 수(河圖數의 合)이니, 섞은 것은 6 7 8 9가 되고 종합한 것은 360(= 乾之策數36×6 + 坤之策數 24×6)이 되니라. 6 7 8 9의 변함을 통하면 강유가 서로 바꾸어 드디어 천지의 무늬를 이루고, 55의 수를 다하면 강유가 체를 두어 드디어 천하의 상을 정하니, 무늬를 이루지 아니하면 족히 써 물건을 이루지 못하고, 상을 정하지 아니하면 족히 써 그릇을 만들지 못하니, 변하게 하고 또 변함은 일러서 지극한 변함이라고 하니라. ○남헌장씨 가로대, 三과 五는 하늘이고, 參伍는 사람이라.
易은 无思也하며 无爲也하여 寂然不動이라가 感而遂通天下之故하나니 非天下之至神이면 其孰能與於此리오
역은 생각이 없으며 위함이 없어 고요히 움직이지 아니하다가 느껴서 드디어 천하의 연고를 통하나니, 천하의 지극한 신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에 더불어 하리오.
程子曰老子曰无爲라하고 又曰无爲而无不爲라하니 當有爲요 而以无爲爲之니 是乃有爲니 爲也라 聖人作易에 未嘗言无爲요 惟曰无思也无爲也는 此戒夫作爲也라 然이나 下卽曰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는 是動靜之理 未嘗爲一偏之說矣라 ○寂然不動感而遂通者는 天理具備에 元无少欠하여 不爲堯存하고 不爲桀亡하며 父子君臣常理不易하니 何曾動來아 因不動이라 故로 言寂然이라 雖不動이나 感便通하니 感非自外也니라 ○寂然不動이라가 萬物森然已具은 在感而遂通이니 感則只是自內요 感不是外面將一件物來感於此也라 ○寂然不動感而遂通은 此只言人分上事이니 若論道則萬理皆具하여 更不說感與未感이라 ○答與叔書에 曰心은 一也니 有指體而言者면 寂然不動이 是也요 有指用而言者면 感而遂通天下之故 是也라 ○感而遂通天下之故는 以其寂然不動이 小則事物之至요 大則无時而不感이라
정자 말하기를, 노자는 ‘함이 없다’라하고, 또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니, 마땅한 함이 있고 써 함이 없음이 하는 것이니, 이것이 함이 있음이니 함이라. 성인이 역을 지음에 일찍이 无爲을 말하지 않고, 오직 ‘无思也, 无爲也’라고 하심은 이는 무릇 ‘作爲’를 경계함이라. 그러나 아래에 바로 ‘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라 함은 이에 동정의 이치가 일찍이 한 편으로 치우지지 아니했음을 설명함이라. ‘寂然不動感而遂通’이란 것은 천리가 다 갖춰짐에 조금도 흠결이 없어 요임금을 보존하지도 않고 걸을 망하게 하지도 않으며, 부자군신의 떳떳한 이치를 바꾸지도 아니하니, 어디에서 일찍이 왔는가? 부동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므로 고요하다고 말함이라. 비록 부동이나 느끼면 문득 통하니, 느낌이 밖에서부터 함이 아니니라.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만물이 빽빽이 이미 갖춰짐은 느껴서 드디어 통함이니, 느낌은 곧 다만 안에서부터이고, 느낌은 외면에서 장차 한 개의 물건이 와서 여기서 느낌은 아니니라. ‘寂然不動感而遂通’은 이에 다만 사람의 분수상의 일을 말함이니, 도를 논한다면 만 가지 이치가 다 갖춰져 다시 느꼈느냐 느끼지 못했느냐를 설명하지 못하니라. 아우(程伊川)에게 답한 글에 말하기를, 마음은 하나이니, 體를 가리켜 말한다면 ‘寂然不動’이 이것이고, 用을 가리켜 말한다면 ‘感而遂通天下之故’가 이것이라. ○‘感而遂通天下之故’는 써 그 ‘寂然不動’이 작으면 사물이 이르고, 크면 때로 느끼지 않음이 없음이라.
○龜山楊氏曰惟无思라야 爲足以感通天下之故니 而謂无思는 土木可乎아 此非窮神知化면 未足與議也니라 ○藍田呂氏曰寂然之中에도 天機常動이오 感應之際라도 木原常靜하고 洪鐘在簴에 叩與不叩라도 鳴未常已하고 寳鑑在手에 照與不照라도 明未嘗息이니라 ○張子曰一故神을 譬之人身四體컨대 皆一物이라 故로 觸之而无不覺하니 此所謂感而遂通이오 不疾而速이며 不行而至也니라
○귀산양씨 가로대, 오직 생각이 없어야 족히 써 천하의 연고를 느껴서 통하게 되니, 생각이 없다고 함은 土木이기에 가한가? 이는 神을 다하여 화함을 알지 못하면 족히 더불어 의논하지 못하니라. ○남전여씨 가로대,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하늘의 기틀은 항상 움직이고, 감응의 즈음이라도 木의 근원은 항상 고요하고, 큰 종이 종틀에 있음에 두드리거나 두드리지 않더라도 울림은 일찍이 다하지 아니하고, 보배로운 거울이 손에 있음에 비추거나 비추지 않더라도 밝음이 일찍이 쉬지 않았느니라. ○장자 말하기를, ‘一故神’을 사람 몸의 사지(四肢)에 비유하건데 다 하나의 물건이라. 그러므로 닿음에 느끼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感而遂通’이오 ‘不疾而速’이며 ‘不行而至’니라.
[本義] 此四者之體는 所以立而用은 所以行者也라 易은 指蓍卦요 无思无爲는 言其无心也라 寂然者는 感之體요 感通者는 寂之用이니 人心之妙 其動靜亦如此니라
[본의] 이 네 개의 體는 써 서는 바이고, 用은 써 행하는 것인 바라. 易은 시초와 괘를 가리키고, 无思无爲는 그 无心을 말함이라. 寂然이란 것은 느낌의 體이고, 感通이란 것은 고요함의 用이니, 인심의 묘함이 그 움직이고 고요함 또한 이와 같으니라.
夫易은 聖人之所以極深而硏幾也니
무릇 역은 써 성인이 깊음을 다하고 기미를 연구한 바이니,
[本義] 研은 猶審也요 幾는 微也요 所以極深者는 至精也요 所以研幾者는 至變也라
[본의] 硏은 살핌과 같고, 幾는 은미함이고, 써 깊음을 다한다는 것은 지극히 정미함이고, 써 기미를 연구한다는 것은 지극한 변함이라.
唯深也故로 能通天下之志하며 唯幾也故로 能成天下之務하며 唯神也故로 不疾而速하며 不行而至하나니
오직 깊은 까닭으로 능히 천하의 뜻을 통하며, 오직 기미한 까닭으로 능히 천하의 힘씀을 이루며, 오직 신묘한 까닭으로 빠르지 아니하여도 빠르며, 행하지 아니하여도 이르나니,
程子曰神은 无速亦无至한대 須如此言者는 不如是면 不足以形容故也라
정자 말하기를, 신은 빠름도 없고 또한 이름도 없는데 모름지기 이와 같다고 말한 것은 이 같지 아니하면 족히 써 형용하지 못하는 까닭이라.
[本義] 所以通志而成務者는 神之所爲也라
[본의] 써 뜻을 통하면서 힘쓰는 것을 다하는 바는 신이 하는 바이라.
子曰易有聖人之道四焉者 此之謂也라
공자 가라사대, 역은 성인의 도가 넷이 있다 함이 이를 이름이니라.
右는 第十章이라
[本義] 此章은 承上章之意하여 言易之用有此四者라
[본의] 이 장은 위 문장의 뜻을 이어 역의 쓰임은 이 네 가지에 있다는 것을 말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