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미연
브라질 군부독재 이야기를 다룬 가족사 <계엄령의 기억>
월터 살레스 감독의 <아임 스틸 히어>는 포르투갈 원제인 <Ainda estou aqui>를 직역한 “나 아직 여기 있어”라는 뜻이다. 독일에서는 <Für Immer hier>란 제목으로 개봉되었으며 “영원히 여기서” 정도로 해석된다. 한 영화가 개봉하면 각 국가마다 그 나라 정서를 반영해 현지화한 제목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 오는 30일부터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 될 예정인 이 영화의 한국제목은 무려 <계엄령의 기억>이다.
불과 몇 주전 계엄령을 일단락 짓는, 전 대통령 파면을 치룬 국가이니 차마 ‘추억’이라고 명명하기엔 섬뜻했나보다. ‘기억’이라고 명명한데는 이 군부독재가 어느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어느 세계에서건 현재 진행형이라는 선언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실제 감독도 지난 2024년 베니스 영화제의 공개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바 있다.
“이 영화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1970년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떤 순간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영화를 작업하고 있는 동안 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헝가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았을 때, 미국에서 곧 머지않아 일어날 일들, 세상의 많은 다른 장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포의 시대입니다”
직관적인 제목대로 이 영화는 70년대 브라질에서 군부 독재를 통과한, 한 가족의 이야기다. 사전 정보 전혀 없이 극장에 갔기에 자녀 다섯에 호화로운 저택에 사는 상위층 가족의 어느 여름날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에 어떤 기대도 없었다. 다만 집 앞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적신 몸을 뜨거운 태양빛에 달구며 집까지 걸어오는 풍경을 보며 머지 않은 여름의 생동을 가만히 곱씹었다. 부족할 것 없는 풍요를 누리는 가족이었기에 향후 전개되는 서사는 더 없이 날벼락이다.
실존 인물들에 기반해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영화의 결과는 공공의 역사로 기록되어있다. 정보 없이 영화를 보고 싶다면 감상 후 이 다음 문장으로 다시 돌아와도 좋다.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라면 한국 제목이 이미 많은걸 얘기해준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던 여름날, 아빠 루벤스는 집을 급습한 경찰들로부터 조사 차 잡혀 간다. 그리고 가족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한다. 좌파전선에서 활동하던 스위스 대사가 길에서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정치적 긴장 상태는 있었지만 누구도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하염없이 소식을 기다리던 엄마 유니스는 수영을 마치고 온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기로 한 찰나 남편의 사망을 접한다. 총살인지 태형인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정부에게 어떤 단서도 주지 않기 위해 이 사실을 아는 것처럼 행동해서도 안된다.
영화는 아빠에 대한 상실을 안고 살아가게 된 가족의 빈 자리를 계속 들여다본다. 이 부재를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은 슬픔이 일상을 압도하지 않도록 일상을 고요히 이어나가는 엄마 유니스도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자녀들도 아니다. 바로 이 가족의 집이다. 집이란 공간은 기가 막히게 루벤스의 부재로 조금씩 균열이 난 가족을 눈치 챈다.
아빠 루벤스가 있던 때의 집은 마치 매일이 축제인양 노래와 웃음으로 채워지곤 했다. 수영을 마치고 온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몸의 물기를 푸덕거리면 가정부도 카메라도 집안 곳곳 흔적을 쫓아야했다. 그러나 조금씩 실체 없는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족에게 가정부의 자리는 설 곳이 없어진다. 카메라는 그 생기가 가라 앉은 공간들을 지긋이 비추기만 한다.
감독은 배우들이 눈물을 흘린 장면들을 일부러 모두 삭제했다고 한다. 카메라 뒤에 유니스와 아이들이 흘렸을 눈물의 시간들은 집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결국 집을 떠난다.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 심각한 표정이 아닌 웃는 얼굴을 보여주겠다고 선택한 유니스의 결정이다. 그는 48세에 로스쿨로 가 인권변호사가 되고 남편의 사망 후 25년이 지나 국가로부터 공식 사망 선고서를 받아내기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영화 말미에 노년의 유니스는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70년대 군부 독재 관련 다큐멘터리를 시청한다. 그에게는 이것이 과연 기억을 넘어서 추억이 되었을까. 추억의 전제조건은 그 기억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때라고 생각하는데 평생을 남편과 같이 국가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을 위해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에게는 남편과의 생이별이 평생에 거쳐 생생한 기억이었으리라 감히 짐작만 된다.
2024년,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는 대한민국에 계엄령이 내렸다. 철학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역사학은 가장 전복적이고 급진적인 학문이다. 결국 역사학은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학문이니까요.”라며 여전히 변화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인간들에 희망을 건다. “나 아직 여기 있어”의 주체는 역사의 귀퉁이들에 서서 유령 같이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일 수도 혹은 희망이라는 불씨 그 자체이기를 꿈꾸는 우리 스스로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유니스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 선택들이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에게 깊은 영감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