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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일본의 막부체제
일본의 막부체제에 대하여 대왕과 문답을 하실 어른은 강항이다.
강항(姜沆)은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이다. 전라남도 영광 출신으로 임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으나 학문이 출중하여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를 맺고 후지와라(藤原醒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면서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으며 귀국할 때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가져온 분이다. 저서에는 간양록(看羊錄)이 있으며 일본 내각문고(內閣文庫)에 강항휘초(姜沆彙抄)가 소장되어 있다.
대왕이 먼저 묻는다.
“섬나라 일본은 역사 이래 외부의 침공없이 자연스럽게 정치체제가 형성되었을 테인데 개략적인 일본의 역사는?”
“일본은 섬나라로 인류문화 발생지에 비교해 2000~ 4000년 이상이나 뒤졌고 로마에 비교해 1,000년 안팎이나 뒤늦게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최초 문화는 토기에 새끼줄 문양이 있었는데 이를 죠몬(繩文)시대라 하며 이 시대에는 모계사회로 고기잡기와 채집으로 노동에 의해 느리게 생산력과 문화가 나타났습니다.
기원전 4~3세기경 돌괭이, 낫, 나무괭이 등 목기와 철기도구를 시용하여 밀과 보리, 벼농사가 재배되면서 일본의 농경문화가 서서히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야요이식(彌)生式) 농경문화라 합니다.
그 뒤에 중국에서 철기문화가 조선을 지나 일본에 건너가 토기와 목기, 철기가 개발되어 생산력을 높여주었고, 이때부터 원시씨족공동체에서 족장이 생겨났고, 사람을 지배하는 착취의 일이 얼어났으며 1세기 후반에는 약 50여 개국이 나타났습니다. 족장이 나타나 병합하여 나라가 되고 나라가 되자 왕이나 귀족 족장들은 평민과 노예를 착취하여 군대와 형벌로 세금징수와 생산을 감독하는 권력기관이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최초국가는 소가씨(蘇我氏)와 쇼또꾸태자(聖德太子)의 개혁이라고 하는데?”
“소가씨는 백제 왕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일본 최초 사찰인 아스까지(비조사) 를 건립하였으며, 쇼또꾸태자(聖德太子)는 30년 동안 개혁하여 일본을 국가다운 면모를 갖춘 분입니다.”
“쇼또꾸태자(聖德太子) 개혁 요지는?”
“ ① 관료제 기구 창설 ② 불교 장려 ③ 관위 12계품 제정 ④ 헌법12조의 훈시를 통한 율령 국가 ⑤ 아마데라스오미가미(天祖大臣)를 중심으로 신화를 기록하여 종교적으로 성화 ⑥ 연호를 만들어 군주의 권위를 높임 ⑦ 전체 국토와 민중을 천황의 공지(公地)와 공민(公民)으로 개신(改新) ⑧ 토지와 민중을 지배하기 위한 국, 군, 이를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통치 9) 전국을 확일 세제로 징수하기 위한 법 제정 ⑩) 세금징수를 위한 호적을 만들어 씨족적 지배가 아니라 완성된 국가적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의 천황제(天皇制)란?”
“천황(天皇)은 일본국를 창조한 신의 자손이며, 명어신(明御神), 현어신(現御神), 신이 화신한 인간, 일인(一人), 성상(聖上) 등등으로 호칭되며, 신적인 권위이고, 법을 초월한 존재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백성지배는 천황에 의해 임명된 관료에 의해 법과 기구를 통해 실현된다 합니다. 따라서 천황제(天皇制)는 그 어떠한 사상이나 종교, 씨족, 가치관 위에 천황을 중추(中樞)로 하여 자기 자신을 통합(統合)시키고 구심회가 되어 전체 백성을 지배하는 기구입니다.”
“고대 천황제는?”
“중앙정부는 천황의 조상신 및 제신을 받들어 모시고 신사를 관리하는 징기캉(神祈官)과 일반 국정을 다루는 다조오강(太政官):내각)이라는 두 관(官)으로 나눠지며 다조오강(太政官)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과 우대신(右大臣)이 있어 나라 일을 총괄하고, 그 밑에 행정(行政)이 8개 성(省)으로 갈라져 각종 업무를 분담합니다. 이와 별도로 관리를 감찰하는 단죠오다이(彈正臺) 및 그 밖의 기관이 있습니다.”
“지방 행정 조직은?”
“행정구획은 수도(京) 이외 전국을 60여 구니(國)로 나누고 구니에는 가미(守:장관) 이하 고꾸시(國司:지방관)가 중앙에서 4년 임기로 파견되어 관내의 행정, 군사, 경찰, 재판의 전권을 장악하며, 구니(國)는 군(郡)으로 나눠 지방의 유력한 호족으로 군사(郡司)로 임명했습니다. 군(郡)은 다시 50호마다 이(里)로 편성하여 유력한 호주(戶主)를 임명하여 호적 작성, 경찰, 징세 등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합니다.”
“군사제도는?”
“군사제도는 중앙군(中央軍)과 구니(國)의 군으로 나눴으며, 병역의무는 21세부터 60세까지 공민 남자에게 병역 의무를 지웠으며 국의 군은 장정의 1/3 씩 교대로 하여 근무를 하도록 합니다.”
“봉호(封戶) 제도는?”
“권력구조는 신권(神權)은 천황(天皇), 속권(俗權)은 자죠오대신(太政大臣)이 갖고 중앙관리리, 코꾸시(國司), 군지(郡司)는 지방 호족들이 독점했습니다. 그들은 관직에 상응하게 위계가 부여되고, 공로에 따라 관위(官位), 봉호(封戶), 녹봉(祿俸), 철재 농기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관위(官位)는 음위제(蔭位制)로 사실상 세습체제였으며 전답과 봉호도 세습제였습니다.”
“율령제(律令制)는?”
“당나라 체제를 모방하여 관리를 등용할 체제를 열어놓지 않고 오직 지배계급과 기득권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제도로 묶어버리기 위한 제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당나라의 율령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장원(莊園) 제도는?”
“8세기경 율령제의 붕괴와 함께 귀족, 고관, 큰 사찰에서는 앞으로 다투어 임야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괭이와 낫 등 철제도구가 집중적으로 소유한 귀족과 고관, 큰 사찰에서 노비나 농민, 빈농의 노동력을 활용하여 개발지를 넓혀 대사유지를 만들었는데 이를 장원(莊園)이라 합니다. 9세기에는 중앙정부에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버렸지요. 그러면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고꾸시(國司:지방관)들은 지방영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려고 하고 지방영주들은 고꾸시를 습격하기도 하고 또 무장을 하여 영주계층이 점차로 실세를 갖는 힘 있는 영주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무사계급 태동은?”
“장원제의 발전과 함께 고대천황제의 정치구조가 변하기 시작했t습니다. 9세기 중엽 무렵에는 중앙에서 군사력을 상실하여 지방호족을 통제할 힘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장원에서는 조세징수, 군역, 정권유지를 위해 무사계급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여 무사계급이 큰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가마쿠라(鎌倉) 막부, 무로마치(室町) 막부, 에도(江戶) 막부라는 말이 나오는데 막부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막부(幕府)라는 말은 왕을 대신하는 대장군(大將軍)의 진영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시의 사령부가 정치적 기관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무가(武家) 정권의 정청(政廳)으로 천황(天皇)을 뒤에 없고 무사(武士)들이 정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막부체제는?”
“막부의 실권자는 쇼군(將軍)입니다. 쇼군은 각 지방에 다이묘(大名)들을 파견합니다. 다이묘들은 영지를 받는 대신 쇼군(將軍)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 다이묘들이 다시 지방의 사무라이들에게 영지를 주고 충성을 받습니다. 에도막부의 경우 다이묘들이 배반을 하지 못하도록 산킨코타이(参勤交代:참근교대) 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이 제도는 다이묘들이 3년마다 일 년씩 에도(江戶)에서 강제로 살아야 하는 제도로, 중앙권력을 강화시키면서 모반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가마쿠라(鎌倉) 막부에서 자체 헌법을 만들어 통치했다는데 그 헌법의 요지와 조목은 ?”
“그 헌법의 요지는 무사의 관행과 도리에 따라,
제1조는 신사(神社)를 세워 수리하여 제사를 전념한다.
제2조는 사탑(寺塔)을 수리하여 부처님을 숭상하며 사찰의 재물을 탐내지 않는다.
제3조 이하는 막부의 수호(守護), 지두(地頭)나 어가인(御家人)의 신분, 임무, 권한, 상속, 그 밖의 처분 등을 중심으로 행정, 민사, 형사, 소송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상하의 질서를 확립하고 세금을 거둬들이며 통치를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막부의 헌법은 법망(法網)으로 무치(武治)를 하자는데 있었군요. 막부정권이 성공하고 오래간 이유는?”
“막부 정치는 천황의 상징성과 쇼군(將軍의 실권이 합쳐진 제도입니다. 일본에서 무사 정권이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문(文)보다 무(武)를 중시하였고, 정통 왕위 계승자인 천황과 공존을 하면서 신사와 사찰을 보호하고 문보다 비교적 정직하게 통치를 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 일본에서 문인보다는무인들이 판을 치게 된 이유는?"
" 문인들은 말과 글쟁이며 공리공론을 일삼는 데다가 세금으로 1,000석이라는 벼를 징수하면 300석은 천황에게 받치고 700석은 문인들이 소유합니다. 그러나 무인들은 즉각 실천력을 가진 집단인데가 세금으로 1,000석을 거둬들이면 400석을 천황에게 바치고 600석은 무인들이 소유합니다. 무인들은 아주 깨끗한 집단이며 실천력이 강하여 천황으로부터 인정받아 일본이 무인체질로 바꾼 겁니다."
"오늘날 일본은 군국주의가 아니지만 실제는 군국주의라고 하는데 사실인가?"
" 사실살 일본은 사무라이 습성이 있어 군국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 노동판에 뛰어들면 그들은 전투하듯 일을 해내는 것을 볼 때 겉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나 무서은 사무라이 속성이 있으며 그 정점 위에 아베가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서로 땅을 뺏고 빼앗기는 시대의 전국(全國) 영주(領主)의 특징은?”
“전국 영주는 ‘살인강도는 무사의 관습이다.’라는 속담 그대로, 서로 남의 영지를 무력을 빼앗고, 어제는 갑과 동맹하여 을을 쓰러뜨리고, 오늘은 병과 함께 갑을 넘어뜨리는 방식으로 취하여 탈취하거나 혹은 기습, 혹은 속임수 살해로 세력을 구축했지만, 자신이 사용한 같은 수법으로 언제 누구에게 타도 당할지 알 수 없어 더욱 더 무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방심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부부가 함께 있을지라도 칼을 놓아서는 안 되었던 시대입니다. “
“이와 같이 군웅이 할거하던 센고쿠시대(戰國時代)를 어떻게 통일을 시켰나요?”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는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말기에, 서로 다투던 센고쿠시대를 처음으로 평정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시대가 등장되었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가 죽자 역신 아케치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고, 오다노부나가를 대신해 사업을 계승하였습니다. 그 후, 히데요시는 오사카성(大坂城)을 쌓았으며 관백(関白).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어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과 전쟁하여 무모한 힘을 낭비한 후 순식간에 몰락하여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최대 정적(政敵)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중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고, 히데요시는 만족하여 이에야스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었지요. 이에야스의 영지는 일본 동북쪽에 위치하므로 2차례에 걸친 조선침략에 참가하지 않아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군대와 가장 생산성 높고 잘 정비된 영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승리하여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 70세, 이에야스는 그 패권을 영속시키기 위한 조치로 전략적 요충지에 자신의 심복을 배치하고 다이묘, 궁중세력, 승려, 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막부체제(幕府體制) 법률(法律)을 만들고 감독기관을 두어 통제를 했습니다.”
“실질적인 막부 체제는?”
“이에야스는 자자손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막부체제를 수립했습니다. 그 체제는 신정분리(神政分離)로 천황(天皇)과 장군(將軍)을 분리하고, 장군을 중심으로 세속을 통치하기 위하여 장군(將軍) 아래에는 접정관 다이로오(大老), 로오쥬우(中老), 와까도시요리(若年奇)의 3직무체제를 두었습니다.
“접정관 다이로오(大老), 로오쥬우(中老), 와까도시요리(老中)는?”
“다이로오(大老)는 특별히 필요할 때 두는 막부의 통활자이며, 평상시에는 로오쥬우(中老 4명)가 정무의 전반 및 특히 천황과 영주의 통제를 담당합니다. 정책의 결정은 로오쥬우(中老 4명) 합의에 따르고 집행에는 매월 교대의 월 당번 로오쥬우(中老)가 담당합니다. 또 와까도시요리(若年奇)는 로오쥬우(中老)의 지휘를 받고 막부 신하를 통제 합니다.”
“로오쥬우(中老) 4명의 합의체는 요즈음 국회와 비슷하고, 국정운용은 로오쥬우(中老) 4명이 월 당번제로 돌아가면서 집행했다는 것은 스위스 형태와 같은 대단한 동적(動的)인 정치 시스템이 아난가?”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로오쥬우(中老)에는 오모메쯔께(大目付:4~5명)가 와까도시요리(若年奇)에는 메쯔게(目付):16명)가 직속되어 중앙과 지방의 각기 영주와 직속부하를 감찰하고, 사찰과 신사를 지배하며 아울러 사법. 행정. 군사를 관장하여 일본 전 지역을 통치합니다.”
“막번체제(幕藩體制)란?”
“막번이란 막부(幕府)와 번(藩)을 다스리는 통치체제를 말합니다, 즉 막부란 대장군의 진영인 중앙을 말하고, 번이란 지방기구를 말합니다. 지방의 번 기구도 막부의 그것을 축소한 형태로 번주(藩主)는 영주(領主), 영주 밑에는 기로오(家老)와 도시요리(年奇) 등이 집정, 참정의 주요직책을 차지하고 가신단(家臣團)을 통제, 제정, 군사, 그 밖의 부분을 통제하여 민중을 물샐틈없이 통제합니다.”
“막번 체제의 농민 수탈정책은?”
“막번 체제는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수탈의 체제입니다. 직접생산자와 영주 사이에 중간착취자 대지주를 배제하고 그 예속 농민을 소농민으로 자립시킨 다음 이들을 호적에 등록시켰습니다. 한 필지 한 필지의 토지구획을 명확히 한 다음 생산고를 정하고 5 : 5 ~ 5 : 6 배율로 세금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실제로 농민 등에게 돌아가는 소득은 30% 정도였다 합니다. 이에야스는 ‘농민은 죽지 않을 정도로’, 세금을 바치라 했다 합니다. 또한 5명으로 촌락 5인조로 만들어 연대 책임제를 부여했으며 거주의 자유, 직업의 자유, 경지매매의 자유도, 상속과 분할도, 경작지에 자유로운 제배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신분제는 장군. 영주. 무사는 사(士) 계급, 농민. 수공업자. 상인은 평민 계급, 비인(非人)은 천민계급 등 20급으로 나눠 차별하였습니다. 신분에 따라 주소와 직업, 복장도 제한되고 결혼도 신분이 같지 않으면 다른 계층과 혼인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천민(賤民) 된 자는 자자손손 천민이며 그 주거지도 특정지역으로 한정했습니다. 가부장(家父長) 제도를 확립하여 대대로 부친의 녹이 장남으로 상속되는 가독상속제(家督相續制)를 시행했습니다. 여자는 절대 가독상속자(家督相續者)가 되지 못하므로 여권은 비참했습니다. 처녀 때는 아버지에 복종하고, 결혼하면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죽으면 가독성속자인 아들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조항에 반하거나 무례한 짓을 했다고 여겨질 때에 영주는 이들을 칼로 베어 죽여 버리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바로 이것이 막부의 체제입니다.”
“무서운 정치체제군요.”
“이러한 정치체제 아래 무섭게 노력을 착취하여 세워진 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의 영주들이 축성했던 수많은 성(城)과 신사(神社) 그리고 사찰을 세웠습니다. 대표적인 사찰은 나라의 흥복사(興福寺), 쿄오또의 연력사(延歷寺), 금각사(金閣寺). 은각사(銀(閣寺), 고야산의 금강봉사(金剛峯寺), 법성사(法成寺), 봉황당(鳳凰堂), 오사까의 천왕사(天王寺) 등이었습니다. 참고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오사까 성(城)을 보면 그 얼마나 노력을 착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왕은 일본의 막부체제를 알고 결론을 맺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가까운 일본을 잘 안다고 하는데 실제 일본인의 속성을 너무나 모르고 있다."
라고 말씀하시고
"막부는 함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막부는 반드시 오사까 성처럼 자기수호 성을 구축하고 , 거기에는 대형으로 신사나 사찰을 건축하여 정신의 구심력을 삼아 정치를 했다는 일본 특유의 천황제와 막부체제를 알아야 한다. "
고 말씀을 하시니라.
다음에는 인도의 정치체제에 대하여 문답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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