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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 개람배치 *****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금당과의 관계속에서 구분되는데,
다음의 5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다.
1. 일탐삼금당형(一塔三金堂型)
2. 일탑일금당형(一塔一金堂型)
3. 이탑일금당형(二塔一金堂型)
4. 당·탑병렬형(堂·塔竝列型)
5. 무탑형(無塔型)
이같은 5가지 유형의 가람배치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일탑삼금당형 가람배치
중앙에 위치한 탑을 중심으로 3개소에 금당을 건립하는 배치방식으로 고구려에서 시작된 가람배치이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불교를 수용한 이래 375년(소수림왕 5)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였다.
이후 392년(광개토대왕 2)에는 평양에 아홉개의 사찰을 지었고, 498년(문자왕 7)에는 금강사를 창건했다. 뿐만 아니라 영류왕때에는 중대사, 진구사, 유마사, 연구사, 대승사, 대원사. 금동사, 개원사 등의 사찰이 있었음을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밖에 연복사, 영탑사 등의 사찰 이름이 기록에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도 불교 전래 이후 지속적으로 사찰의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의 가람배치가 어떠한 형식을 이루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37년에 진행된 평양근교 청암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남향한 사찰의 윤곽이 확인되었다. 이 곳에서는 팔각목탑지(八角木塔址)를 중심으로 동·서·북쪽에서 각각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후 1939년에 발굴조사한 상오리사지 및 1974년에 북한에 의해 조사된 정릉사지에서도 모두 팔각형의 목탑지를 중심으로 북·동·서쪽에 각각 금당을 두고, 남쪽으로는 남문(南門)이 위치하고 있음이 확인된 바 있다.
이같은 발굴조사 결과를 볼 때 고구려시대에 건립된 사찰에서는 모두 일탑삼금당식의 가람배치가 성립되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형식의 가람배치는 고구려에서 확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구조는 한나라의 천문점성사상(天文占星思想)에 근거를 둔 것으로, 중국 왕궁건축의 배치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확립된 일탑삼금당식의 가람배치는 백제와 신라 및 일본으로 전파되어 유사한 실례를 남기고 있다. 백제가 건립한 미륵사지에서는 삼탑삼금당(三塔三金堂)식 가람배치가 확인된 바 있다. 이 곳에서는 각각 독립된 3개의 원(院)을 구성한 뒤, 각 원에는 탑과 금당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중앙에는 목탑을 동·서쪽에는 석탑을 배치하고 있다.
이같은 가람배치는 미륵사지에서만 확인된 점으로 보아 백제의 창안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확립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가 백제로 전해져 변형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역시 황룡사지와 분황사에서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이 중 황룡사지에서는 고구려와는 달리 구층목탑의 북쪽에 3개의 금당을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이 역시 같은 예가 확인된 바 없어 신라의 창안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고구려의 가람배치가 신라로 전파되어 변형된 일탑삼금당제의 한 유형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확립되어 백제 및 신라에 영향을 주었던 일탑삼금당제의 가람배치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나라(奈良)에 있는 비조사(飛鳥寺)의 가람을 구성하고 있다.
비조사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찰로 592년(崇峻天皇 5)에 법당과 화랑을 기공하고, 596년에는 탑이 준공되었으며, 606년에 장육석가상(丈六釋迦像)이 안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평면방형의 목탑을 중심으로 북·동·서쪽에 각각 금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음이 밝혀졌다. 이같은 가람배치방식은 고구려가 팔각목탑을 건립한 반면 비조사에서는 방형의 목탑을 건립한 점만 다르며, 건물의 배치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는 백제와 신라는 물론 일본의 초기 불교문화에 폭 넓게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2. 일탑일금당형 가람배치
백제에서 완성한 가람배치의 한 양식으로 남향한 사역내에 남문(南門), 중문(中門), 탑, 금당, 강당(講堂)이 일직성산에 차례로 건립되고, 주위를 회랑(回廊)이 감싸고 있는 형식이다. 탑이 한기만 건립된 까닭에 단탑가람(單塔伽藍)이라고도 한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滅難陀)가 불교를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 초전(初傳)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 주변에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불교유적은 알려진 바 없다. 이후 공주를 거쳐 부여로 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찰의 조영이 시작되었다. 특히 성왕대에 이르러는 불교가 진흥되면서 수많은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시대의 건립된 사찰로는 왕흥사, 칠악사, 오합사, 천왕사, 도양사, 백석사, 미륵사, 호암사, 북부 수덕사, 보광사, 오금사, 경복사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사찰은 기록에 명칭만 보일 뿐 일부를 제외하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현재까지 백제시대의 사찰로 정확한 위치가 밝혀진 것은 익산 미륵사지, 부여 정림사지,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가탑리사지, 금강사지, 대통사지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이 중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가람배치가 확인된 사찰은 미륵사지, 군수리사지, 정림사지, 동남리사지에 불과한데 미륵사지를 제외한 2개소의 사지에서 공통된 수법이 밝혀진 바 있다.
미륵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삼탑삼원식 가람배치로 밝혀졌는데, 이는 고구려에서 확립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를 수용해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으로 기술한 바 있다.
군수리사지는 부여읍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사지는 1935년과 이듬해에 걸쳐 발굴조사 되었는데, 남쪽으로부터 중문(中門), 탑(塔), 강당(講堂)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강당의 좌·우에는 경루(經樓)와 종루(鍾樓)로 추정되는 건물지도 확인되었다.
정림사지는 부여읍 한복판에 위치한 평지가람으로 1942년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大平八年戌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정림사였음이 밝혀진 바 있고, 1979년에 실시한 발굴조사에 의하여 다시 한번 이같은 사실이 확인 된 바 있다.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남향의 축선(軸線)을 중심으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차례로 배치되고, 주위를 회랑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임이 확인된바 있다.
이처럼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백제에서 완성된 일탑일금당식 가람배치는 일본으로 전해져 고구려와 같이 초기 일본 불교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이같은 가람배치를 백제식 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식 가람배치라 하는데, 비조시대(飛鳥時代)에 건립된 많은 사찰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탑식가람배치는 백제에서 발전 정착된 이래 일본으로 전해져 초기 불교문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신라하대인 9세기에 들어 절대다수의 사찰에서 단탑가람이 건립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구산선문의 확립으로 인해 사찰이 평지로부터 산지로 옮겨져 사찰의 규모가 외형적으로 축소된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신라 하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단탑가람의 건립을 촉진시킨 결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 이후에 건립된 절대다수의 사찰이 단탑가람인 점을 볼 때 백제에서 완성한 이 유형의 가람배치는 우리나라 사찰의 조영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이탑일금당형 가람배치
이 형식은 대웅전 앞에 2기의 석탑이 건립된 가람배치로, 쌍탑가람(雙塔伽藍)이라 불리우고 있다. 이 방식은 통일직후에 성립된 가람배치법으로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신라에서 확립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법흥왕의 불교공인 이후 많은 사찰의 건립이 있었다. 신라시대에 건립된 사찰은 흥륜사(534-544)를 비롯하여 영흥사(535), 황룡사(553-645), 지원사(566), 삼랑사(597), 분황사(634), 영묘사(635) 등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황룡사와 분황사만 발굴조사 되었을 뿐 나머지 사찰에 대해서는 정확한 규모나 가람배치 방법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신라가 쌍탑가람을 성립한 것은 통일직후에 건립한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감은사지에서 이다.
사천왕사는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되기 시작한 사찰로 중문, 양 목탑지, 금당지와 강당지가 순차적으로 건립된 형식으로, 강당의 전면에는 경루지(經樓址)로 추정되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망덕사지 역시 목탑으로 조성된 쌍탑지와 금당지가 확인된 점으로 보아 사천왕사와 같은 형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이탑일금당식 가람배치는 통일전쟁 직후에 건립된 사찰에서 확인된 점으로 보아 7세기 후반 신라에서 확립된 가람배치의 한 양식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양 사지가 목탑을 건립한 쌍탑가람이었다면, 감은사지는 석탑을 배치한 최초의 쌍탑가람이다.
감은사지는 통일직후 문무왕의 명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682년(신문왕 2년)에 완공된 사찰이다. 발굴조사 결과 중문, 쌍탑, 금당, 강당이 순차적으로 건립되었고, 이를 회랑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쌍탑가람으로 확인되었다. 이처럼 통일직후에 종래의 단탑(單塔)에서 벗어나 쌍탑이 등장하는 것은 당문화(唐文化)의 영향과 법화신앙(法華信仰)의 유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직후에 완성된 쌍탑가람배치 방식은 8세기 중반에 이르러 불국사를 필두로 많은 사찰에서 이를 수용하여 통일신라시대 가람배치의 한 전형으로 정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사찰은 대부분 평지가람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쌍탑가람외에도 황룡사지에서 확인된 일탑삼금당제 가람배치가 있는바, 이는 고구려에서 확림된 일탐삼금당제를 신라가 수용하여 변형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4. 당·탑병렬형 가람배치
이 형식은 탑과 금당이 나란히 배치된 형식으로 백제에서 시작된 가람배치의 양식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 법륭사의 가람배치가 동쪽에 금당이, 서쪽에 탑을 배치한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607년 사찰의 창건시 백제에서 보낸 기술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백제시대의 사찰에서 이같은 예가 확인된 바 없지만, 법륭사에서 보듯이 분명 이러한 방식의 가람배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신라에서는 고선사지에서 같은 형식의 가람배치가 확인된 바 있다. 이 사지는 동탑서전(東塔西殿)의 양식으로, 탑과 금당을 동·서 방향에 병렬로 배치된 배치양식을 보이고 있다. 결국 신라의 가람배치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당·탑병렬식 가람배치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부석사 그 예를 남긴 이래 고려시대에 건립된 만복사, 수덕사, 봉정사, 무위사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 결국 분황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이 산지가람인 점을 감안할 때 이 유형의 가람배치는 평지보다는 산지가람에서 더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형식의 가람배치는 다른 예에서와 같이 백제에서 시작되어 신라와 일본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5. 무탑(無塔)식 가람배치
이 형식은 말 그대로 탑이 없는 가람배치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삼국시대의 절터에서는 백제시대에 건립된 부여 동남리사지가 유일한 예이다. 이 사지는 1938년에 발굴조사 되었는데, 중문,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탑 대신 석조(石槽)가 배치된 특이한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후 무탑식가람은 확인된 바 없지만, 고려시대 이후에 건립된 전등사, 관룡사, 용문사, 은해사, 송광사 등지에서 볼 수 있다. 이 들 사찰은 모두 산중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입지상의 공통점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후에 무탑식가람이 증가하는 이유는 석탑을 조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형상 이를 건립할 면적이 확보되지 못한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우리나라의 사찰에 적용되는 가람배치의 형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사찰을 구성하는 방법은 사찰의 입지와 시대에 따라 차이점은 있었지만, 탑을 중심으로 구분되는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불가(佛家)에서의 탑은 예배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사찰의 전체 구조와 형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가람배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첫째. 건물의 배치가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을 중심으로 정연히 배치되고,
둘째, 전체 건물에서 교주를 봉안한 금당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규모 또한 가장 크고,
셋째, 전체 건물을 회랑이 감싸고 있고,
넷째,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모두 탑을 건립하고 있고,
다섯째, 사찰의 구성과 배치가 왕궁(王宮)의 그것과 일치하는 점으로 보아, 왕실건축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