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新羅(今 慶州) 4
城南城北蔚藍峯
落日昌林寺裡鍾
閒補東京書面伝
金生碑版率居松
城南城 北에 藍峯이 蔚한데
落日인 昌林寺裡의 鐘이로다.
한가히 東京 書画伝을 기웠으니
金生의 碑版과 率居의 松이로다.
藍峯은 青峯과 같다 昌林寺는 金鰲山에 在하니 이제 廃하였고 古碑가 있으나 宇劃이 모다 이즈러졌더라.
金生은 新羅人이니 何代人인지 未詳하나 筆洗로서 当時에 有名하였다. 三国史에 拠하면 金生이 어려서부터 書에 能하여 平生에 他 芸를 공부하지 않고 나이 八十이 넘도록 오히려 筆을 操하기 쉬지 안고 隸行草가 다 神에 入하더니
崇寧中에 学士 洪灌이 進奉使를 따라 宋에 入하여 汴京에 館하니 翰林待詔揚球와 李革이 勅을 하고 館에 至하여 図簇에 쓰니 灌이 金生의 行草 一巻을 보이니 二人이 크게 놀라며 말하되 今日에 右軍의 平書를 보았다. 灌이 말하되 이는 新羅人 金生의 글씨라 하니 二人이 믿지 않았다.
趙子昂의 昌林寺碑 跋에 말하되 新羅僧 金生의 쓴 것이라 字画의 典型이 있으니 비록 唐人 名刻이라도 지내지 못한다 하였다.
率居는 三国史에 率居画를 잘하여 일찍 黄竜寺 壁에 老松을 그렸으니 体幹이 비늘같이 慶皺하여 烏鳶이 往々히 보고 날라 왔다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오랜 後 色이 暗하니 寺僧이 丹青으로 수보하였더니 烏鳶이 다시 오지 않았다. 慶州 芬皇寺의 観音과 晋州 断俗寺의 維摩像이 다 그의 筆이다.
三月初旬去踏青
蚊川花柳鎖宾々
流觴曲水傷心事
休上春風鮑石亭
三月 初旬에 가서 踏青할 때
蚊川의 花柳가宾々히 鎖하더라.
流觴曲水는 傷心事이니
春風鮑 石亭에 上치 말아라.
踏青은 봄놀이의 이름이라. 鮫川은 慶州南五里인 史等川 下流에 在하였다. 高麗 金克己가 蚊川武禊(或 除不祥) 詩를 지었으니 이로 보면 羅人이 三月에 가끔 鮫川에 놀았던 일이 있었다.
流觴曲水는 王右軍의 蘭亭에서 三月 上巳日에 모히여 禊를 修할 새 曲水에 觴을 流하였으니 대개 三月의 놀음을 말함이다.
鮑石亭은 慶州南 七里 金鰲山 西麓에 在하니 鍊石으로 鮑形을 作한 故로 鮑石亭이라 称하였다. 当時의 流觴曲水하던 자취가 그냥 남아있다.
三国史에 甄萱이 新羅王都에 들어 갈 때 時에 王이 夫人과 妃嬪으로 더불어 飽石亭에 나아가 술을 두고 즐기더니 賊이 이르매 狼狽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다가 侍臣과 臣僚와 아래 宮女와 伶宮들이 다 陥没하였다.
- 한글
서울 남쪽에 있는 남산의 북쪽에 푸른 봉우리가 우뚝하는데
해질 무렵 창린사 안의 종소리가 들리는구나.
한가로이 동경(東京) 서화전(書畫傳)을 익혔으니
김생(金生)의 비문과 날쥐(栗鼠)의 소나무로다.
남산의 봉우리는 청봉(靑峰)과 같고, 창린사는 금오산에 있었는데
이제는 폐허가 되었고 오래된 비석만 남아있을 뿐 글자가 모두 닳아 없어졌다.
김생은 신라 사람인데 어느 시대 사람인지 분명치 않으나
당시 필체로 유명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생이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잘 써서
평생 다른 기예는 공부하지 않고 80이 넘도록 붓을 놓지 않아 행서와 초서가 모두 신기했다고 한다.
숭녕(崇寧) 연간에 학사 홍관(洪灌)이 진奉使를 따라 송나라에 가서 한족(汴京)에 머물렀는데
한림대권(翰林待詔) 양구(揚球)와 이혁(李革)이 사신을 대동하고 와서 그림을 그리니
홍관이 김생의 행초 한 권을 보이자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오늘 우군(右軍)의 평서체를 보았다"고 했다.
홍관이 "이는 신라인 김생의 글씨입니다"라고 하자 그들은 믿지 않았다.
조자앙(趙子昂)의 창린사비 발문에 "신라 승려 김생이 쓴 것으로 글자의 전형이 있어 당나라 명각가들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날쥐(栗鼠)는 삼국사기에 풍경화를 잘 그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그 몸통이 마치 비늘 모양의 주름살 같아 까마귀들이 자주 날아와 부딪혀 떨어졌다고 한다.
오랜 후에 색이 탁해지자 절 스님이 물감으로 보수했더니 까마귀들이 더는 오지 않았다.
경주 분황사 관음상과 진주 단속사 미로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삼월 초순에 가서 봄나들이를 하면
혜화동 벚꽃이 활짝 피었을 터이다.
술을 따르며 구불구불 흐르는 시내는 상심한 일이니
배소정에 올라가지 말거라.
봄나들이란 봄에 노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혜화동은 경주 남쪽 5리의 사등천 하류에 있었다.
고려 김극기가 혜화동무제시를 지었는데, 이를 보면 신라 사람들이 삼월에 가끔 혜화동에서 놀았음을 알 수 있다.
술을 따르며 구불구불 흐르는 시내는 대개 삼월의 놀이를 말한다.
배소정은 경주 남쪽 7리 금오산 서록에 있는데, 바위를 쪼아 배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불렀다.
당시 사람들이 술을 따르며 노닐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이 신라 궁에 들어갈 때, 왕이 후궁들과 함께 배소정에 나아가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적군이 달려들자 어쩔 줄 몰라하였고, 그 과정에서 신하와 궁녀, 기생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