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조의 즉위와 그 후
경종 4년에 왕이 하세하시고 영조(英祖)가 즉위하시니 곧 왕세제로 계신 연임군이요 그 모부인은 육상궁 최씨이다. 영조가 동궁에 계실 때 얼마나 위험한 생활을 겪어왔고 또 즉위하실 때도 적신배가 환관 박상검(朴尙儉)을 끼고 왕세제를 폐하는 글을 초하여 가지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장차 발포하려 할 제 영조 이것을 아시고 차라리 역신배에게 죽기보다 약을 먹고 죽는 것이 낫다 생각하였으나 다행히 인원(仁元)왕후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고 또 즉위 시에도 십분 위험이 있었으나 이 어려운 난관을 통과하기는 구신들의 도움이 많았다.
그러나 영주 즉위하신 후에 원수를 생각지 않으시고 도리어 탕평론을 주장하여 양파의 화합을 주장하였다. 탕평이란 말은 탕탕평평(蕩蕩平平)이니 상서(尙書)에 있는 말인데 무편무당에 왕도 탕탕이나 무당무편에 왕도 평평이라 하였으니 아무쪼록 두 파가 탕탕평평하여 서로 화합하라는 뜻이다.
한번은 노론 민진원과 소론 이광좌를 두 편에 세우고 왕은 한가운데 서서 좌우편 손으로 한사람씩 손을 잡고 서로 화합을 권고하였으나 그 권고도 효력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전과 같이 격심치는 않았다. 정신 중에도 탕평을 주장하는 사람은 노론 김재로(金在魯) 소론 조현명(趙顯命) 같은 상신은 다 탕평대신이란 이름이 있었다. 영조의 심경은 원수도 없고 당론도 없고 다만 나라만 생각하고 아무쪼록 융화를 주장하였다.
조정의 벼슬도 아무 일 없을 때는 양편에 같이 벼슬을 주고 차별이 없었고 또 무슨 죄가 있을 때는 그 당자만 처벌하고 그 전과 같이 그 당이면 일망타진으로 다 벌주는 일이 없었다. 이때 남인과 북인은 다 정계에 물러가고 아무 이론이 없으나 다만 노소론 사이가 몹시 험악하여 경종 때 왕세제 일과 또 숙종 때 장희빈의 일을 왕은 다 자세히 아는지라. 그들의 융화가 없이는 나라가 유지할 수 없는 고로 왕은 탕평론에 전력을 기울여 주장하였다.